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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밑줄치며읽기

'왜 도덕인가?'(마이클 샌델/한국경제신문)-1

왜 도덕인가? - 10점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한국경제신문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대학교 강의 동영상이 연초부터 EBS에서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 1위에 재진입했다. 한번 힘이 빠지면 다시 치고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2위로 주저 앉히고 다시 올라간 것을 보면 역시 텔레비전의 위력이 크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난이도'(?)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데 예상대로 논술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의 필독서로 지정돼다시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지인 한분은 자기는 이 책을 읽다가 한쪽 한쪽 넘기기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아들이 학교에서 읽어오라고 했단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낙약의 종이값을 올리는 책으로 등극하자 아니나 다를까 샌델의 다른 책들이 연이어 소개됐다. 나왔을 당시 읽지는 못하고 챙겨뒀던 것이 <왜 도덕인가?>이다.

책은 전체 3부로 이뤄졌는데 완결성 면에서는 약간의 흠이 보인다. 1부는 복권가 도박, 공공기관의 상업적 브랜드화, 온실가스배출권 거래, 소수집단 우대정책 등 미국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현안에 대한 칼럼에 가까운 글들을 모았다. 2부와 3부는 말 그대로 정치 영역에서의 도덕이라는 주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다. 간간히 학술적으로 꽤 깊이 들어간 부분도 있다. 그래서 시사적인 1부와 학술적인 2부와 3부가 약간 언밸런스 하다는 느낌을 준다.

샌델 자신은 이런 호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지만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론 일반에 대한 학부생 강의를 엮은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주의자로서의 샌델의 주장은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책 맨 뒤의 10쪽 정도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했다. 그러나 <왜 도덕인가?>는 공동체주의자로서의 샌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현실에서 개인주의적 보수주의(공화당)와 자유주의(민주당) 사이에서 샌델은 자신의 위치를 민주당 쪽에 가깝에, 다시 말해 자유주의에 가깝게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결여한 것, 보수주의가 적극 활용하면서 현실정치에서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 바로 정치와 법률 영역에서 도덕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자유주의의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것이 샌델의 목표이다.

일독을 하긴 했지만 밑줄친 부분을 다시 보니 다소 난삽하게 밑줄이 그어진 감이 없지 않다. 며칠에 걸쳐 주로 지하철에서 읽다보니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국민은 고객이 아니다. 그리고 미주주의는 단순히 국민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올바르게 시행된 정치는, 국민들이 자신의 욕구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올바른지 판단한 후 그 욕구를 수정하도록 이끈다. 고객과 달리 국민은 때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와 상업의 차이점이며 애국심과 브랜드 충성도의 차이이다.
정부가 만화 캐릭터와 최신 스타일의 광고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정부 지지도를 높이는 데는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공공기관이 갖는 권위와 사명의식을 해친다. 그리고 공공기관이 주어진 임무를 망각하면 시민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장의 힘과 상업적 압력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42쪽)


아마도 영광에 관한 문제가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노동과 보상을 둘러싼 논쟁일 것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복지에 반대하는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회복지에 소비되는 돈을 아깝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보상을 수여하는 기준과 관련해 사회복지에 담김 메시지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배풂'을 근거로 사회복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바로 그 점을 간과할 때가 많다. 소득이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중시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의 척도 역할까지 한다.
'열심히 일하며 규칙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자신이 흘리는 땀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진다. 물론 사회복지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공정성과 자격, 의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78쪽)

정치철학자인 샌델의 책이 논술 또는 로스쿨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특히 유용하다면 바로 아래와 같은 대목 때문일 것이다. 샌델은 미국에서 크게 쟁점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문제, 즉 '배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의 사안에 대해 찬반론을 살펴본 뒤 상당히 세련된 논리와 비유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배아를 출발점으로 삶이 시작된다. 인간이라는 이유 자체로 우리의 삶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며 침범당할 수 없는 신성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연령이나 생명의 초기 단계에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잉태에서 출산에 이르는 과정 중에 어느 순간부터 인간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배아도 완전한 성인과 마찬가지로 침범당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결함이 있다. 누구나 배아를 출발점으로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이 곧 배아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어보자. 모든 떡갈나무는 한때 작은 도토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토리가 곧 떡갈나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나의 소유였던 도토리 한 알을 뒤뜰의 다람쥐가 먹어버리는 경우와 떡갈나무가 폭풍우에 쓰러져 죽는 경우에 내가 경험하는 상실감은 엄연히 다르다. 성장 단계로 따지면 서로 이어져 있는 존재이지만 도토리와 떡갈나무는 다른 존재다. 배아와 인간도 마찬가지다. 지각력을 지닌 존재는 그것을 갖지 않은 존재와는 다른 가치를 갖는다. 또한 무언가를 경험하고 의식할 수 있는 존재는 그렇지 못한 존재보다 더 높은 수준의 권리를 갖는다. (87쪽)


아래와 같은 언술은 한국의 진보파들에겐 분명히 불편하게 여겨질 것이다. 특히 군부독재 정권을 거치며 국가가 어떤 도덕적 담론을 제시하고 국민을 이에 맞추도록 무자비하게 강요했던 경험을 한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실 이 때문에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한국의 진보파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 현상을 두고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한 신문기자는 '기이한 현상'이라며 샌델을 우파 철학자로 각인시키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파 시민과 우파 지식인들에게 샌델에 관심을 가지라는 은근한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실 샌델에 대한 비판이 가해진다면 이 부분이 핵심이 될 것이다.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리주의와 칸트에서 존 졸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사상을 검토,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화주의, 공동체주의를 현대의 사상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애쓴다.


민주당은 공화당의 도덕적 성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적 판단을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미덕의 정치에 저항했다. 공화당이 낙태를 금지하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교내기도를 장려할 때, 자유주의 진영은 정부가 도덕을 법률화하거나 국민의 도덕성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가통치술이 영혼통치술로 전환되는 곳에 강압 정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강요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
정치가 도덕과 종교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철학적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도덕 문제에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인권법은 도덕을 법률로 규정했으며, 그래야 마땅한 것이었다. 인권법은 식당 내의 인종분리처럼 증오심에서 기인한 행위를 금지했고 나아가 시민들의 도덕성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29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