간만에 비가 내려 거리와 건물, 나무에 내려 앉은 먼지를 씻어주었다. 내리는 김에 좀 더 많이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으나 아쉽게도 서울엔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았다. 기온도 많이 올라 나무가지마다 겨울눈이 새움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꽃망울이 맺힌 나무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조금 있으면 벛꽃이 피고, 목련도 화사하게 꽃을 피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완연한 봄이구나'라고 감탄하는 순간 갑자기 더워질 것이다. 짧은 봄을 즐겨야겠으나 그럴 틈을 내지 못해 안타깝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1990년대 중후반 국내 신문사 국제부.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이름도 생소한 어느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외신 기사가 들어왔다. 국제부장이 이 기사를 쓰라고 부원에게 지시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벌 사진을 찾아서 넣으라고 했다. 이름도 생소한 먼 나라의 더욱 이름이 생소한 군벌의 사진을 찾으라는 것은 당시로선 눈 덮인 산에 올라 산딸기를 구해오라는 주문에 다름 아니었다. 사진을 구할 수 없다는 부원의 말에 부장이 말했다. "인터넷에서 찾으면 되잖아! 인터넷에 들어가면 다 있다면서?"
한 선배가 직접 겪은 일이라며 들려준 이 일화는 아날로그 시절의 총아가 인터넷 시대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20년쯤 지난 지금, 인터넷이 있던 자리는 '빅데이터'라는 말이 대체하고 있다. 광고 회사에 다니는 내 친구는 요즘 빅데이터의 압박이 심하다고 토로했다. 한 동안은 빅데이터를 언급하며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선에서 상사나 광고주를 설득하는 게 가능했는데, 이제는 "요즘 빅데이터를 돌리면 다 나온다는데 빅데이터에서 뽑아낸 것 좀 가져와봐"라는 구체적인 주문이 따라붙는다고 했다.
빅데이터든 그냥 데이터든 데이터는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기존에 존재하던 정보 유통을 양적·질적으로 변화시켰듯 빅데이터의 등장은 인간과 사회에 관한 이해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사회학의 아버지 오귀스트 콩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세심한 경험적 연구는 사회의 작동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학문을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이라고 명명했다. 이 명칭은 훗날 사회학으로 정착됐다.(『빅데이터 인문학』사계절, 250쪽) 그러나 인간 사회의 작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밝혀내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렵고 때로는 위험한지 우리는 경험했다.
요즈음 분야를 막론하고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오고 있는 빅데이터는 '콩트의 꿈'이 그리 허망한 것만은 아니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데이터가 더 많이 쌓이고 이를 분석하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개인의 행복과 공공의 복리가 향상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러나 빅데이터가 가져올 효용 앞엔 무서운 덫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첨예한 것이 바로 프라이버시 문제다. 빅데이터와 프라이버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안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오빠 헨젤은 아버지와 계모의 손에 이끌려 깊은 숲 속으로 걸어가면서 흰색 조약돌들을 몰래 흘렸다. 현대인은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손가락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디지털 족적'을 남긴다는 면에서 모두 헨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동화 속 헨젤이 두 번째로 숲에 끌려갈 때 흰 조약돌을 구하지 못해 빵 부스러기를 남겼다면, 현대인에게 디지털 흰 조약돌은 바닥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남기는 흰 조약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헨젤은 자신이 흘린 조약돌 덕분에 깊은 숲에서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마녀가 이걸 눈치챘다면?
2013년 4월 15일 보스턴 마라톤 대회 결승점 근처에서 폭탄 두 개가 터져 세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용의자들을 추적하자 그들에 관한 온갖 정보들을 쏟아져 들어왔다. 순전히 우연하게 용의자들을 찍은 고해상도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의 쇼핑 체인 타깃(Target)은 고객들의 다음 구매를 부추기기 위해 구매 행태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부모 몰래 임신한 10대 소녀에게 육아용품 구매를 부추기는 쿠폰을 보냈다가 그 소녀의 부모가 알아채는 일이 벌어졌다. 임신 진단 시약을 구매한 여성은 임신을 했거나 임신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위의 책 240, 243쪽)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과 중앙정보국(CIA) 에드워드 스노든이 빼돌린 기밀 문서에 관한 기사를 가디언지에 보도한 글렌 그린 월드가 지난해에 쓴 책의 제목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No Place to Hide)』였다.
불경에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비유가 있다. 빅데이터는 젖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빅데이터 시대의 본격 도래와 함께 '검색되지 않을 자유'가 반드시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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