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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밑줄치며읽기

나도 농부가 되면 철학자가 될 수 있을까?

로마시대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는 많은 격언을 남겼는데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철학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유해지고 난 다음에 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도 그가 남긴 격언 가운데 하나다. 키케로가 말한 '철학'은 물론 현대의 '좁은' 의미로서의 철학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학문'의 개념이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라는 취지의 구절이 있듯 키케로 시대에도 역시 '부'와 '지성'은 그리 친화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부 통계에 잡히는 직업의 종류가 2만가지라든가? 3만가지라든가? 그 많은 직업 가운데 농업은 사양산업이라는 진단이 나온지 오래이지만 실은 인류의 직업 가운데 수렵, 채집 다음으로 역사가 길다고 할 수 있다. 농업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씨앗을 뿌리고 햇볕을 쪼이고 물을 줘서 작물이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수확하는 농업의 기본 메카니즘은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농부들이 쓴 책을 간간이 접한다. 농부들의 책은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공자나 맹자가 등장하진 않지만 소위 말하는 철학적 사색이 가득 담겨 있다. 독자들이 농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기대하고, 출판사들이 철학적 소양을 가진 농부들을 필자로 섭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내 생각엔 농부가 하는 일, 즉 농사일이라는 것 자체가 철학적 숙고를 동반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싶다. 앞서 말했듯 기본적으로 농사는 자신이 직접 먹기 위한 것이든,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것이든 공장에서 뚝딱뚝딱 물건을 찍어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농사일이 고된 육체노동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농사는 아무래도 '사색'을 동반하는 작업인 모양이다.

 

[책vs책]‘나무를 심은 사람’과 ‘나비문명’

공동체·생태·교육 에세이집 3권 낸 윤구병

 

진짜 채소는 그렇게 푸르지 않다 - 10점
가와나 히데오 지음, 전선영 옮김/판미동

 

여기 또 한명의 농부 철학자가 있다. 일본의 '자연재배' 전문가인 가와나 히데오. 자연재배란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그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부터 보자.

 

자연에서는 모든 벌레가 저마다 역할이 있고, 잡초라 불릴만한 풀은 없다. 균의 세계에서도 나쁜 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증거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숨을 이어가고 있는 수많은 산을 들 수 있다. 산은 영원토록 초목이 우거지고 생명을 이어간다. 거기에는 해충이나 병원균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대자연 속에서는 그것들이 못되게 굴더라도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을뿐더러 대부분 절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저 존재할 뿐 못된 직은 하지 않는다. 자연은 그런 세계이다. (168~169쪽, 식물을 먹는다는 의미)

 

그렇다면 가와나 히데오가 말하는 자연재배란 무엇인가. 아주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농약도 비료도 쓰지 않는 농사법이다. 흔이 농약을 쓰지 않는 농법을 유기농 재배라고 하는데, 자연재배는 유기농보다 한발 더 나간 농법이다. 유기농 재배가 비록 화학비료는 쓰지 않지만 동물의 똥을 주원료로 하는 유기비료를 허용한 반면 자연재배는 이마저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재배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농사법일까? 그건 아니다. 이 책에 보니 더욱 래디컬한 농사법도 있는 모양이다. 이른바 불경기재배. 즉 땅을 아예 갈아 엎지 않고 씨앗을 뿌리고 재배를 하는 것이다. 자연재배와 불경기재배의 차이를 설명한 부분이다.

 

 자연재배에서는 적극적으로 땅을 일구어 흙을 만든다. 적당한 시기에 제초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재배는 사람 품이 들지 않는 재배법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이 아예 논밭을 갈지 않고 채소를 기르는 불경기재배(不耕起栽培)와 큰 차이다.

"갈지 않은 땅이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자연은 내버려 두면 점점 질서를 잃는다. 그리고 다시 오랜 세월에 걸쳐 무질서한 상태를 질서 있는 상태로 되돌리려고 한다. 예컨대 나뭇가지는 내버려 두면 멋대로 죽죽 뻗는다. 그러다가 한계에 이르면 쓸데없는 가지를 시들게 한다. 이러한 순환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채소도 똑같다. 채소의 순환 속도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우리는 좀처럼 채소를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슬쩍 사람이 거드는 것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 자연의 규칙을 따르는 방법으로 거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실을 예로 들어 보자. 나무는 시든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떨어뜨릴 때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쓴다. 나무가 제힘으로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떨어뜨려서 에너지를 많이 쓰면 다음 단계로 에너지를 전환하기 어렵다.

이때 사람이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 주면 나무는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쌓아 둘 수 있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일에 에너지를 슬 필요가 없어진 나무는 그 에너지를 열매를 맺는 데 쓸 수 있게 되어 더욱 맛있는 열매를 주렁주렁 열리게 만든다. (75~77쪽, 자연재배와 불경기재배는 무엇이 다른가)

 

 

 

위 문단에 담긴 자연재배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①자연은 무질서한 상태를 질서 있는 상태로 되돌리는 성질이 있다. ②그런데 이런 변화는 너무 더뎌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③자연재배는 자연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입해 시간을 단축시킨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개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자는 그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의 목표가 농사법을 실용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재배의 정신을 알리려는 취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비료에 오염된 땅은 그로 인한 '비독'을 오랜 시간에 걸쳐 빼줘야 하고, 잡초나 해충이 들끓는 것은 비료 때문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그런데 '자연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개입'이라는 말은 일견 모순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가 말했든 자연은 놔두면 질서를 되찾는데 굳이 사람이 개입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이 질문의 답은 지은이가 자급자족을 하는 농부가 아니고 채소를 키워 내다 파는 사람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지은이는 '자연의 시간'에만 맡겨서는 남에게 내다팔 잉여 농산물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고 인정한다. 일종의 절충이자 타협인 것이다.

 

농부 철학자들은 대체로 현대문명의 미래를 암울하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문명과 자연은 거의 화해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가와나 히데오 역시 다른 농부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편리한 것, 효율이 높은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반드시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얼마 전까지는 과거에 비추어 봤을 때 현대사회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이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험을 느낀다.

지구 환경이든, 생활습관병(좋지 않은 생활습관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질환으로 총칭으로 전에는 주로 성인병이라고 불렀다.-옮긴이) 같은 건강 문제든, 경제적 상황이든 모두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이지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손으로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자연에게서 배운 가르침이다. (113쪽, 우리 곁에 있는 유전자 재조합 농산물)

 

나와 우리 아이가 즐겨 먹는 씨없는 포도에 대한 지은이의 지적 역시 따끔하게 다가온다. 인위적으로 거세해버린, 씨앗이 없는 과일은 인간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 씨앗은 그저 입안에서 걸리적거리는, 퉷하고 뱉어내 버리면 그만인 것인가?

 

이쯤 되면 씨앗이 원래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사전에서 씨앗의 뜻을 찾아 보면 '삭이 트는 근본이 되는 것', '탄생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 씨앗은 생명의 근원이다. 씨앗이 없으면 채소나 쌀은 태어나지 않는다. 씨앗에서 채소가 태어나 열매가 열리고 다시 씨앗이 생긴다. 이렇게 해서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생명의 릴레이가 이루어지는 것이 식물과 동물을 비롯해 자연에 사는 생물의 참모습이다.

그런데 오늘날 씨앗은 인간의 작업 효율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된다. 씨앗을 생명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한다.

전형적인 사례가 씨 없는 과일이다. 델라웨어라는 품종의 씨없는 포도나 씨 없는 수박 등 씨 없는 과일이 슈퍼마켓이나 시장에 가면 수두룩하다. 워낙 흔해서 희한하다는 생각조차 못할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식물, 특히 열매인데 씨앗이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씨앗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씨앗이 없는데 다음 작물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을까? 애초에 씨앗 없는 과일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

포도를 예로 들자면, 꽃의 단계에서 두 차례 지베렐린이라는 식물 호르몬액에 잔뜩 절여서 씨앗이 생기지 않게끔 한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수분하면 암술에서 식물호르몬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다양한 효소가 작용해서 씨앗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호르몬액에 담가 두면 포도가 수분과 수정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씨앗이 생기지 않는다.8

씨 없는 포도는 먹기 쉬워서 소비자에게 인기가 높고 잘 팔린다. 그래서 생산자는 씨 없는 포도를 계속 재배한다.

조금만 신경 써 보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것이 전혀 자연스럽제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연스럽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부디 씨앗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기 바란다.

(119~120쪽, 씨 없는 과일이 나온 배경은?)

 

주차장 옆 길다란 화단에 올해도 상추와 치커리를 심었다. 화단에 채소를 심은 것은 올해로 3년째다. 상추와 치커리 모두 꽃대가 올라와서 올해 봄 농사도 거의 마무리 됐다. 장마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는데, 큰비가 좀 지나고 나면 화단을 갈아엎고 들깨씨앗을 뿌려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