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아니 모인다'는 속담이 있다. 사전은 이 속담이 '사람이 지나치게 결백하거나 엄격하면 남이 따르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매사에 원칙과 규정을 따지거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 입장에선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자연에서 맑은 물을 찾아보기 쉽지 않듯 '지나치게 결백하거나 엄격한 사람'도 실제로 만나기가 쉽지 않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심정으로 타인이 입는 피해, 사회적 불의에 눈감거나 때를 묻히고도 안묻은 척하고 살아간다. 내가 피해를 입으면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때려눕힐 듯 부르르 떨다가도 상대가 '갑', 내가 '을'이라는 권력관계가 확인되면 꼬리를 내린다. '똥이 더러워서 참지 무서워서 참나'라고 위안이 되지 않는 자위를 하면서.
그럼에도 불의를 폭로하거나, 특히 남이 당한 억울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나서면 손해를 볼 줄 뻔히 알면서도 나서는 '맑은' 사람들이 있다. 만화가 최규석이 연재중인 웹툰 <송곳>의 부진노동상담소의 구고신 소장은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이." 이 웹툰에 등장하는 이수인 과장 같은 사람이 바로 송곳같은 인간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판매 사원들을 어떤 식으로든 괴롭혀 그만두게 만들라는 부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장님. 그거 불법입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지난주 나는 맑은 물 같은 사람, 송곳 같은 사람을 한명 더 알게 됐다. 지난 19일 밤 서울 신촌의 산울림 소극장에서 열린 신대철의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록밴드 시나위의 리더인 그는 <뛰는 개가 행복하다>란 제목의 책을 냈는데 김철영 MBC 라디오 PD가 그를 상대로 인터뷰한 책이다. 대중음악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나였지만 김종서, 서태지 등 그와 관계가 있다는 뮤지션들은 익히 알고 있기에 그가 풀어놓은 비화, 그들에 대한 평가 등은 솔깃했고 재미있었다.
뛰는 개가 행복하다 - 신대철.김철영 지음/알마 |
소극장 무대에 두사람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었는데 신대철씨는 수줍음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1986년 데뷔했으니 무대 경력이 30년이 다 되가는 뮤지션인데도 질문에 답할 때 관객 쪽을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거나 질문자인 김철영 PD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조곤조곤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예술가의 전형이었다.
김철영 PD는 "대철이형 같은 뮤지션은 일분 일초를 음악에만 전념하는 게 대한민국 음악계를 위해서 좋은 일인데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이 있다"면서 그가 요즘 정력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일에 대해 소개했다. 시나위의 리더이자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라는 그에 대한 수식어 외에 그에겐 그가 요즘 들고 다니는 명함에 박힌 공식 직함이 하나 있다. '바른음원협동조합 이사장'이 그것이다. 자신의 신변에 대해선 관객과 눈도 잘 못마주치고 목소리도 작었던 그가 한국의 음원 유통 현실, 그리고 뮤지션들이 처한 상황을 말할 땐 모습이 달라졌다. 시선은 정면을 응시했고, 목소리도 또렷해졌다.
"여러분, 음원 1곡의 가격이 얼마인지 아세요? 한국에서 음원 한곡이 팔릴 때 뮤지션이 받는 돈이 얼마일까요? 하루에 커피 몇잔이나 드십니까? 두잔? 세잔? 세잔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믹스 커피를 종이컵에 타서 먹잖아요. 그 종이컵 하나에 얼만지 아세요? 10원입니다. 화장실에서 손씻고 나서 닦는 휴지 있잖아요. 그건 얼마일까요? 한번 맞춰보세요. 4원입니다. 여러분이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손 씻고 종아타월 2장을 쓰시면 8원을 쓰시는 셈이에요. 나무젓가락 하나는 얼마일까요? 15원입니다. 플라스틱 수저는요? 수저 끝에 이쑤시게가 달려있는 플라스틱 수저 있잖아요, 그건 33원 정도 합니다. A4용지 한장은요? 7원입니다. 그럼 이쑤시게는 얼마일까요? 싼 게 2.2원하고요, 녹말로 된 거 있잖아요? 그게 4원 정도 합니다. 여러분이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스트리밍해서 듣잖아요. 음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한 달 무제한 스트리밍 이용권 가격은 6000원 정도 할 거예요. 이 이용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음악 한 곡을 들으면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돈은 7.2원 정도 하는데 이걸 저작권자, 저작인접권자, 실연권자 사이의 정해진 비율로 나누다 보면 결국 제작사나 가수가 받는 돈은 1~2원 수준입니다. 여러분, 쌀 한 톨이 얼만지 아세요? 경기도 이천쌀 질 좋은 쌀 한톨을 대강 계산해봤더니 0.7원 가량 하더라고요. 음원 값이 쌀 몇 톨 값 밖에 되지 않는거에요."
음원 유통 시장이 대기업, 재벌의 횡포에 의해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에 대한 그의 폭로 아닌 폭로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그의 폭로가 폭로가 아닌 것은 세상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리면 음원 유통 구조의 왜곡에 대해 대강 짐작은 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그의 폭로가 폭로인 것은 사람들이 그 왜곡된 음원시장을 "어쩌겠어"라면서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애플 아이튠스가 유일하게 서비스 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인데 왜 그런지, K팝이 해외에서 인기라는데 정작 해외선 K팝 음원을 살 수 없어 외국인들이 유튜브로 들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매듭을 짓는 그의 마지막 말이 귓전을 때렸다. "이래선 안되는 거잖아요."
사실 신대철 정도의 문화적 자본을 가진 인사라면 복잡한 세상사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그가 가진 능력을 발휘하기만 해도 그 한몸 건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은 노력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후배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의 대중음악이 모두 망하게 되리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이른바 '0원 아파트 난방비'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 배우 김부선 같은 사람도 사실 신씨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씨는 거창한 대의를 말하는게 아니다. 그저 "이래선 안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한달에 50만~60만원씩 누구는 난방비를 내고 누구는 안 내고 말이 안 되잖아요. 저같은 서민들, 힘들게 처음으로 내집 장만한 사람들, 나같이 버스타고 다니는 아줌마들에게 작은 돈이 아니에요. 정부든 시장이든 누구든 나서야 될 것 같은데 주민자치기구 일이라고 신경을 쓰지 않아요. 이 순간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잖아요"라고 말한다.
불의에 대해 몰라서 당하고만 살거나, 불의를 보고도 비겁함·소심함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소시민들로 그득한 세상이 그나마 반쯤 밖에 미쳐버리지 않은 것은 바로 이수인, 신대철, 김부선 같은 '송곳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이수인, 신대철, 김부선 같은 사람들의 외침이 메아리를 만들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져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미쳐 버릴지, 송곳 같은 그들이 흠집을 낸 껍데기 밖으로 뛰쳐나간 목소리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탁류의 속도가 늦춰질 수 있을지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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