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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휘뚜루마뚜루

도시 인도에 떨어진 은행열매를 애도함

얼마전 지리산엘 다녀왔는데 경남 산청군 산골마을을 들머리로 삼았다. 높은 산골 사이 계곡은 깊었지만 좁다란 들녘에도 가을의 결실은 풍성했다. 논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산들바람을 타고 춤추고, 유독 그 지역에 많은 감나무들엔 탐스런 감들이 수도 없이 매달려 가지를 휘고 있었다. 감은 서리를 맞아 이파리가 거의 떨어진 다음 수확을 하는데 10월초였기 때문에 아직 수확하지 않은채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들은 눈을 자극하고 입에 침이 고이게 했다. 차창 밖으로 봤지만 게중엔 일찍 익어 땅에 떨어져 방치된 홍시들도 여럿 보였다. 속으로 ‘에구 아까워서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산짐승, 들짐승의 먹이가 될 수도 있고 행여 그대로 썩는다 한들 땅이 만든 것이 땅으로 돌아가 양분이 될 터이니 그리 애석해 할 일은 아니었다.


요즘 서울시내 도심에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들에도 그들이 올 한 해 애써 만든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린다. 은행나무 화석은 최고 오래된 것이 2억70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존하는 나무 가운데 친족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근접한 종들과의 교배나 돌연변이 등 진화를 거져 오늘날이 이른 것이 아니라 최소한 2억7000년 전에 등장해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 ‘진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시간 살아남은 저력 때문인지 ‘나무 주제에(?)’ 꽃말도 장중하다. 진혼, 정적, 장엄, 장수, 정숙 등이 은행나무의 꽃말이란다. 은행나무는 공해에 강해 가로수로 애용되고 있으며, 은행나무가 함유한 성분은 고대로부터 약물로 사용됐다. 특히 가을이 되면 온통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찬바람 부는 삭막한 도심풍경을 훈훈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연인들이 깔깔대며 샛노란 은행나무 잎을 뿌리고, 은행잎더미에 누워 사랑의 눈빛을 교환하는 장면은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역사도 깊고 미덕이 많은 은행나무이지만 딱하나 고약한 점이 있다. 후라이팬에 올려놓고 소금 솔솔 뿌려서 구워 먹으면 소주 안주로 그만인 은행나무 열매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그것이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있는데 열매는 암나무에서 열린다. 은행열매 껍질은 처음엔 녹색이지만 결실을 맺을 시기가 다가올수록 잎과 마찬가지로 노랗게 변한다. 그대로 놔두면 땅으로 떨어지는데 냄새가 고약하기 그지 없다. 물컹한 껍질은 독성도 있어서 손이나 옷에 뭍으면 흔적이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가을철 도심 인도를 걸으려면 곳곳에 지뢰처럼 떨어진 은행열매를 피하기 위해 징검다리를 건너듯 해야 한다. 행여 땅에 떨어진 은행열매를 밟기라도 하면 ‘으적’하고 발밑에서 깨지는 느낌이 영 아니올시다다.


그런데 은행열매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나 그것을 밟았을 때의 불유쾌한 느낌, 으깨진 은행열매가 인도에 남긴 검고 지저분한 자국을 보는 것의 거북함보다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 건 땅에 떨어지자마자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것도 아니요, 후손을 태어나게 하고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씨앗으로 쓰이는 것도 아니고, 땅으로 돌아가 대지의 자양분조차 되지 못하는 은행열매의 허망한 운명이다. 그들은 그저 밟히고 쓸리다 비질에 휩쓸려 쓰레기 봉투로 들어가거나, 가루가 돼 빗물에 씻겨 하수구로 흘러들어갈뿐이다. 서울 도심 인도에 떨어진 은행열매는 생명의 씨앗을 갖고는 있으나 불임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얼핏보기에 생생한 활기로 가득찬 대도시. 인도에 떨어진 은행열매들은 이처럼 활력 있어 보이는 도시가 실은 불임성을 감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좌로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