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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밑줄치며읽기

'왜 도덕인가?'(마이클 샌델)-2


(에셔의 작품인데 본문과는 별상관이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전공으로 옮아갈 차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하버드 대학교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교양강의를 엮은 것이라고 하는데,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의'에 대한 공리주의적 접근법과 칸트-롤스의 자유주의적 접근법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책을 끌고 가고 있다. <왜 도덕인가?> 역시 공리주의와 칸트식 자유주의가 공공의 영역에서 '도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대비하고 있다. 먼저 공리주의를 보자.

어떤 면에서 공리주의는 자유주의의 이상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지닌 가치들을 평가 없이 환산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선호도를 아무런 평가 없이 합산하는 것은 관대한 태도이며, 나아가 민주적인 태도이다. 민주주의의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들의 표를 모두 동등하게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계산법은 얼핏 보기에는 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에 몰려드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환호하는 로마인들의 수가 많다면 기독교인들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로마인들의 쾌락의 총합이 기독교인들의 고통의 총합을 넘어설 것이다. 절대다수가 소수의 종교를 혐오해 그것이 금지되길 바라는 경우, 선호도의 평균을 내보면 관용이 아닌 억압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리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공리에 이바지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권리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불확실하며 항상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약속을 보장하지 못한다. 다수의 뜻은 그 자체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정치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리주의 철학은 자유주의 원칙에 적절한 토대가 되지 못한다.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주장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칸트의 주장이었다. 그는 공리주의와 유사한 경험주의는 도덕의 근거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도구적인 관점에서 자유와 권리를 옹호할 경우,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존중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할 가치가 있는 목적으로 여기기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158~159쪽)


다음은 이른바 '칸트파 자유주의' 진영이다.

칸트파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하는 해법은 '옮음(정의)'과 '좋음(선, 가치)'을 구분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권리 및 자유의 틀과, 사람들이 그 틀 안에서 선택해 추구하는 선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가 공정한 틀을 유지하는 것과 특정한 목적을 지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고 인생의 목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언론 자유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삶이 무관심한 삶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이유로 혹은 언론 자유가 전반적인 복지를 증대해줄 거라는 이유로 지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칸트 철학의 관점에서는 전자의 옹호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중립성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160쪽)

칸트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옮음이 좋음에 우선한다. 이는 두가지 면에서 그렇다.

첫째, 개인의 권리가 전체의 선을 위해 희생될 수 없다. 둘째, 개인의 권리를 조건으로 하는 정의는 결코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비전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권리가 정당화되는 이유는 그것이 전체 복지를 극대화하거나 선을 증진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개인 또는 집단과 동등한 자유를 갖고 나름의 가치와 목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1쪽)

그렇다면 이번에는 샌델 자신이 동조하는 공동체주의의 주장을 살펴보자.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 개념을 따르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공동체주의 비평가들은 현대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공동선의 정치를 옹호한다. 그들은 칸트에 대한 헤겔의 반론들을 상기시키며 권리가 선에 우선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총하는 그들은 공동의 목표와 목적을 배제하고는 그 어떤 정치제도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공동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배제하고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62쪽)

권리 기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비평가들은 우리가 자신을 이렇게 독립적인 존재로, 스스로가 추구하는 목적과는 완전히 분리된 자아를 가진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의 역할들 가운데에는 정체성(일테면 한 국가의 시민, 어떤 캠페인의 참가자, 어떤 대의의 지지자)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의해 정의된다면 우리는 또한 그러한 공동체를 특징짓는 목표와 목적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163쪽)

샌델은 이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이자 국가가 반드시 특정한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 화페와 시장이라는 실질적인 아이템에 대한 접근법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하이예크 등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자와 롤스 등 평등주의 자유주의자가 대비된다.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사경제를 옹호하고, 평등주의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를 옹호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기업을 바탕으로한 경제와 관료국가에서 발생하는 힘의 집중을 우려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충성과 의무,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동선의 정치가 선입견과 편협한 태도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민족국가는 아테네의 도시국가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현대 생활의 다양성과 규모를 감안하면 이리스토텔레스의 정치윤리는 기껏해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를 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은 편협한 태도는 삶의 형태가 혼란스럽고 근원이 불안정하며 전통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가장 창궐한다고 대응한다. 나 역시 공동체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

우리의 공공생활이 약해지고 공통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느낌이 희미해질 때, 전체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대중정치에 빠질 위험이 높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도덕적·정치적 과제는 바로 우리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166쪽)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유교환의 매개체인 돈을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돈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주의자들은 모두가 같은 양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돈이 분배의 공정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응수한다. 누구는 많이 가지고 누그는 적게 가지는 한 어떤 이는 강자의 입장에서 거래를 하고 어떤 이는 약자의 입장에서 거래를 한다.

따라서 소위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공정해질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평등주의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든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경우라도 거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평등은 끝난다고 말한다.
(168쪽)

샌델이 마이클 왈저를 통해 제시하는 화폐와 시장에 대한 접근법은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확연히 달라 보인다. 정치와 정의의 임무는 어떤 재화가 어떤 영역에 속하는지 결정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왈저는 좀 생소한 이름이다.(왈저에 대한 위키피디아 설명) 그런데 이름을 몇번 입속으로 말해보니 희미하게 잔상이 떠오른다. 작년에 '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하다'는 책이 번역돼 나온 적이 있었는데 혹시하는 생각에 확인해보니 역시나 마이클 왈저의 저서였다. '정의로운 전쟁론'은 버락 오바마가 견지하고 있는 노선이기도 한데 당연히도 매우 논쟁적인 주장이다. 당시 아쉽게도 이 책을 읽지 못하고 넘겨버리고 말았다.

(마이클) 왈저는 (저서인 <정의의 영역>에서) 자유지상주의자와 평등주의 간의 논쟁 기반을 바꿈으로써 비평가와 옹호자 모두로부터 평등 문제를 구제해낸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돈의 분배보다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있다. 이것이 정의의 영역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이 된다. 그는 재화마다 나름의 원칙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하고, 명예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힘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책은 적임자들에게, 사치품은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과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의 은총은 독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왈저는 불평등한 부는 요트나 고급 음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지 않은 영역을 지배하려는 돈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

하지만 왈저 또한 인정한 것처럼, 영역이라는 아이디어만으로 재화를 분배하는 방법까지 알 수는 없다. 우리의 정치적 논의 대부분은 어떤 재화가 정확히 어느 영역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다. (168~169쪽)

(계속)

p.s. 설 연휴가 다가왔는데 몸살기운이 조금 돈다. 며칠째 밤에는 술을 마셔댔더니 탈이 나는 모양이다. 음력 새해엔 술을 좀 줄여야 할텐데 '설 쇠고 봅시다'라며 잡아놓은 약속들이 빽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