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이 블로그에서 ‘내가 읽은 책 이야기’ 보다는 ‘남이 읽은 책 이야기’가 많아질 것 같다. 이렇게나마 업데이트를 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지난주 신문 출판면에 공통적으로 주목한 책은 <증오의 세기>(니얼 퍼거슨/민음사)였다. 퍼거슨은 대작들이 연이어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내가 출판담당을 하던 시절에도 2종 정도 소개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저자의 책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이 책은 2007년 작품이다. 아래 서평 기사에 나오지만 역사학 전공자인데 비즈니스스쿨 교수로 일하고 있다는 경력도 미국에선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인이 보기엔 이채롭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저자는 영화배우스럽다고 할까, 상당히 호남형 얼굴이다. 책을 평이하게 소개한 리뷰와 전문가 리뷰를 모셔왔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리뷰를 링크했다.
리뷰에 따르면 그는 세계대전을 2차례나 겪었고 국지적인 살육전이 계속됐던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인종과 민족갈등, 경제적 변동, 제국의 쇠퇴로 설명했다고 한다. 20세기가 결과적으로 '증오의 세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자 논란이 될 수 있는 대목은 제국의 쇠퇴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미국을 제국으로 볼 것이냐는 논란이 있지만 초강대국이라는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파워가 쇠퇴하고 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제국 혹은 초강대국 미국의 쇠퇴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국제정치학에서 '패권안정론'이라는 이론이 있는데 요약하자면 역사적으로 강력한 패권국가가 존재했을 때 평화가 유지됐다는 것이다. 제국안정론과 패권안정론은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제국론'을 가지고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퍼거슨이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스탠스일지가 궁금한데 당장은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뉴욕타임스 '증오의 세기' 리뷰
지난주 신문 출판면에 공통적으로 주목한 책은 <증오의 세기>(니얼 퍼거슨/민음사)였다. 퍼거슨은 대작들이 연이어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내가 출판담당을 하던 시절에도 2종 정도 소개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저자의 책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이 책은 2007년 작품이다. 아래 서평 기사에 나오지만 역사학 전공자인데 비즈니스스쿨 교수로 일하고 있다는 경력도 미국에선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인이 보기엔 이채롭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저자는 영화배우스럽다고 할까, 상당히 호남형 얼굴이다. 책을 평이하게 소개한 리뷰와 전문가 리뷰를 모셔왔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리뷰를 링크했다.
리뷰에 따르면 그는 세계대전을 2차례나 겪었고 국지적인 살육전이 계속됐던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인종과 민족갈등, 경제적 변동, 제국의 쇠퇴로 설명했다고 한다. 20세기가 결과적으로 '증오의 세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자 논란이 될 수 있는 대목은 제국의 쇠퇴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미국을 제국으로 볼 것이냐는 논란이 있지만 초강대국이라는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파워가 쇠퇴하고 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제국 혹은 초강대국 미국의 쇠퇴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국제정치학에서 '패권안정론'이라는 이론이 있는데 요약하자면 역사적으로 강력한 패권국가가 존재했을 때 평화가 유지됐다는 것이다. 제국안정론과 패권안정론은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제국론'을 가지고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퍼거슨이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스탠스일지가 궁금한데 당장은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책과 삶]20세기의 광기 이젠 사라졌을까
지나간 한 시대를 압축된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무척 힘들다. 문화와 정치, 역사, 경제 등 전 분야를 꿰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통찰력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학들은 종종 한 시대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왔다. 그들의 정리는 역사를 보는 눈을 밝게 해준다. 과거를 성찰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자리, 나아가 미래를 전망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1990년대 중반에 20세기의 역사를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인 1914~91년 사이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 등에 초점을 맞춰 극단의 시대라 정리한 것이다.
<증오의 세기>(원제:The War Of The World : History’s Age Of Hatred)는 20세기에 일어난 전쟁, 학살 같은 극단적 폭력성의 실태를 살핀 뒤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인 역사가 니얼 퍼거슨(하버드대 역사학·비즈니스스쿨 교수)은 “1900년 이후 100년은 현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세기”였고, “절대적·상대적 관점에서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다”고 20세기를 평가한다. 실제 20세기에는 인간이 벌인 최대의 재앙으로 꼽히는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1차 대전,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싸움, 이란·이라크전, 한국전쟁, 나이지리아 등 곳곳의 내전 같은 전쟁으로 점철됐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나치의 인종학살 등 학살 사건도 숱하다. 한마디로 폭력과 증오의 시대다.
그렇다면 20세기가 피로 물들기만 했을까. 아니다. 1900년대는 이전의 100년과 비교할 때 민주주의가 크게 확산됐고, 복지 개념이 도입되면서 인간의 삶이 더욱 편안해졌다. 과학기술의 발달 등은 평균수명을 늘렸고, 생활의 편의성도 크게 개선시켰다. 경제적으로도 연평균 성장률이 이전 세기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저자는 “전례 없는 진보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끔찍한 살육이 곳곳에서 벌어졌을까. 입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왜 학살과 전쟁이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 지은이는 20세기가 증오의 시대가 된 이유를 세 가지로 꼽는다. 우선 인종·민족 간 갈등이다. 인종과 민족이 뒤섞인 곳에서는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분쟁을 부르고, 이는 주로 잔인한 학살로 이어졌다.
경제적 변동성도 요인이다. 경제성장률이나 고용, 금리, 물가 등에서의 급격한 변동은 사회적·경제적 약자에게 더 큰 피해를 안기고,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을 증가시킨다.
심화되는 부익부 빈익빈도 폭력의 중요한 이유다. 마지막 요인은 제국의 쇠퇴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제국들이 쇠퇴하고 독일, 일본, 소련 등의 새 제국들이 등장하면서 권력의 공백지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는 이유는 앞날을 한 번쯤 살펴보기 위해서다. 퍼거슨은 “20세기 수많은 전쟁을 부른 요인들을 이해해야만 다음 세기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20세기를 증오의 시대, 폭력의 시대로 만든 요인들은 사라졌나. (경향신문 도재기 기자, 2010.12.25)
증오의 세기 - 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민음사 |
지나간 한 시대를 압축된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무척 힘들다. 문화와 정치, 역사, 경제 등 전 분야를 꿰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통찰력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학들은 종종 한 시대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왔다. 그들의 정리는 역사를 보는 눈을 밝게 해준다. 과거를 성찰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자리, 나아가 미래를 전망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1990년대 중반에 20세기의 역사를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인 1914~91년 사이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 등에 초점을 맞춰 극단의 시대라 정리한 것이다.
<증오의 세기>(원제:The War Of The World : History’s Age Of Hatred)는 20세기에 일어난 전쟁, 학살 같은 극단적 폭력성의 실태를 살핀 뒤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인 역사가 니얼 퍼거슨(하버드대 역사학·비즈니스스쿨 교수)은 “1900년 이후 100년은 현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세기”였고, “절대적·상대적 관점에서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다”고 20세기를 평가한다. 실제 20세기에는 인간이 벌인 최대의 재앙으로 꼽히는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1차 대전,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싸움, 이란·이라크전, 한국전쟁, 나이지리아 등 곳곳의 내전 같은 전쟁으로 점철됐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나치의 인종학살 등 학살 사건도 숱하다. 한마디로 폭력과 증오의 시대다.
그렇다면 20세기가 피로 물들기만 했을까. 아니다. 1900년대는 이전의 100년과 비교할 때 민주주의가 크게 확산됐고, 복지 개념이 도입되면서 인간의 삶이 더욱 편안해졌다. 과학기술의 발달 등은 평균수명을 늘렸고, 생활의 편의성도 크게 개선시켰다. 경제적으로도 연평균 성장률이 이전 세기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저자는 “전례 없는 진보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끔찍한 살육이 곳곳에서 벌어졌을까. 입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왜 학살과 전쟁이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 지은이는 20세기가 증오의 시대가 된 이유를 세 가지로 꼽는다. 우선 인종·민족 간 갈등이다. 인종과 민족이 뒤섞인 곳에서는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분쟁을 부르고, 이는 주로 잔인한 학살로 이어졌다.
경제적 변동성도 요인이다. 경제성장률이나 고용, 금리, 물가 등에서의 급격한 변동은 사회적·경제적 약자에게 더 큰 피해를 안기고,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을 증가시킨다.
심화되는 부익부 빈익빈도 폭력의 중요한 이유다. 마지막 요인은 제국의 쇠퇴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제국들이 쇠퇴하고 독일, 일본, 소련 등의 새 제국들이 등장하면서 권력의 공백지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는 이유는 앞날을 한 번쯤 살펴보기 위해서다. 퍼거슨은 “20세기 수많은 전쟁을 부른 요인들을 이해해야만 다음 세기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20세기를 증오의 시대, 폭력의 시대로 만든 요인들은 사라졌나. (경향신문 도재기 기자, 2010.12.25)
[전문가가 본 이 책]인종-민족갈등, ‘20세기 학살제국’ 낳다
21세기의 제국론은 다소 진부해 보인다. 영국의 제국주의를 다룬 ‘제국’, 미국의 현대 제국주의를 다룬 ‘콜로서스’에 이어 니얼 퍼거슨의 또 다른 대작인 ‘증오의 세기’도 제국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정치사뿐만 아니라 경제사의 관점에서 쓴 ‘금융의 지배’가 더 최근에 출간되기도 했지만, 20세기 폭력사를 제국론과 엮어 새로운 관점에서 썼다는 점은 ‘증오의 세기’에 눈길이 가도록 만든다. ‘그저 그런’ 제국론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퍼거슨은 편년체 역사기술을 싫어한다. 20세기 초반의 잔혹한 인류의 경험을 서술할 때에도 그는 굵직한 세 가지 기둥을 휘감아 도는 수많은 사례와 편린들을 모아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재구성한다. 인종과 민족갈등, 경제적 변동, 그리고 제국의 쇠퇴라는 기둥 위에 갈등의 현대사가 우뚝 솟아있다. 특히 1905년에서 1953년에 걸친 반세기를 ‘증오의 시기’로 명명하고 어떻게 이 시기가 도래했는지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책의 문제의식은 명쾌하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확신이 고조되었던 20세기 초반에 어떻게 최악의 폭력과 살육이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두드러진다. 물론 고리타분한 교과서의 논리를 따라가겠다는 것도 아니다. 권선징악의 교훈이나 서양의 승리와 같은 뻔한 스토리를 반복하지 않는다. 얼핏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새롭게 해석한 수정주의 역사가 A J P 테일러와도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그림을 그린다. 물론 프랜시스 후쿠야마나 필립 보빗과 같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예찬론자에는 등을 돌리고 있다.
필체는 잔잔하지만 충격적인 에피소드가 넘쳐난다.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홀로코스트나 난징학살 이야기들도 900쪽이 넘는 책이 지루하다고 느낄 틈이 없게끔 만들어준다. 그리고 독자는 퍼거슨이 던지는 암묵적인 결론에 하릴없이 빨려든다. 인간의 폭력을 해결하는 방법, 그것은 제국이라고! 이쯤 되면 그동안 한물간 것으로 간주돼온 제국론이 엄청난 반향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제국의 역사가’로서 퍼거슨은 러시아와 동유럽권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학살, 오토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그리스인 탄압,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만행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전 세계를 훑고 있지는 않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양편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폭력의 사례가 자신의 제국론과 어떻게 짜맞추어질 수 있는지 고군분투 탐구한다. 그가 보기에 폭력은 바로 제국의 붕괴에서 싹을 틔우며, 20세기의 역사는 바로 권력과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실주의의 역사였다.
책은 대체로 양차 세계대전에 과도하게 치중해있다. 그러나 기존의 역사책들이 이 시기에 대한 미시적 분석에 치중하는 반면에 퍼거슨은 제국의 역사와 인종문제, 경제적 변수를 함께 고려한 복잡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낸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했는데, 멀리서 보면 톡톡 튀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에두름을 허용치 않는 고집스러운 연설문 같기도 하다.
제1부는 증오의 폭력사가 형성되는 배경을 기술한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학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동쪽으로 퍼져나갔는지, 민족개념들이 어떻게 인간성의 말살을 가져오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제2부는 20세기 격동의 전반기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소련의 사회주의 경험과 대공황 이후의 전체주의, 일본의 성장 등 세계대전을 향해 멈추지 않는 역마차처럼 달려가는 새로운 ‘제국 국가’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제3부와 제4부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의 역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일본의 아시아 지배, 전후처리에 관한 소개가 이어진다. 아쉽게도 냉전, 핵무기 대결, 쿠바위기,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1990년대의 발칸학살과 르완다사태 등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은 에필로그에 압축되어 있다. 역사적 경험이 20세기 후반에도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이처럼 무언가에 쫓기듯 봉합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론가들은 역사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따름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곤 한다. 반면 역사가들은 이론화가 곧 조악한 일반화라고 믿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퍼거슨은 두 가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면서 양쪽을 넘나드는 드문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그리는 제국의 그림은 ‘현실주의’라는 이론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지만, 제국 이후의 ‘다가오는 무정부상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는 로버트 캐플런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아직까지는 역사가의 모습이 진하게 남아 있지만, ‘이론’을 구축하려는 그의 욕심과 노력은 저작 곳곳에서 엿보인다. 거시사를 다루는 한편 시스템 복잡성과 변화의 다이내믹스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탐색해가는 학문적 어젠다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이 하나의 이정표로 인식되는 이유다.
그가 말한 ‘증오의 시기’ 이후에도 또다시 반세기 이상 갈등과 분쟁을 겪어온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 퍼거슨이 어떤 진단을 내릴까 새삼 궁금해진다. 민병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국제정치학 (동아일보 2010.12.25)
21세기의 제국론은 다소 진부해 보인다. 영국의 제국주의를 다룬 ‘제국’, 미국의 현대 제국주의를 다룬 ‘콜로서스’에 이어 니얼 퍼거슨의 또 다른 대작인 ‘증오의 세기’도 제국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정치사뿐만 아니라 경제사의 관점에서 쓴 ‘금융의 지배’가 더 최근에 출간되기도 했지만, 20세기 폭력사를 제국론과 엮어 새로운 관점에서 썼다는 점은 ‘증오의 세기’에 눈길이 가도록 만든다. ‘그저 그런’ 제국론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퍼거슨은 편년체 역사기술을 싫어한다. 20세기 초반의 잔혹한 인류의 경험을 서술할 때에도 그는 굵직한 세 가지 기둥을 휘감아 도는 수많은 사례와 편린들을 모아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재구성한다. 인종과 민족갈등, 경제적 변동, 그리고 제국의 쇠퇴라는 기둥 위에 갈등의 현대사가 우뚝 솟아있다. 특히 1905년에서 1953년에 걸친 반세기를 ‘증오의 시기’로 명명하고 어떻게 이 시기가 도래했는지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책의 문제의식은 명쾌하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확신이 고조되었던 20세기 초반에 어떻게 최악의 폭력과 살육이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두드러진다. 물론 고리타분한 교과서의 논리를 따라가겠다는 것도 아니다. 권선징악의 교훈이나 서양의 승리와 같은 뻔한 스토리를 반복하지 않는다. 얼핏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새롭게 해석한 수정주의 역사가 A J P 테일러와도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그림을 그린다. 물론 프랜시스 후쿠야마나 필립 보빗과 같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예찬론자에는 등을 돌리고 있다.
필체는 잔잔하지만 충격적인 에피소드가 넘쳐난다.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홀로코스트나 난징학살 이야기들도 900쪽이 넘는 책이 지루하다고 느낄 틈이 없게끔 만들어준다. 그리고 독자는 퍼거슨이 던지는 암묵적인 결론에 하릴없이 빨려든다. 인간의 폭력을 해결하는 방법, 그것은 제국이라고! 이쯤 되면 그동안 한물간 것으로 간주돼온 제국론이 엄청난 반향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제국의 역사가’로서 퍼거슨은 러시아와 동유럽권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학살, 오토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그리스인 탄압,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만행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전 세계를 훑고 있지는 않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양편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폭력의 사례가 자신의 제국론과 어떻게 짜맞추어질 수 있는지 고군분투 탐구한다. 그가 보기에 폭력은 바로 제국의 붕괴에서 싹을 틔우며, 20세기의 역사는 바로 권력과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실주의의 역사였다.
책은 대체로 양차 세계대전에 과도하게 치중해있다. 그러나 기존의 역사책들이 이 시기에 대한 미시적 분석에 치중하는 반면에 퍼거슨은 제국의 역사와 인종문제, 경제적 변수를 함께 고려한 복잡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낸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했는데, 멀리서 보면 톡톡 튀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에두름을 허용치 않는 고집스러운 연설문 같기도 하다.
제1부는 증오의 폭력사가 형성되는 배경을 기술한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학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동쪽으로 퍼져나갔는지, 민족개념들이 어떻게 인간성의 말살을 가져오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제2부는 20세기 격동의 전반기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소련의 사회주의 경험과 대공황 이후의 전체주의, 일본의 성장 등 세계대전을 향해 멈추지 않는 역마차처럼 달려가는 새로운 ‘제국 국가’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제3부와 제4부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의 역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일본의 아시아 지배, 전후처리에 관한 소개가 이어진다. 아쉽게도 냉전, 핵무기 대결, 쿠바위기,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1990년대의 발칸학살과 르완다사태 등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은 에필로그에 압축되어 있다. 역사적 경험이 20세기 후반에도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이처럼 무언가에 쫓기듯 봉합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론가들은 역사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따름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곤 한다. 반면 역사가들은 이론화가 곧 조악한 일반화라고 믿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퍼거슨은 두 가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면서 양쪽을 넘나드는 드문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그리는 제국의 그림은 ‘현실주의’라는 이론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지만, 제국 이후의 ‘다가오는 무정부상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는 로버트 캐플런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아직까지는 역사가의 모습이 진하게 남아 있지만, ‘이론’을 구축하려는 그의 욕심과 노력은 저작 곳곳에서 엿보인다. 거시사를 다루는 한편 시스템 복잡성과 변화의 다이내믹스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탐색해가는 학문적 어젠다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이 하나의 이정표로 인식되는 이유다.
그가 말한 ‘증오의 시기’ 이후에도 또다시 반세기 이상 갈등과 분쟁을 겪어온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 퍼거슨이 어떤 진단을 내릴까 새삼 궁금해진다. 민병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국제정치학 (동아일보 2010.12.25)
뉴욕타임스 '증오의 세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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