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장마가 시작됐다. 지난주말부터 보슬비가 내리다가, 좀 쏟아붓다가, 해가 얼굴을 내미는 날씨가 반복되고 있다. 날은 더운데 습도까지 높으니 쉬 지친다.
며칠전 땀으로 끈적이는 몸에 찬물을 한바탕 쏟아부은 뒤 우연히 책장에서 꺼내든 책이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이라는 책이었다. 2년 전쯤 나온 책인데 펼쳐보니 깨끗했다. 평소 독서를 할 때 좀 지저분하게 읽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밑줄도 그어지지 않고 귀퉁이를 접어두지도 않았기에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둔 것이거니 했다. 휘리릭 책장을 넘겨보니 내용도 생소해 보였다.
그런데 찾아보니 신간으로 나왔을 때 꽤 길게 서평기사를 썼던 책이었다. ([리뷰]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어떻게 된거지? 서평기사를 쓰기 위해선 워낙 초치기로 읽어야 하므로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 정도 긴 기사를 쓸려면 분명히 밑줄을 긋고 여러 쪽을 접어두었을텐데 그게 없다. 책갈피에서 지은이가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쓴 카드가 나왔다.
이 카드가 힌트였다. 아마도 서평기사를 쓰기 위해 봤던 책은 어디론가 갔고, 서평이 나간 다음 지은이가 다시 책을 보내줬나보다. 여하튼 한번 읽었던 책인데도 놀랍게도 디테일이 나의 머릿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읽었다. 내친 김에 박시백이 그린 만화 <조선왕조실록 제7권, 연산군일기>도 꺼내보았다. 글과 그림이 가지는 정보전달력과 느낌의 차이를 새삼 느꼈다. 우연히 꺼내들어 시작된 독서가 꽤나 진지해졌다.
연산군 - 김범 지음/글항아리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 박시백 지음/휴머니스트 |
조만간 배우 이병헌이 광해군으로 나오는 영화가 곧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조선왕조 역사에서 단연코 '폭군'으로 손꼽히는 연산군은 알다시피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소재로 반복적으로 사용됐다. 제 아버지에 의한 어머니의 죽음, 왕위에 오른 아들의 처절한 복수, 엽기적이고 음란한 성적 취향 등등 연산군의 생애는 드라마틱한 요소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에서 연산군과 그의 시대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월탄 박종화(1901~1981)의 <금삼(錦衫)의 피>일 것이다. (중략) 그 소설은 서사-장한편-사모편-필화편-척한편-실국편으로 구성되었는데, 표제와 세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산군의 일대기를 그리면서도 특히 폐비 윤씨 사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중략) 장르의 특성상 그 소설은 연산군과 그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국왕의 불행한 경험과 거기서 연유한 심리적 고독과 비탄에 초점을 맞추어 궁중의 사건들을 위주로 서술했다고 평가되었다. (중략) 정비석도 <소설 연산군>(1956)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박종화와 비슷하게 연산군 개인과 궁중의 갈등을 서술의 중심에 두었다. (76~77쪽, 제2장 갈등의 시작과 무오사화)
지금까지 연산군을 그린 영화는 모두 여덟 편이 만들어졌는데, <연산군-장한사모편>(신상옥 연출, 1961)과 <연산일기>(임권택 연출, 1987), <왕의 남자>(이준익 연출, 2005)의 세 편은 영화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었다. (중략) 연산군은 TV 드라마의 소재로도 자주 채택됐으며(현재까지 6편) 모두 상당한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79~81쪽, 제2장 갈등의 시작과 무오사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成宗, 1457~1494)은 묘호에 나타나 있듯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시키는 등 여러 제도를 완성하고 조선이 내세운 '유교정치' 제도를 정착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성종 이전에 태종과 세조 등이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신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성종은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이룬 것이다. 그 핵심이 언론, 감찰 기관인 삼사였고, 성종은 삼사가 제출하는 의견들을 폭넓게 수용했다고 한다.
삼사는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이다. 이 세 관서는 관원에 대한 감찰과 국왕에 대한 간언, 그리고 여러 사안에 대한 자문을 각각 주요한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면서 활동했고, 그 결과 ‘삼사’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동질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임무는 국왕과 신하의 여러 활동, 즉 국정 전반에 건의와 비판을 제기하는 언론활동이었다.
성종은 세조대(世祖代) 이후 팽창해온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들의 견제 세력으로 삼사를 육성했고, 그런 왕권의 작용에 힘입어 성종 중반 이후 삼사의 활동은 매우 활발해졌다. 그 결과 조선의 중앙 정치는 기존의 국왕과 대신에 삼사가 참여함으로써 세 세력이 견제와 균형의 정립 구도를 이루는 중요한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31쪽, 제1장 성종대의 정치적 유산)
그런데 '좋은 정치'와 '윤리적 올바름'은 예나 지금이나 일정한 거리가 있어도 인정을 받는다. 성종은 신하들로부터 성군으로 칭송받는 임금이었으나 질투심에 빠져 못된 짓을 한다면서 왕비 윤씨를 폐하고 결국엔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묘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우리는 보통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통치, 엽기적인 성적 탐닉 등 연산군이 보여준 '황음'(荒淫, 함부러 음탕한 짓을 함-네이버 국어사전)의 원인을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서 기인한다고 알고 있다.
그동안에도 연산군은 폐모의 추숭을 계속 추진해왔다. 우선 재위 6년에는 사당인 효사묘에 내관 대신 조정 관원이 제사를 드리게 했다. 그 무렵 연산군은 "다른 개가 어미를 물자 강아지가 그 개에게 덤벼들었는데, 그냥 그런 것인지 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만히 드러낸 적도 있었다. 약간 비약하면, 이 발언에는 보복의 전조가 그리워져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35쪽, 제3장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
그러나 폐모에 대한 복수만으로 연산군의 정치행위를 분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생각이다. 폐모에 대한 복수에 나서기 이전부터도 연산군은 신하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었다. 갈등의 핵심은 삼사였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지난 참여정부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수언론과 끊임없이 갈등했고, 이명박 대통령 역시 4대강 사업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비판을 제기하는 언론을 두고 '잘 알지도 못하고 비판만 늘어놓는다'라거나 '비판만 일삼는 언론'이라면서 대놓고 폄하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할진대 왕정시대에 국왕의 처결을 대놓고 반대하며 철회를 요청하는 삼사의 간언은 제아무리 성군이라 하더라도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세조의 경우 삼사를 아예 폐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연산군 역시 아버지가 육성시킨 삼사를 매우 거추장스러워 했다.
연산군대의 정국은 즉위 직후부터 평온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성종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제도적 변화는 국왕의 납간과 후원에 힘입어 삼사의 위상이 크게 제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영향에 따라 삼사는 새로운 치세가 시작된 직후부터 국왕과 대신에게 강력한 간언과 탄핵을 제기했다. 국왕과 대신들은 그런 삼사의 행동을 '능상(凌上)'으로 규정하면서 첨예한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이 능상이라는 단어는 연산군대의 거의 모든 사안을 관통한 핵심적인 판단 기준이었다. (94쪽, 제2장 갈등의 시작과 무오사화)
연산군은 불성실하게 임했다고는 하나 어릴 적부터 국왕수업을 받으며 자란 인물이다. 칼 슈미트가 친구와 적을 구분하고 나누는 것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지적했듯 즉위 초반 연산군은 당시의 권력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대간(삼사)은 국왕 외에도 대신들, 지금으로치면 행정부 각료들을 비판하고 탄핵했다. 누군가를 주요 신하로 임명하면 그의 결점을 들춰내 인사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 철회를 요청하는 식이다. 대신들의 발언과 행동 역시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따라서 연산군은 삼사의 비판을 받는 대신들을 옹호하면서 '국왕과 대신 대 대간'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연산군이 즉위한 직후부터 거의 4년 동안 노사신과 삼사는 여러 사안에서 격력하게 충돌한 것이었다. 그 결과 서로의 감정이 매우 악화된 것은 당연했다. 삼사는 국왕이 자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은 모두 노사신이 그렇게 이끈 결과라고 지목했다. 삼사의 이런 판단은 극단적인 증오로 격화되었다. 그것을 가장 섬뜩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연산군 3년 7월21일 정언 조순(趙舜,1467~1529)의 발언일 것이다. 그는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欲食其肉)고 말했다. (128쪽, 제2장 갈등의 시작과 무오사화)
이 사건을 계기로 사화의 주요한 처벌 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서로 붕당을 맺어 그릇된 발언과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 계기를 이용해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대간의 행태를 일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전에도 그는 "젊은 선비는 일을 잘 처리하지도 못하면서 과격한 말만 많이 하니 삼사에는 그런 사람을 임명하지 말라"고 지시한 바 있었지만, 이번에는 대간의 임무와 선발 지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교한 것이다. (중략)
"대간이 일을 논의할 때는 말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말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이제 대간을 뽑을 때는 대체를 아는 자를 선발해야 하며, 이전의 대간처럼 불초하거나 연소한 자들은 절대 임명하지 말라. 나이가 많더라도 사체(事體)를 모르는 자도 등용할 수 없다. 이 뜻을 전조에 알리도록 하라."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장군 일당이 초반에 주요하게 펼쳤던 정책이 이른바 '언론정화' 활동이었다. 언론사 통폐합이 대표적이다. 많은 언론인이 해직됐다. 정권은 언론사측에 문제있는 기자들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했고 이렇게 빨간줄이 그어진 언론인들은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났다. 폭압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자발적 복종과 침묵을 낳는다. 그러나 언론의 권력에 대한 비판 본능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정황은 연산군대 중반 이후 정치 세력의 상호관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대신들도 국왕의 자의적인 왕권 행사를 자주 비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삼사와 유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변화가 진행되면서 국왕은 점차 고립되었고, 갑자사회의 원인도 서서히 배태되어갔다. (212쪽, 제3장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
연산군은 이제 대간의 참견을 귀찮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절대왕권'을 추구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정치구조에 대한 불만이 배경원인으로 작용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적이고 증흥적인 결정을 내리고 강행함으로써 신하들을 시험했다.
이는 곧 조선 정치사의 최대 비극이라는 갑자사화(1504)로 이어진다. 신하들의 실수나 태만을 국왕에 대한 무시와 능멸로 여겼고, 다시 어머니의 죽음과 연계시킴으로써 피의 숙청을 일으킨 것이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세좌 사건과 홍귀달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졌듯이 전자는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실수였고, 후바는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즉시 이행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능상의 표본으로 판단했고, 그 결과 집요하고 거대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두 사건의 사소함이나 우연성은 비슷했다. (228쪽, 제3장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
무오사화는 그것이 삼사에 대한 간접적인 경고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치밀하며 절체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 서술하듯이 갑자사화는 그런 자기 제어나 정치적인 고려를 완전히 놓아버린 비이성적 숙척으로 일관되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절대왕권의 행사라는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과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반정으로 폐위되기까지 2년 동안 그 숙원을 아쉬움 없이 풀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절대왕권의 행사는 연산군과 그 통치를 폭군과 폭정으로 규정하게 되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 증거가 되었을 뿐이다. (227쪽, 제3장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흥청망청'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는 기생조식 '흥청'을 만드는 등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의 이런 행동을 비판하거나 제지하거나, 비상식적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무자비한 처벌이 내려졌다.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가 그만을 위한 나라가 된 것이다.
연산군이 보여준 행동들은 워낙 엽기적인 것들이 많다. 물론 이후의 사관들이 그의 음행을 과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의 저자 김범이나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그린 박시백 모두 <연산군일기>에 연산군의 사치와 엽기적인 행동을 전달하면서 이런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연산군의 행동은 엽기적이다. 하나만 인용해본다.
박시백은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폭압을 휘둘렀지만 그것이 곧바로 '폭군'이라는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면서 연산군이 끝내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정리하자면 두권의 책은 연산군이라는 인물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 어머니로 인해 촉발된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정치적으로는 언론의 활동에 대한 몰이해, 어떤 사안의 인과관계에 대한 도착적 인식, 그리고 절대왕권의 추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두권의 책을 읽으면서 조선시대의 언론제도가 그토록 제도화 돼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언론에 대한 극한적 반감을 표출한 연산군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비판과 견제를 거추장스러워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언론인으로서 현대의 권력자들이 적어도 연산군처럼 거슬리는 간언을 하는 언론인의 목을 치거나 유배보내지는 않는다-속으론 그러고 싶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않는다'라기보다 '못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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