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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산, 들, 바다

수성동 계곡 바위와 씨름하는 사람



작고 허름하지만 음식이 맛있어서 사랑하던 식당이 널리 알려져서 이른바 '맛집' 반열에 오르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광경을 바라보는 심정은, 비유하자면 나 혼자 짝사랑하던 상대가 미모가 너무 빼어나 어느덧 그를 사랑하는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버렸을 때 느끼는 심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몇년전부터 인사동에 버금가는 필수 관광코스가 돼 중국인, 일본인 등 해외관광객,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 그리고 사모님들에게 점령당해버린 삼청동을 바라볼 때 그런 기분이었는데 요사이 서촌을 갈 때마다 다시 그런 느낌이 든다.


경복궁 동쪽의 삼청동, 북촌, 재동을 점령한 관광객과 산책자들이 경복궁 서쪽의 서촌 쪽으로 활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년 됐지만 1~2년 사이 서촌은 완전히 다른 동네가 돼 버렸다. 좁은 골목길에 카페가 먼저 자리잡았고 레스토랑과 갤러리도 속속 전입신고를 하고 있다. 조용하던 골목이 활기로 가득찬 것은 좋은 일일지 모르겠으나, 호젓하게 산책하던 골목에서 이제는 마주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칠까봐 발디딜 곳을 살펴가며 걸어야 한다는건 좀 짜증스러운 일이다. 점심식사 시간에 손님이 적당하게 있어서 언제가든 편하고 맛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식당 앞에서 줄을 서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인왕산 아래 옥인동 골목에 '영화루'라는 중국집이 있다. 이 집은 매운 간짜장이라는 독특한 짜장면을 판다. 짜장면에 저민 청양고추를 넣었다. 짜장의 달달한 맛과 청양고추의 강렬한 매운 맛이 어우러져 그럴듯한 맛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매운 것을 싫어하거나 잘 못 먹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상당히 맵다. 내가 이 집에 처음 간 게 4년 전인가 그럴텐데 그때도 아주 무명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서촌 지역이 그야말로 뜨면서 이 집의 인기도 전과 달라졌다. 어느 케이블방송의 음식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경복궁역 바로 옆 체부동 시장 골목도 그렇다. 술 좋아하는 내가 1차부터 3차까지 이 골목 안에서 마무리한 적이 많았는데 요샌 너무나도 유명해져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전에 있던 허름한 술집, 밥집들이 깔끔하게 인테리어를 한 퓨전 스타일 가게들로 많이 바뀌기도 했다.


이 동네를 발치에 품고 있는 인왕산도 인기 절정이다. 통인동, 누하동을 거쳐 옥인동으로 올라가면 수성동 계곡이 나오는데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산책을 가면 선글라스를 낀 중년 여성들이 골목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한국인들은 레저나 여가활동도 강한 유행을 탄다. 주5일제 도입으로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다양한 여가활동을 하는데 기억나는대로 순서를 꼽아보면 사람들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다가, 마라톤을 달렸으며, 다시 바퀴로 돌아와 자전거를 탔다. 몇년 전부터 오토캠핑이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최근엔 등산과 걷기가 열풍이다. 서촌 골목 골목을 누비는 중년 여성 부대는 하나의 사회현상, 문화현상으로 뜯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에 회사에서부터 북악산길을 거쳐 수성동 계곡으로 해서 영화루엘 다녀왔다. 과거 아파트가 있었다가 헐리고 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수성동 계곡길에 서서 인왕산쪽을 올려다 보면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水聲洞·1676)'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이 그대로 펼쳐지는데 구청이 설치한 안내판을 보면 잘 이해가 된다.(정선의 '수성동' 보기) 이곳에서 인왕산을 보면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저절로 '명당'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이런 것이 바로 '숭고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수성동 계곡길 옆 커다란 바위 상단에 있다. 재질은 찰흑이나 석고 같았는데 채색까지 했다. 장난 삼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만든 솜씨를 보면 엄연한 작품이었다. 저런 깜찍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가 부럽다. 내가 붙인 작품 제목은 '수성동 계곡 바위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앙증맞은 이 사람은 조만간 수성동의 새로운 명물이 될 것 같다.








추신: 인왕산과 서촌 일대를 걷는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책이 있다. 2010년 말에 나온 <신인왕제색도>와 <인왕산일기>라는 책이다. 내 블로그에 이 책들에 관한 글이 있다.([리뷰]신인왕제색도 & 인왕산일기 보기) 내친김에 산과 산악인에 관한 책을 소개한 글도 올려본다. (산악만화 <K 케이>를 계기로 돌아본 산악책들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