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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밑줄치며읽기

솜씨 좋은 역사 요리사 곰브리치가 맛깔나게 빚어낸 세계사 책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저명한 미술사학자다. 왠지 모르게 이름이 주는 어감이 구수한 유대인 곰브리치는 책 ‘서양미술사’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1950년에 출간된 이 책은 원제가 ‘The Story of Art’이다. 우리 말로는 서양미술사로 번역된 것은 책의 내용 대부분이 서양미술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인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근데 이 책 꽤 두껍다. 요즘 나오는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는 출판사는 전과 같은데 표지가 바뀌었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책 욕심에 이 책을 사다가 책장에 꽂아놓았는데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어느해 한 한기에 걸쳐서 찬찬히 읽었다. 여담이지만 내 책장에서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보다 더 두꺼운 부피를 자랑하며 지금도 꽂혀 있는 책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상·하)’다. 그러고보니 둘다 ‘서양’의 역사다.

 

서양미술사 - 10점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예경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당연히 미술 중심으로 서술됐지만 일반 역사서, 특히 인간의 바깥 세계에 대한 인식, 미적 감각의 변화 등에 대한 인류학 책으로 읽어도 될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읽을지 오래되서 세세한 부분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대목이 하나 있다.

 

  고대 이집트 미술에 관한 설명이었다. 곰브리치는 고대 이집트인이 사람이나 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얼굴과 다리는 옆모습, 몸통은 앞모습으로 그렸다는 점을 지적했다. 참 재미난게 그 이전에도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린 그림의 자료사진을 많이 봐 왔지만 곰브리치의 설명을 읽고 나서야 얼굴은 옆얼굴이고 몸통이 앞모습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신체가 이렇게 표현되다보니 지금 사람들이 보기엔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곰브리치는 이 대목에서 사람 눈에 보이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 혹은 괴리에 대해 설명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곰브리치는 고대부터 현대(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50년이다.)까지 위대한 미술작품들, 위대한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아기자기하게 풀어서 써내려갔다. 큰 판형에 600쪽이 넘는 분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시간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그런데 곰브리치가 쓴 첫번째 책은 미술사 책이 아니라 세계사 책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곰브리치 세계사’를 읽으면서 알게 됐다. 번역서 앞에 곰브리치의 손녀가 이 책의 역사를 소개했다. 빈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곰브리치는 1935년 일자리를 얻지 못해 소일거리를 전전했는데 어느 출판업자로부터 영국에서 나온 어린이 역사책을 독일어로 번역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곰브리치는 이 책을 읽어봤지만 그다지 훌륭한 책으로 보이지 않았고 “나라면 이보다 더 나은 책을 쓸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출판업자는 “그러면 샘플로 한 장을 써보라”고 제안했고, 곰브리치가 써온 중세 기사에 관한 원고를 보고는 대만족했다. 출판업자는 ‘6주안에 원고를 완성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곰브리치에게 원고를 맡겼다.

 

곰브리치 세계사 - 10점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비룡소

 

 이렇게해서 1936년 출간된 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5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곰브리치가 영국으로 이주하고 독일에 나치가 집권하면서 이 책은 평화주의적 관점 때문에 금서가 됐고, 1985년에 독일어판 개정판이 나왔다. 영어판은 2001년 그가 죽은 뒤로도 4년이나 지난 2005년에야 나올 수 있었는데 곰브리치 본인이 영어판 만큼은 자신이 번역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이 책은 세계사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유럽사에 관한 책이다. 전체 40개의 장 가운데 유럽 이외의 역사를 다룬 것은 기독교 탄생에 관한 팔레스타인·이집트 등의 역사, 인도, 중국(2개), 이슬람교 탄생이 고작이다. 이러한 제약과 단점을 접어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흥미진진한 책으로 칭송하고 싶다.

 

  특히 청소년 독자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세계사 책이어서 그런지 설명과 비유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역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 관한 비유를 보자.

 

 이것은 바닥없는 우물과도 같다! 그러한 우물을 내려다보려니 아찔함에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 우물 속에 불붙인 종이를 떨어뜨려 보자. 불붙은 종이는 주변의 우물 벽을 비추면서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불빛이 아직 보이나? 불빛은 점점 작아져 칠흑 같은 밤의 작은 별처럼 보이더니 끝내는 모습을 감춰 버린다. 기억이란 것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과거를 비추는 데 기억을 활용한다. 먼저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에 불러내고, 다음은 어른들에게 질문하며, 그다음에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편지를 찾아 읽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점점 더 먼 과거의 일을 알아낸다. (1.옛날 옛적에, 22~23쪽)

 

  나는 어떤 역사책에서도 이러한 비유를 본 적이 없다. 우물에 불씨를 자유낙하 시켰을 때 가까운 곳은 밝고 넓게 시야에 들어오지만 아래로 더 내려갈수록 밝기도 어두워지고 눈에 들어오는 시야도 좁아지는 현상을 인류의 과거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 빗댄 것이다. 이런 비유는 또 어떤가? 한 시대가 격렬한 진통을 거치며 다음 시대로 옮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그릴수도 있다니!

 

 무더운 여름날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특히 산악지대에서 그 모습은 장관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곧 맥이 풀리는 듯한 기분과 함께 공기 중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그러고는 천둥이 울린다. 그 소리가 여기저기서 번갈아 들리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다음에는 갑작스레 산들이 무서을 만큼 가까이 보인다. 가벼운 바람결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멀리서 둥근 구름이 뭉게뭉게 솟는다. 산들은 뿌연 간개 뒤로 거의 모습을 감추고 사방에서 구름이 밀려오는데 바람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천둥소리는 점점 자주 들리고 모든 것이 섬뜩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그저 다음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갑작스레 그 순간이 온다. 처음에는 무슨 구원의 순간처럼 느껴진다. 돌풍이 계곡을 휩슬고 사방에서 번개가 친다. 그러고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좁은 계곡 안에 번개 구름이 갇힐 것이다. 천둥소리가 계곡 절벽에 부딪혀 메아리를 만들고 여기저기서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얼마 후 번개 구름은 물러가고 맑고 고적한 밤하늘에는 별들만 반짝인다. 얼마 전까지 번개 구름이 밀려와 천둥 번개가 쳤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하려는 시대도 이와 아주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천둥 번개가 쳐서 거대한 로마 제국을 산산이 조각냈던 것이다. (중략) 이것이 그 시대를 뒤흔든 마지막 천둥 번개였다. 그러고는 서서히 별이 빛나는 밤이 찾아왔다. 중세로 접어든 것이다. (18.천둥 번개가 치던 시대, 181~189쪽)

 

 그는 중세를 ‘별이 빛나는 밤’이라고 비유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제 당신도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천둥 번개에 비유한 맥락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중세가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고 말한다면 분명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사실이다. 당신도 ‘중세는 암흑의 시대’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중세는 칠흑 같은 밤이기보다는 별이 총총 빛나는 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이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처럼 마술사나 마녀 혹은 악마나 악력의 존재를 쉽게 믿었으며 그로 인해 두려움에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대의 어두운 밤하늘에는 길을 가리키는 별들, 새로운 신앙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도 큰곰자리나 불극성 같은 별을 보면 쉽게 길을 잃지 않는 것처럼, 중세 사람들은 이따금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기도 했지만 완전히 길을 잃지는 않을 수 있었다. (19.별이 빛나는 밤, 190~191쪽)

 

 다시 한번 시대의 변화에 관한 기술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중세이고 언제부터 근대인지 알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역사가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나뉜 시대구분이다. 곰브리치가 아래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어요!”라고 외쳐주는 사람은 없다. 어제까지 근데, 오늘부터 탈근대라는 식으로 나뉠 수 없다. 당신의 아이가혹시 역사공부를 하다가 “아빠, 왜 언제까지 중세라고 하고 언제부터 근대라고 해요?”라고 시대구분 방식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니 아래의 기술을 눈여겨 봐두시기 바란다.

 

 당신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공책 같은 옛날 물건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가? 예전에 쓰던 공책을 넘기다 보면 그새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깨닫고 놀라게 도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당시에 쓴 글을 읽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부끄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그런 옛날 물건을 꺼내 보지 않았다면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나팔수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렇게 외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사람들의 생각은 서서히 바뀌며 스스로는 이를 감지하기 어렵다. 그러다 옛날 공책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어느 날 문득 뭔가 깨닫게 된다. 그러면 자부심에 차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그리고 흔히 이런 말도 하곤 한다. “옛날 사람들은 참 멍청했어!” 이와 비슷한 일이 1400년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특히 중부의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들에서 일어났으며, 개중에서도 피렌체가 대표적이었다. (26.새로운 시대, 272~273쪽)

 

 곰브리치 세계사가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세계사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그의 위트있는 논평이다. 또한 매우 압축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아래와 같은 기술은 보통의 내공으로는 압축해내기 쉽지 않다.

 

 예수의 가르침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신분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주인과 노예, 위대한 사상가와 어린아이 등의 구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신의 아들딸이고, 아버지인 신의 사랑은 무한하다.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신은 이 죄인들을 가엾게 여긴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은총이다. 은총이란 아낌없이 베풀고 용서하는 신의 무한한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신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16.기쁜 소식, 163~164쪽)

 

 곰브리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참회록’을 두문장으로 논평하는데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는 황제이자 철학자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주로 전쟁터에서 쓴 일기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여기서 그는 주로 자제심과 인내,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법, 침착한 영웅적 태도 등에 관해 성찰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처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것들이다. (17.로마 제국가 병견에서의 생활, 176쪽)

 

 곰브리치는 어린이·청소년에게 세계사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불가피하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부끄럽고 참혹했던 사건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들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세계사는 유감스럽게도 아름다운 문학이 아니다. 세계사는 우리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으며 심지한 불쾌한 일들도 자주 일어난다. (22. 기독교 세계의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 221쪽)

 

  내가 세계사에서 가장 재미있게 여기는 점은 그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일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꾸며 낸 이야기보다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이제부터 흥미롭고 경찬을 금치 못하게 하는 서건, 하지만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만큼 엄연한 현실이었던 사건을 이야기하려 한다. (35.마지막 정복자, 369쪽)

 

 아까도 말했지만 이 책은 1936년에 출간됐다. 그래서 본문의 마지막은 1차 세계대전이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1985년 개정판이 나오면서 곰브리치는 ‘후기’ 한 장을 추가했고 1차대전 이후의 세계사를 압축해 넣었다. 곰브리치는 본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앞서 인류의 기억을 되짚어 올라가는 과정을 우물에 불붙은 종이를 떨어뜨리는 것에 비유했던 그는 비행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으로 역사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다. “우리의 운명이란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속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벌이는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짧은 이 순간을 잘 이용하고자 한다. 그럴만한 가치는 있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마지막 문장은 한편의 잠언이다.

 

 우리가 이제 비행기를 타고서 시간의 강물을 따라간다고 상상해 보자. 뒤를 돌아보니 뿌연 안개 사이로 매머드 사냥꾼들의 동굴과 최초의 곡식이 자라는 들판이 눈에 띈다. 멀리 점처럼 작게 보이는 건물은 피라미드와 바벨탑이다. (중략)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얼른 내려가 강물 가까이로 다가가 보자. 시간의 강물 가까이로 접근하면 출렁이는 물결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거센 바람이 불면 강물은 몸을 한껏 뒤척이며 하얀 거품을 만든다. 하얗게 반짝이는 수백만 개의 거품이 물결과 함께 일어났다 스러지는 모습을 보라. 물결은 균일한 리듬으로 일어났다 스러지기를 바복한다. 한 순간 솟았던 물결이 다음 순간에는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춘다. 우리 역시 그처럼 덧없는 무엇, 아주 작은 거품이나 물방울은 아닐까 생각해 보라. 작은 물방울을 품에 안은 깊고 거대한 강물은 안개처럼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흘러만 간다. 우리는 떠올라 주변을 돌아보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 지나면 다시금 사라져 버린다.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시간의 강물에서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늘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우리의 운명이란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속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벌이는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짧은 이 순간을 잘 이용하고자 한다. 그럴만한 가치는 있기 때문이다. (39.열강들의 세계 분할, 435쪽)

 

 책에서 발견한 자투리 지식 하나. 유명한 일본 만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에반게리온’의 어원이 아래와 같단다.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은 그리스 어로 ‘에브 안겔리온’이며, ‘복음’을 뜻하는 ‘에반겔리움’도 여기서 비롯됐다. (16.기쁜 소식, 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