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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과 사람

곰 같은 사람, 이태수 선생

평소 생태 세밀화 그림책을 받아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세밀화'라는 명칭이 그러하듯 동식물을 세세하게 그려낸 데 대한 감탄이 밀려온다. 그리고 나선 사진과 다른 따뜻함이 감동을 준다.

이태수 선생은 이메일 주소나 블로그 주소가 영문으로 '곰'(gom)으로 시작한다. 여쭤보진 않았으나 별명이 곰인 모양이다. 이태수 선생의 책을 세권째 낸 다섯수레 출판사 관계자분의 말씀인즉 "요즘 그런 사람 없"단다. 본인이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절대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명이 곰인 모양이다. 이러다보니 작업이 더디고 작품집이 띄엄띄엄 나오지만 그만큼 깊이가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외모도 털털한게 시골농부 인상인데다 말씀도 느리고 꾸밈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취재하고 있는 곤충들에 대해 말할 땐 눈빛이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선생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그가 취재용으로 찍어서 올린 동식물 사진들과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으니 한번 들러서 청량감을 느껴보시길.


‘생태 세밀화’ 1세대 화가 이태수

ㆍ털 하나 풀잎 하나 '생명의 느낌'을 그려요
ㆍ보잘것 없는 지렁이·개구리·매미… 어린이 생태그림책 작업 20여년
ㆍ 개체 하나 그리는데 7~10일 걸려 "내 그림보다 생명 공간이 더 필요"


이태수씨(48)는 국내 1세대 생태그림 작가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우연한 기회에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트 작업을 시작한 그는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생태 세밀화를 그렸다. <세밀화로 그린 보리 아기 그림책>(보리), <개구리가 알을 낳았어>(다섯수레), <가로수 밑에 꽃다지가 피었어요>(우리교육)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생태 그림책에 그림을 입혔다.
우리는 갈수록 자연과 멀어지고 다른 생명체들을 삶터에서 밀어내고 있다. 이렇게 자연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자연에 대한 갈증은 깊어만 간다. 이 갈증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것이 동식물 생태 다큐멘터리나 도감이다. 특히 세밀화로 불리는 생태그림은 사진이나 동영상처럼 극히 감각적으로 우리의 시각에 들어오는 이미지와 달리 수채화 특유의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경기도 연천 백학마을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오래된 시멘트 블록집 앞으로 자그마한 텃밭이 있고, 그 너머 집 밖으론 논이 펼쳐져 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곳을 고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세밀화를 보면 먼저 그 정밀함에 감탄한다. 그래서 곧잘 사진과 비교한다. 그러나 이씨는 "세밀화와 사진은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부분에 있어서는 사진이 훨씬 정확하겠죠. 하지만 사진은 초점의 문제가 있습니다. 특정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면 나머지는 흐려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세밀화는 사람의 눈으로 전체를 보고 정리하기 때문에 개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진보다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예를 들어 동식물에 털이 있다면 일일이 그 개수를 세서 똑같이 그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요. 그렇지만 그 털이 긴지 짧은지, 여린지 뻣뻣한지 그 느낌을 살려줍니다."
생태 세밀화는 여간한 인내로는 그릴 수 없다. 곤충의 한살이를 그리려면 변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 "얼마 전 하루종일 무당벌레 번데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허물을 벗거나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가 돋는 과정이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나죠. 낌새가 조금 보였는데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벌써 끝나버린 거예요. 허탕친거죠. 이럴 경우 다른 번데기를 찾아 다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이런 어려움 때문에 화가들 가운데 세밀화 그림책을 한권 낸 후 포기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요즘 세밀화 그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림 실력도 실력이지만 끈기가 중요합니다. 직접 눈으로 보기보다는 사진에 의존하거나 짧은 시간에 그린 그림은 금방 표시가 나지요."
작업의 절반은 연필로 이뤄진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려 새로운 종이와 겹치게 한 뒤 조명박스에 올려놓고 다시 그린다. 그 다음 수채화 물감으로 색채를 입힌다. 개체 하나를 그리려면 1주일에서 열흘가량 걸린다고. "동물이나 덩치가 큰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식물이 더 까다롭죠. 개체 전체를 보여주되 원근감을 살려줘야 하거든요. 머릿속에 전체적인 계획이 잡혀 있지 않으면 그리기 어렵습니다. 또 세밀화는 인쇄 과정을 거쳐 책에 실리므로 채색하면서 이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씨는 그동안 귀하고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동식물보다 지렁이, 개구리, 개미 등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천착해왔다. 지난 3월 나온 <지렁이가 흙 똥을 누었어>(다섯수레)는 6년에 걸쳐 준비한 작품이다. 현재 무당벌레의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반딧불이와 쌍살벌의 생태를 취재하고 있다. 또한 늪의 생태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집을 만들기 위해 몇년째 우포늪에 매달려 있다. "저 앞에 논이 있잖아요. 오늘 아침 저 논에서 고라니가 뛰놀다 갔어요. 계절마다 논을 찾아오는 동물들도 그려보고 싶습니다."
동식물의 생태를 그림책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동식물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씨가 생태 세밀화를 그리는 궁극적인 목적도 그것이다. "전에 산골짝의 솜다리가 사라진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어릴 적 흔하게 봤던 할미꽃도 이젠 귀한 게 됐습니다. 민들레도 온통 서양민들레가 점령해 버렸고요. 우리가 지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도 언제 그런 신세가 될지 모릅니다." <2009.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