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 스키너 : 마음의 재구성 - 조숙환 지음/김영사 |
촘스키의 보편 문법 이론을 거칠게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언어 기계를 내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이 언어 기계에 어릴 적에 어떤 언어가 투입(input) 되느냐에 따라 모국어가 결정된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어린 아이가 어릴 적부터 영어권에서 자라면서 영어에 노출되면 영어가 모국어가 되고, 반대로 앵글로 색슨 어린이가 어릴 적부터 한국어 환경에 노출되면-다시 말해 한국어가 어릴 적에 투입되면-한국어가 모국어로 세팅이 된다는 것이다. 뒤에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매개 변항 이론으로 더욱 간명하게 설명될 수 있다.
촘스키는 원어민들이라면 아동이나 성인 모두 과거에 한 번도 들어보지못했던 새로운 문장의 적합성을 의미적으로, 통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마음에 내적 언어I-language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내적 언어는 세계의 여러 언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문법이라고 주장한다. 내적 언어가 보편성을 띤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 지식을 스키너-블룸필드식의 경험주의적, 귀납적 논리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73쪽, 플라톤의 문제)
이러한 촘스키의 비판에 대해 스키너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스키너가 보이게 선험주의를 주장하는 촘스키의 이론은 비과학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스키너 자신은 '스키너 상자'라는 실험 도구까지 고안해가며 '데이터'와 '증거'를 가지고 말하는데 촘스키는 연역적이고 비과학적인 가설만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스키너는 보이지 않는 체계에 대한 촘스키의 연구는 선험적이며 내재적이기 때문에, 관찰 가능하면서 통제도 가능한 변항들을 이용하는 자신의 연구만큼 과학적이지는 않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촘스키는 스키너의 연구 방법이 마치 범죄자들에게 공권력을 남용하과 징벌로 위협하는 일부 경찰들의 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면서, 행동주의 방법으로는 이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75쪽, 플라톤의 문제)
그렇다면 자연환경이 인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인가?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분명히 환경은 인간의 심리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자연환경이 인간 심성의 본질적인 또는 본성적인 것까지 영향을 미치느냐 현상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치느냐가 아닐까.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 다른 두 관점으로 탐색할 수 있다. 첫째, 스키너-블룸필드식 '빈 서판' 경험주의 이론이다. 경험론자들이 옳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둘째로, 매트 리들리Matt Ridley, 1958~와 핑커의 견해를 들 수 있다. 리들리와 핑커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지식을 사용하고 서로 협력할 줄 아는 능동적인 주체로, 새로 발견된 것은 축적하고 서로 간의 차이점을 초월해 각자의 역할을 통합함으로써 과거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제도화한다. 리들리와 핑커에게 자연환경은 인간의 마음을 운명적으로 결정해 채우는 원동력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마음에 채워져 있는 본성이 발현되는 데 필요한 '매개체nature via nurture'일 뿐이다. (79쪽, 플라톤의 문제)
만약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 문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갖고 태어나 외국어, 제2외국어랍시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등을 개별적으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보편 문법을 공부한다면 전세계 모든 언어에 적용해 쉽게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마치 맥가이버 칼이 다양한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듯 보편 문법이라는 언어 지식만 갖고 있다면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다리어에 맞게, 아프리카에 가면 스와힐리어에 맞게 슥슥 모양을 바꿔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실제로 나는 보편 문법 이론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그런 신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 문법은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었다.
언어의 세계에는 풍부한 창의성뿐만 아니라 한정된 구조적 틀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촘스키가 "우리는 한정적인 수단을 어떻게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라고 질문했듯이. 여기에서 '한정된 구조적 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촘스키는 이것을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으로 규정한다. 즉 우리가 직접 듣고 말하는 피상적인 언어 형태 저변에 기저 구조가 있으며, 이 기저 문법은 모든 인간 언어를 지배하는 '보편 문법'이라고 규정했다. (…) 여러 나라의 말을 들어보면 서로 확실히 다르다. 그런데 피상적인 표현들의 저변 구조underlying structure를 살펴보면 보편적 특징이 발견된다는 것이 촘스키학파이 주장이다. 마치 해수면 위로 일부만 드러낸 채 떠 있는 빙산의 겉과 밑동의 관계처럼, 겉에서 감지할 수 있는 빙산의 형태나 우리가 피상적으로 표현하고 듣는 언어 형태는 바람과 태양 등 환경의 영향으로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지만, 환경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받침대로서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킬 바닷속 미통은 인간 언어의 일반적인 보편 구조와 유사한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93~94쪽, 플라톤의 문제)
보편 문법은 어떻게 개별 언어로 연결되는가. 촘스키는 '매개 변항'이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앞서 말한 언어 기계를 떠올려 보자. 보편 문법이라는 언어 기계를 처음부터 전기로 구동시키기 시작하면 전기 기계가 되고, 휘발유를 주입하면 휘발유로 작동하는 기계가 되고, 디젤을 넣어주면 그 뒤로는 디젤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된다는 것인데, 보편 문법에 '경험'이 더해지면서 개별 언어의 문법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매개 변항 이론parameter theory을 이용해 언어의 보편성과 각 언어 고유의 특수성의 관계를 설명했다. (…) 매개 변항이란 원래 수학적 개념으로 모집단의 특징을 나타내는 속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인간 언어 구조의 보편적 특징을 의미한다. 촘스키에 따르면 언어 간 차이는 매개 변항화parameterization를 통한 각 문법 구조의 선택에 의해 유발되며 각 언어 고유의 문법 구조의 선택은 경험에 의거해 결정된다. (94쪽, 플라톤의 문제)
매개 변항으로 제시된 머리어, 주어, 기능어, 절의 분기 방향 등은 촘스키학파에서 보편 문법 요소로 간주되는 사례들로서 모두 생득적 언어 지식이다. (99쪽, 플라톤의 문제)
매개 변항으로 제시된 머리어, 주어, 기능어, 절의 분기 방향 등은 촘스키학파에서 보편 문법 요소로 간주되는 사례들로서 모두 생득적 언어 지식이다. (99쪽, 플라톤의 문제)
어린이를 키워본 분들이면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 같은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아 미술 교재나 유아 학습지 등의 선전물을 보면 피아제 이론을 적용했다는 것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피아제는 누구인가.
장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와 같은 인지심리학자는 언어 능력의 생득성보다는 인지 기능의 선천적 능력을 인정했다. 피아제는 촘스키의 보편 문법과 같은 언어 지식의 생득성에는 반대했으며, 감각운동 지능을 비롯한 여러 인지 능력의 선천성으로 언어 지식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촘스키의 이론이 언어 지식의 내용 중심이라면, 피아제는 인지 능력의 기능functionalism적인 측면을 중요시한 것이다. (103쪽, 플라톤의 문제)
특정 유전자가 특정의 유전적 형질을 담당한다는 환원주의적 유전자관은 이곳저곳에서 비판을 받고는 있지만 여전히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당연히 인간의 언어 능력을 담당하는 유전자를 찾기 위한 과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이어졌고, 흥분되는 연구결과도 오래전에 나와 있다고 한다.
사람과 친팬지의 1.25% (유전자) 차이의 수수께끼는 2001년 10월,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연구진에 의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즉 인간은 어느 한 유전자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해 침팬지나 쥐 등 다른 독특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폭스피2FOXP2, forkhead box P2'라는 이름의 이 유전자가 오랜 진화 과정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사람이 정교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111쪽, 언어 유전자가 있을까?)
FOXP2 유전는 사람뿐만 아니라 침팬지, 쥐 등 여러 다른 포유동물에게도 모두 있는데, 염기 서열의 미세한 차이가 사람과 다른 포유동물들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다. 즉 이 유전자는 모두 715개의 아미노산 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경우 쥐와는 3개, 침팬지와는 단지 2개만 분자 구조가 다를 뿐이다. 이런 미세한 차이는 단백질 모양을 변화시켜 얼굴과 목, 음성 기관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뇌의 일부분을 훨씬 복잡하게 형성하고, 이에 따라 인간과 동물의 능력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113쪽, 언어 유전자가 있을까?)
회귀성이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된 'recursion'은 쉽게 말해 반복 또는 되풀이를 말한다. 문장 안에 문장이, 안긴 문장 안에 또다른 안긴 문장이 있거나, 관계절에 관계절이 반복되는 등 반복성이 인간 언어의 특징이라는 것이다.FOXP2 유전는 사람뿐만 아니라 침팬지, 쥐 등 여러 다른 포유동물에게도 모두 있는데, 염기 서열의 미세한 차이가 사람과 다른 포유동물들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다. 즉 이 유전자는 모두 715개의 아미노산 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경우 쥐와는 3개, 침팬지와는 단지 2개만 분자 구조가 다를 뿐이다. 이런 미세한 차이는 단백질 모양을 변화시켜 얼굴과 목, 음성 기관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뇌의 일부분을 훨씬 복잡하게 형성하고, 이에 따라 인간과 동물의 능력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113쪽, 언어 유전자가 있을까?)
최근 인지과학계의 화두는 '회귀성recursion'이다. 촘스키는 하우저, 피치와 함께 기고한 2002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언어 구조의 '회귀성'을 재천명했다. 예를 들어, '영이는 [순이가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와 같이 세 개의 저로 구성된문장을 보면, 명사고(예: '영이', '영화'), 동사구(예: '좋아한다', '안다'), 문장('내가 영화를 좋아한다') 등이 반복적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는데, 회귀성이란 이와 같이 동일한 구나 절이 회귀적·순환적으로 산출됨으로써 창의적으로 무한히 생성되는 언어의 특징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언어 구조는 마치 네덜란드 판화가 에스허르Maurits C. Escher, 1898~1972의 1956년 작품 '점점 더 작게Smaller and Smaller'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겹겹이 덮여 있는 양파 껍질처럼, 또는 러시아의 원목 중첩 인형 미트료시카matryoshka 같은 복합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촘스키학파에 의하면 명사구, 동사구, 문장 등의 통사 범주의 '회귀성'은 인간 언어에서만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통사 구조 체계로, 이런 순환적 구조는 선험적으로 습득되는 지식이다. (151쪽, 언어 지식은 미트료시카?)
독자인 우리는 돌고 돌아 결국 매우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왔다. 본성이냐 양육이냐.
인간 언어의 선험주의 혹은 경험주의는 영어 학습의 '노예'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가질 수 있다. 꼭 언어 학습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만약 언어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면, 반대로 경험에 의해 언어가 습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국어와 외국어의 학습 방식이 각각에 따라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본성이냐 양육이냐 문제는 교육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운영원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흔히 흉악범에 대해 '천성적으로 나쁜 사람' 또는 '범죄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고 환경이 범죄자를 만들었다'는 식의 양갈래의 접근을 하는데 본성론과 양육론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지은이는 책 말미에 본성과 양육, 찬 서판과 빈 서판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로 상호 작용하며 보완적인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Nature Via Nurture: Genes, Experience, and What Makes us Human>(2003)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은 유전적 특징에 의해 고정 불변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양육될 수 있다고 한다. 즉 리들리는 선천적 잠재 능력이 후천적 학습을 통해 발현될 수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본성과 양육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 되며, 본성이냐 양육이냐의 이분법적 사고와는 무관해진다. 리들리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미 10여 년 전에 미국 언어학회 회장이었던 릴라 글라이트먼Lila Gleitman, 1929~ 교수가 천명했듯이, 이제 현대 과학의 핵심 과제는 '본성이냐 양육이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본성과 어느 정도의 양육이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여야 한다. (173쪽, 본성 아니면 양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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