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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밑줄치며읽기

'왜 도덕인가?'(마이클 샌델)-마지막



철학이 다루는 영역은 세상만큼이나 넓다. 사실상 어떤 학문에라도 '철학'을 갖다 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샌델은 자신의 전공분야인 '정치철학'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다시 말해 이라는 고상해보이는 학문과는 어울리지 않게 진흙탕 싸움을 곧잘 연상시키는 정치는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정치철학은 종종 세상과 동떨어진 듯 보인다. 원칙과 실제 정치는 완전히 별개이며, 우리의 이상을 '추구하며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대개는 그 노력이 허물어지고 만다.

어떤 점에서 정치철학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철학이 애당초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의 관행들과 제도들은 이론의 구현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론과 연관되는 것이다. 정치철학의 궁극적인 문제들, 즉 정의와 가치, 좋은 삶의 본질과 관련한 문제들에는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모종의' 답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이다. (175~176쪽)

옳음과 좋음. 샌델은 앞에서도 이 용어를 등장시켰는데 한 사회의 바람직한 구성원리, 즉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자유주의와 공리주의가 나뉜다는 것이다. 도식적으로 말해 공리의 최대화를 최선으로 보는 공리주의는 좋음을, 칸트와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는 옳음에 방점을 찍는다는 것이다. 샌델은 옳음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기획이 현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종국적으로는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정한 도덕적·정치적 비전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 보겠다. 내가 말하는 특정한 비전은 자유주의 비전의 일종으로서, 대부분의 자유주의 비전이 그렇듯 정의와 공정성, 개인의 권리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 핵심 논제는 다음과 같다. 정의로운 사회는 결코 특정한 목적을 강요하지 않으며 시민들이 모두 동등한 자유를 갖고 각자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는 선(옳음)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전제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전반적인 복지를 극대화하거나 덕성을 장려하거나 선을 증진시킨다는 점이 아니다. 선에 우선하며 선과는 별개의 도덕적 범주인 '옳음'이라는 개념을 따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정의로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추구하는 '텔로스'telos(목적, 목표, 본질)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갖가지 목표와 목적들 가운데서 미리 정해놓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올바른 법률 체계 안에서 시민들이 모두 동등한 자유를 갖고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는 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묘사한 이상은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정리된다. 옳음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첫째, 개인의 권리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 없다는 의미이고(이러한 점에서 공리주의와 대립된다), 둘째, 이러한 권리를 서술하는 정의 원칙들은 결코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전제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이러한 점에서 목적론적 관점과 대비된다).

이것은 현대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에 상당 부분 녹아 있는 자유주의로서, 롤스에 의해 가장 완벽하게 다듬어졌고 칸트에 의해 철학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같은 비전이 아니라 그와 관련해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세 가지 사실이다.

첫 번째는 그것이 강력하고 깊은 철학적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옳음이 선에 우선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철학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실패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이 자유주의 비전은 철학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천하는 비전이라는 사실이다. (…)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철학으로서 어떻게 잘못됐는지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정치 상황을 진단할 수 있다. 요컨대 첫 번째는 철학적 힘이고 두 번째는 철학적 실패이며 세 번째는 자유주의의 이상이 오래 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 불안정하게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77~178쪽)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국내에서 매우 유명해졌지만 원래 정의의 문제는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가 워낙 학문적으로 지대한 업적을 쌓아놓았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실린 샌델의 약력을 보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학계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돼 있을 정도다. 그럼 롤스는 무엇을 했는가.

앵글로 아메리칸 전통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험적 주체라는 토대는 오히려 익숙한 윤리에 생소한 개념을 갖다 붙이는 셈이 된다. 순수이성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도덕의 우월성을 지지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어쨌든 그것이 바로 롤스의 프로젝트이다.

롤스는 권리가 최우선이라는 논리를 모호한 선험적 주체의 개념으로부터 구출하고자 한다. 칸트의 관념론적 형이상항은 도덕적·정치적 이점을 갖고 있지만 지나치게 선험적인 것에 치중하며 인간적인 상황을 배제함으로써 정의의 우월성에 도달한다. (…) 따라서 롤스의 프로젝트는 독일적인 모호성을 앵글로아메리칸들의 기질에 맞는 원리로 바꿈으로써 칸트의 도덕적, 정치적 가르침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 입장의 역할이다. (182쪽)


롤스가 주장하는 정의의 원칙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모두에게 동등한 기본적 자유를 허용할 것, 둘째는 가장 불리한 사회구성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사회·경제적 불평등만을 허용할 것이다.

롤스는 이 두가지 원칙을 주장하면서 두 가지 익숙한 대안, 즉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를 반박한다. 공리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점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무엇보다도 전반적인 복지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그 자체로 하나의 인간처럼 취급한다. 공리주의는 갖가지 다양한 욕구들을 하나의 욕구로 융합하며, 개개인에게 만족을 분배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 공리주의자들이 개인 간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행운의 임의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옳지 못하다. 그들은 효율적인 시장경제에 기인하는 분배는 무조건 정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사람들은 무엇을 가졌든 그것이 사기나 절도 또는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이유로 모든 재분배를 반대한다. 롤스는 재능과 자산의 분배, 심지어는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것을 안겨주고 또 누군가에게는 더 적은 것을 안겨준 분배조차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행운의 문제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186~187쪽)

앞서도 말했듯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비해 자신의 사상을 좀 더 적극적이고 자세하게 펼친다. 아래는 롤스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정의라는 것이 특정 공동체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과 결부될 수 밖에 없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도덕과 확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특정한 인간으로, 즉 가족과 공동체와 민족의 구성원이자 그 역사를 떠안은 사람으로, 공화국의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도덕과 확신의 힘은 어느 정도는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다. 적어도 이 두 가지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독립적인 자아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도덕은 그저 내가 보유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가치들과는 다르다. 자발적인 책임이나 모든 인간에게 따르는 '자연적 의무'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러한 도덕과 확신은 내가 사회적 합의 때문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나의 정체성을 정의해주는 애착과 책임감 때문에 빚을 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190쪽)

샌델은 책의 상당부분을 흔히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존 듀이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켜주고 미국적 전통이 가능하게 한 것이 듀이라는 설명이다.

듀이의 철학은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당면한 엄격한 양자택일의 문제(과학과 종교, 개인주의와 공동체, 민주주의와 전문가정치 사이의 융통성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완화시켜주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러한 구별을 흐릿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는, 과학은 우리가 경험해나가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 꼭 신앙과 대립각을 세우는 게 아니라고 썼다.

개인주의는 마구잡이로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특유의 역량을, 그것을 끌어내는 '공동생활' 속에서 펼치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합리와 불합리를 불문한 채 다수결을 따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전문가답게 판단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했다. (203쪽)


전통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동시대의 많은 자유주의 이론가들과 달리 듀이는 정치이론의 기반을 근본적인 권리나 사회적 계약에 두지 않았다. 그는 시민적 자유를 선호했지만 다수결의 원칙을 제한하는 데 우선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지배하는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거나 정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사생활 영역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듀이의 자유주의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자유란 개인들 저마다의 역량을 깨닫게 하는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사상"이라는 점이다. 자유의 문제는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요구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찾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내적 삶은 물론 외적 삶까지 길들이고 지도하는 전체적인 사회질서를 어떻게 확립하는가의 문제"이다. (207쪽)

다시 이어지는 롤스와 정의론에 대한 기나긴 설명. 롤스의 <정의론>을 언젠가는 읽어보아야 할 터인데... 지금은 마치 내가 <정의론>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찾아가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정치철학을 다룬 저서 중에 지속적인 논쟁을 불리일으킨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존 롤스의 <정의론>이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그 저작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출발점이 되는 첫 번째 논쟁은 공리주의자들과 권리지향적인 자유주의자들 간의 논쟁이다. (…) 롤스의 저서가 불을 지핀 두 번째 논쟁은 권리지향적인 자유즈의 내에서 발생한 논쟁이다. 만약 개인의 특정한 권리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고려하더라도 그러한 권리를 무시할 수 없다면 그 권리는 어떤 권리인지 묻는 일이 남는다. (…) 1970년대 학계를 달군 자유지상주의자(로버트 노직, 프리드리히 하이예크)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롤스) 간의 논쟁은 미국 정치학계에서 뉴딜정책 이래로 친숙해진 시장경제 옹호자들과 복지국가 지지자들 간의 논쟁과 일치한다.

롤스의 저서가 유발한 세 번째 논쟁은 자유지상주의자들과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 모두 가졌던 가정을 중심으로 한다. 이 가정은 좋은 삶에 대한 여러 개념들 사이에서 정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권리지향적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정의가 정당성을 갖추려면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칸트, 롤스 그리고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이러한 생각은 옳음(권리)이 좋음(선)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218~219쪽)

칸트의 경우처럼, 롤스의 경우에도 옳음은 두 가지 의미에서 좋음에 우선하며,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일은 중요하다. 첫째, 개인의 특정한 권리가 공공선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 둘째, 인간의 권리를 명시하는 정의 원칙들은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옳음은 좋음에 우선한다.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바로 두 번째 주장이다. 이 논쟁은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이라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름으로 지난 10년 동안 가열되어왔다. (219쪽)

옳음이 우선한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정의가 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선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시각에서 접근해보면, 정의는 좋은 삶과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목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문화와 전통에서 나타나는 선의 개념과 관련 없이는 정의와 권리에 대해 깊이 논의할 수 없다. (…) 롤스는 <정의론>에서 옳음이 우선한다는 생각을 개인에 대한 자원주의 개념(넓게는 개인에 대한 칸트식 관점)과 별부시켰다. 이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기가 가진 욕구의 총합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자연이 부여한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실현할 때 완벽해지는 인간 또한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로서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도덕적 의무에 구속받지 않는다. 이는 중립적인 체계로서의 국가라는 이상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220~221쪽)

샌델은 학문적으로 롤스를 비판하는 쪽에 서 있지만 선배 학자이자, 하버드대학교의 선배 교수였던 샌델과의 추억을 소개하며 그를 '신'에 비유하는 경의를 표했다.

롤스는 학생들과 후배 교수들에게 친절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이었다. 나는 1975년 옥스퍼드 대학원을 다닐 때 처음으로 <정의론>을 읽었고 그의 책은 나의 논문 주제가 되었다. 이후 나는 자유주의에 관한 그 위대한 저서의 주인을 만나지도 못한 채 하버드대 정치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런데 하버드에 도착하자마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선 반대편에서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 존 롤스, R-A-W-L-S입니다." 신께서 몸소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 먹자고 말하면서 자신이 누군지 모를까봐 자기 이름의 철자를 일일이 말해주는 것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 (267쪽)

아래는 롤스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자 결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주의라는 레테르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만 가지고는 사회가 형성, 유지될 수 없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들도 이러한 논리적 비판을 일찍부터 의식하고 있었는데 '사회적 계약'이라는 최초의 사회결성 계기를 가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사회적 계약이라는 것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게 만드는 그것에 천착한다.

공화주의의 핵심 이론은 "시민의 자유는 자치를 공유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고는 자유주의적 자유와 모순되지 않는다. 정치 참여는 개인이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치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시민들에게 공공선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며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선에 대해 숙고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목적을 선택하고 타인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음을 존중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공공에 대한 지식과 전체에 대한 소속감, 책임감, 현재 기로에 놓여있는 공동체와의 도덕적 유대가 필요한 것이다.
(271쪽)

샌델은 미국 정치에서 자유주의 진영인 민주당이 보수주의에 밀리고 있는 것은 '도덕'의 문제를 외면했기 때문이라는 책 서두의 주장을 다시 꺼내 공동체와 도덕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첫째, 자유주의 진영은 시민자치와 공동체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선거권도 중요하지만 자유주의에는 선거권을 넘어서는 자치의 비전이 필요하다. 나아가 국가와 개인의 사이를 중재하는 풍부한 시민적 자원을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의 비전을 세워야 한다.

둘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해하고 거기에 참여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간곡한 권고로도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국) 민주당은 그들만의 연방주의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으며 정치적 책임에 대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민주당은 연방주의 이론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국민의 기본 권리를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해 지역공동체가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서 큰 역할을 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종 평등과 모든 시민이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권리와 함께 학교에 대한 지방정부의 통제권을 강화할 방법 등이 있다.

셋째, 정치권은 현대 경제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전례 없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본과 대기업의 무소불위, 적대적인 노사관계를 다룰 정책이 필요하다. 자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공공철학은 적자예산과 세율 등의 거시경제가 아니라 경제구조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또 그러한 공공철학은 GNP를 최대화하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자치가 가능한 공동체의 관점에서도 다룰 수 있다. (…)

넷째, 도덕적·종교적 담론을 공공생활과 분리시키려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 즉 정부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도덕적 의미와 공동선이 결여된 공공생활은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편협한 태도를 불러온다. 여태껏 도덕적 다수파가 보여주었듯이, 도덕적 자원을 적절히 활용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그 자원을 감소시키는) 정치는 편협한 도적주의를 강효하려는 이들에게 잠식당할 위험이 크다. (…)

최근 자유주의는 공동선의 비전을 제시하는 과제에 실패해 비틀거렸고, 이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미국 정치의 가장 잠재성 있는 자원을 양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치와 공동체의 공공철학은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자원을 다시 되찾을 수 있게 해주며, 도덕적, 정치적 진보를 추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317~318쪽)

왜 도덕인가? - 10점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한국경제신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