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경제(經濟)'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이다. 사전은 경세제민의 뜻을 '세사(世事)를 잘 다스려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百姓)을 구(求)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경제를 뜻하는 영어 단어 '이코노미(economy)'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무스(Oeconomus, œconomus, oikonomos)'에서 유래했는데 오이코노무스는 집(house)을 뜻하는 '오이코(oiko)'와 관리·지배(rule·law)를 뜻하는 '노모스(nomos)'가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코노미는 집 관리 즉, 이재술(理財術)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한 후배는 경제학이 뭐냐는 내 아들의 질문에 대해 위와 같은 동서양의 경제의 개념 차이를 얘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얘기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 선생님이 경제가 경세제민의 줄임말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하는 학문이라고 했걸랑. 삼촌은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 그런데 막상 대학에 와서 보니까 경세제민의 경제와 이코노미의 경제가 다른 것 같더라. 경세제민의 경제는 훨씬 뜻이 넓고 사람과 사회에 관한 학문이라는 뜻인데, 이코노미의 경제는 돈을 벌고 분배하는 등 돈에 집중하는 측면이 강하지."
초등학생 내 아들이 이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내 아들보다 내가 더 많은 생각을 했다.
경제는 이처럼 동서양에서 어원이 다를뿐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 국가와 시민사회, 부자와 빈자 등 각자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도 영 딴판으로 바라보는 대상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선 경제라는 용어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몰린 정부·여당이 반대파의 비판을 잠재우는 마법의 주술로 사용되거니와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고 반격하는 무기로도 쓰인다.
세월호 참사의 제대로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단식농성을 마치 정치적으로 불순한 세력의 조종을 받은 '이적행위'인 것처럼 보도하던 한 신문은 얼마 전부터 신문 각 페이지 머리의 제호 옆에 '경제를 살립시다'란 구호를 새겨 넣었다. 그 신문의 제호에선 '경'자나 '제'자가 보이지 않으니 형제나 가족이 아닐진대 각 페이지마다 제호 옆에 경제를 살리자고 새겨넣을 정도로 애타게 부르짖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정치학자들이 경제학자들을 조롱할 때 쓰는 우스개가 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이야기를 응용한 것인데 경제학자들에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을 물어보면 "일단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었다고 가정하자"라고 한단다. 복잡하고 유동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과 인간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면서도 마치 자연과학을 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숟한 가정을 남발하는 경제학자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비슷한 조크가 무인도에 홀로 표류한 사내가 통조림을 발견했는데 이걸 열 도구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경제학자의 답은 '일단 뚜껑을 열었다고 가정하자' 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몸담고 있는 장하준 교수는 한국 사회에선 진보와 보수로부터 동시에 환영과 함께 비판을 받는 학자이다. 경제의 과도한 금융화를 경계하고 제조업을 강조한다는 면에선 진보 진영의 환영을 받지만 국가주도 성장을 강조한다는 점에선 비판을 받는다. 장 교수의 논리가 '박정희 개발독재'를 승인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점은 반대로 보수 측의 환영을 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장 교수의 책들은 스테디셀러가 많다. 몇해전 내놓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랐다. 그는 뚜렷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겁을 먹기 마련인 경제적 개념들을 쉽게 서술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장 교수는 영어로 먼저 책을 쓰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특징도 있다.
장 교수는 앞서 말한대로 제조업의 중요성, 제조업 육성을 위한 산업정책의 필요성, 경제의 과도한 금융화에 대한 경계 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는데 작년 여름 국내 출간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도 비슷하다. 제목이 '경제학 강의'인 것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장 교수는 이번 책에서 경제학의 각종 개념들, 다양한 경제학파들을 설명하고 있다. 영어 원제는 <Economics> 부제는 'The User's Guide'다. 우리말로 하자면 '사용자를 위한 경제학 설명서' 정도 되겠다. 장 교수가 경제학의 제 개념과 학파들을 설명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제를 단 하나의 시각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하는 '단 하나'의 시각이란 1980년대 말 이후 주류로 군림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즉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지칭한다는 것은 책 곳곳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부키 |
고전주의 학파
한 문장 요약 - 시장은 경쟁을 통해 모든 생산자를 감시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고전주의 학파는 경제 주체들이 각자의 이익을추구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국부의 극대화라는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고전주의 학자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이른바 '세의 법칙'을 신봉했다. 이 법칙은 모든 경제 활동이 생산물의 가치에 해당하는 임금, 이윤 등의 소득을 수반하기 때문에 수요 부족으로 인한 불황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불황은 전쟁이나 대형 은행의 파산 같은 외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시장은 그 성격상 불황을 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가령 정부가 의도적으로 적자 지출을 하는 식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방해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4장. 백화제방 119~120쪽)
신고전주의 학파
한 문장 요약 - 각 개인은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행동하므로, 시장이 오작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 놔두는 것이 좋다.
고전주의 학파가 뚜렷이 다른 계급들이 모여 경제를 구성한다고 생각한 데 반해 신고전주의 학파는 경제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신고전주의 학파는 경제학의 초점을 생산에서 소비와 교환으로 옮겼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경제 체제를 '독립 의지를 가진'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궁극적으로 돌아가는 교환 관계의 그물로 본다. 실제 생산 과정이 어떻게 조직되고 변화하는지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는 것이다.
(4장 백화제방 124~126쪽)
마르크스 학파
한 문장 요약 - 자본주의는 경제 발달의 막강한 동력이지만, 사유 재산이 더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면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4장 백화제방 131쪽)
개발주의 전통
한 문장 요약 - 후진 경제에서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놓으면 개발이 불가능하다.
(4장 백화제방 137쪽)
오스트리아학파
한 문장 요약 - 모든 것을 충분히 아는 사람은 없으므로, 아무한테도 간섭하면 안 된다.
(4장 백화제방 142쪽)
(신)슘페터 학파
한 문장 요약 - 자본주의는 경제 발달의 막강한 동력이지만, 기업이 대형화되고 관료주의화하면서 쇠락하게 되어 있다.
(4장 백화제방 145쪽)
케인스학파
한 문장 요약 - 개인에 이로운 것이 전체 경제에는 이롭지 않을 수도 있다.
케인스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간인의 가정에서 통하는 신중한 선택이 왕국 전체에 통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는가."라는 애덤 스미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케인스는 이런 견해를 반박하면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자동으로 균형을 이루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서 실업자, 가동을 쉬는 공장, 팔리지 않는 물건이 공존하는 상황이 오랜 기간 계속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놀랍게도 이 불확실성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첫 임기 동안 국방 장관을 지낸 도널드 럼즈펠드이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브리핑하는 기자 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려진 기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알려진 미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미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들 말이다." 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수(unknown unknown)'라는 표현이야말로 케인스의 불확실성 개념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
케인스에 따르면 이것이 금융 시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군중 심리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금융 시장은 금융 투기와 거품, 그리고 거품이 꺼지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에 기초해서 그가 투기의 힘으로 돌아가는 금융 시스템의 위험을 경고한 것은 유명하다. "기업이 큰 물줄기를 이루고 투기가 그 위를 떠다니는 거품일 때는 투기도 별다른 해가 없다. 그러나 기업이 투기라는 소용돌이 위에 떠다니는 거품이 된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한 나라의 자본 개발이 도박의 부산물로 생긴 것이라면 작동을 잘 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4장 백화제방 149~153쪽)
제도학파: 신제도학파? 구제도학파?
한 문장 요약 - 개인이 사회적 규칙을 바꿀 수 있다 해도 결국 개인은 사회의 산물이다.
제도학파의 탄생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명성을 얻은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인간의 행동은 본능, 습관, 신념 등 여러 층의 동기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성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층이라고 주장했다. 또 인간의 합리성은 시공을 막론하고 변함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하는 특정 개인을 두러싼 공식적 규칙(법, 기업 내규 등)과 비공식적 규칙(사회 관습, 상거래 관습 등)으로 이루어진 제도에 의해 형성된다고 강조했다. 사회 제도는 구성원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구성원들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변화한 구성원들이 다시 제도를 바꾸게 된다고 베블런은 믿었다.
(4장 백화제방 154~155쪽)
행동주의 학파
한 문장 요약 - 인간은 충분히 똑똑하지 않기 때문에 규칙을 통해 의도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4장 백화제방 159쪽)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에필로그 그래서 이제는? 435쪽)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경제학을 '하는' 데 옳은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세계 경제학을 지배한 신고전주의적 접근법을 비롯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지닌 경제학파가 적어도 아홉 개 이상 존재한다.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문제를 특정 이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특정 질문만 하게 되고, 특정한 각도에서만 답을 찾게 된다.
(에필로그 그래서 이제는? 437쪽)
해리 S. 트루먼은 특유의 촌철살인 화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문가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더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뭘 더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그래서 이제는? 440~441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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