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3/남이 읽은 책

'러닝-한편의 세계사'와 '그리스인 이야기'

기자라는 직업의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은 거의 모든 일간 신문을 매일 볼 수 있다거나,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맡은 분야는 꼼꼼하게, 그렇지 않은 분야는 건성으로라도 훑어보게 된다. 출입처에 아침에 출근햇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이것이다. 물론 종이에 인쇄된 신문을 보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기사를 검색할 수 있지만 전자책에게서 종이책이 주는 '물체감'을 기대할 수 없듯 인터넷 기사로는 인쇄된 지면에 '편집'된 기사의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일요일 출근해 거의 모든 신문을 꼼꼼하게 훑어봤다. 처음 집어든 신문은 오래 들고 있게 되지만 반복될수록 각각의 신문을 보는데 드는 시간은 줄어든다. 중복되는 기사는 건너뛸 수 있어서다.

지난 토요일자 신문에서 아무래도 눈에 띄는 것은 출판면이다. 지난주 출판지면에서 공통적으로 주요하게 다뤄졌던 책 가운데 2권을 갈무리 해둔다. '러닝-한편의 세계사'는 달리기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달리기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아니다. 시속으로 따지자면 인간은 가장 빠른 포유류인 치타에 비해 훨씬 느리다. 그러나 달리기는 '걷기'의 속도가 빨라진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 듯 하다.
 
자전거에 비해 인기가 많이 식었지만 달리기는 여전히 인간이 가장 즐기는 운동 가운데 하나다. 헬스장에서 강변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레저' 혹은 '체력단련'의 수단으로서의 달리기는 근대의 일이었던 것 같다. 달리기가 생존의 수단이자, 위엄을 나타내는 수단이었던 적도 있었던 것이다.

달리기가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다

러닝 - 10점
토르 고타스 지음, 석기용 옮김/책세상

생물학자 데니스 브램블과 인류학자 대니얼 리버만은 '달리기'에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을 찾는다. 200만년 전 인간의 조상들은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서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먼 거리를 달렸다. 인간은 동물보다 발동작이 느렸지만, 땀을 흘리면서 열을 견디는 능력에 힘입어 빠른 짐승들을 지치게 만들 수 있었다. 인간은 이때부터 원숭이와 다를 바 없는 신세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민속학자가 쓴 <러닝>은 달리기로 본 세계문화사라 할 만하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직 달려야 했던 고대 전령에서부터 달리기를 통한 근대의 교육, 스포츠로서의 달리기의 태동, 근·현대의 뛰어난 달리기 선수들을 일별한다. 총 744쪽으로 깊이보다는 폭을 강조한다.

고대의 달리기는 귀족적이고 성스러운 행위였다. 수메르와 이집트의 왕족들은 자신에게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60㎞ 이상을 달려야 했다. 티베트나 일본 등 아시아권에서 달리기는 종교인들의 수행법이기도 했다. 20세기 초 서양 작가는 달리면서 수행한 티베트 수도승의 목격담을 전한다. 무표정한 얼굴과 크게 뜬 눈으로 지평선 위의 한 점을 바라보면서 용수철같이 뛰어갔다는 묘사다.

중세와 근대로 접어들면서 달리기는 때로 노름꾼들의 내기 대상, 때로 교육의 한 방식이 됐다. 분과 초를 잴 수 있는 정밀시계의 등장과 함께 달리기 주자에 내기를 거는 일이 많아졌다. 프랑스 철학자 루소는 <에밀>에서 한 소년에게 달리기 교육을 시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 쿠베르탱 남작의 주도로 1896년 고대의 올림픽 경기가 부활하면서 달리기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국가 혹은 민족 정체성을 통합시키기 위한 방편이 된다. 물론 마라톤을 두고 "최후의 심판 날의 광경"이자 "초인적이지만 쓸모 없는 노력에 관한 모호한 메시지"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아르 같은 이도 있었다.

출판사는 이 책이 노르웨이어로 출간됐으나 적절한 번역자를 찾지 못해 영어 번역본을 통해 중역했음을 사전에 밝히고 양해를 구했다. 중역 사실을 미필적 고의로 숨기는 것보단 훨씬 솔직한 태도다. (경향신문 3월26일자 백승찬 기자)


'그리스인 이야기'는 실물을 보진 못했으나 책을 접하는 순간 손에 강하게 달라붙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기사에서도 언급했듯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우리는 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끌리는가. 가장 먼저는 '신화'라는 이야기 형식이 갖고 있는 상상력, 그리고 무한한 변용 가능성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하나는 '그리스 로마'라는, 우리와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공간이 갖는 이국성이 또한 우리를 이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다. 고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나름 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그 복잡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 대한 개념을 잡기란 무리다. 사실 그리스 역사에 관한 명저라는 이 책을 읽고 난다 한들 그리스 역사에 정통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눈길을 끄는 것은 적어도 르네상스 이후 서양 인문정신의 뿌리에 그리스가 있다는 점을 우리가 귀에 옹이가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힙포크라테스' '투퀴디데스' 등 낯익지만 조금 다르게 표기된 인명이 눈에 띈다. 역자 나름의 원칙에 따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국내에선 보통 '투키디데스'로 불리는 그리스 역사학자는 영문으로 'Thukydides'로 표기된다. 미국에서 유학한 한 교수의 수업을 대학 시절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은 '쑤씨디데스'를 고집했다. 'th'를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혀를 끼웠다가 빼면서 발음하는 아른바 번데기 발음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끼리 '미국에선 저렇게 발음하다보다'라고 했지만 어색하기 그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스 신화조차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
-고대 문명사의 세계적 고전 50여년 만에 한국어판 출간
-문명을 기획한 그들의 역사, 시적이고 격정적인 문체로 신화만큼 흥미롭게 풀어내

그리스인 이야기 세트 - 전3권 - 10점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양영란 옮김, 강대진 감수/책과함께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는 주로 '신화'라는 말과 붙어 있다.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통해 국내에서 신화 읽기 열풍이 일었고, 신화는 점점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동일시돼 갔다. 그래서인지 신화가 아닌 고대 그리스 역사를 제대로 다룬 책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역사를 다루더라도 그리스 전성기 위주로 소개한 책이나 인물 중심의 평전이 대부분이었다.

앙드레 보나르(1888~1959)의 <그리스인 이야기>는 서구문명의 근원인 고대 그리스 문명을 신화가 아닌 역사의 차원에서 담은 책이다. 특히 문명 그 자체를 언급하기보다 그리스 문명을 기획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통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1954~59년에 걸쳐 세 권으로 출간된 후 그리스 문명사 분야의 세계적 고전으로 자리잡은 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50여년이 지나 처음으로 소개됐다.

(플라톤 흉상 일부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상의 머리부분)

서양의 고대사를 다룬 책이지만 보통의 역사책처럼 딱딱하지 않고,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평생을 그리스 연구에 바친 스위스의 그리스어·문학 교수이자, 반나치·반파시즘 운동을 한 평화주의자'. 저자의 두툼한 이력답게 책은 시적이고 격정적이다.

건조하게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 고대 그리스 인물에 몰입해 자신의 감동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을 다룬 글에서 저자는 그리스연합군의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아의 용맹스러운 전사 헥토르의 싸움을, 그리스 민족의 전쟁사를 담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백미로 꼽는다. '본능적이고 불 같은' 아킬레우스의 용맹과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 건강한 느낌'을 가진 헥토르의 용맹을 시적인 표현을 담은 짧은 문장으로 숨가쁘게 비교한 그는 글의 마지막에서 헥토르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아킬레우스는 통째로 불타고 있는 한 시대에서 마지막 빛을 발한다. 약탈과 전쟁으로 얼룩진 아카이아인들의 시대는 이제 아킬레우스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중략) 그리고 그 자리에서 헥토르는 새로운 시대를 선언한다. 가족과 땅과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중략) <일리아스>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이끌어왔으며,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1권-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까지'는 그리스 문명의 탄생에서 민주주의의 완성 단계까지를 다룬다. 이어 '2권-소포클레스에서 소크라테스까지'는 과학·철학·문학의 시대였던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를, '3권-에우리피데스에서 알렉산드로스까지'는 그리스 문명의 황혼기를 다룬다.

그리스 최고의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와 자유주의 시민의 탄생, 인본주의 의학의 아버지 힙포크라테스, 그리스 역사의 쌍벽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대 그리스사에 대해 과감한 분석과 비평을 내놓는다. 공히 그 밑바탕에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깔려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원시인의 모습으로 발칸반도에서 헬라스로 남하한, "불쌍하게 태어나서 비참하게 죽어갈 운명"을 가졌던 그리스인들. 하지만 그런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연에 맞서 인간의 능력을 키우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문명을 이룩하며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된 그들에 대한 애정이다. "오늘날 문명의 기원이 되는 이 휴머니즘이 바로 그리스 문명"이라고 강조하는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명도 그리스 문명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덧붙여 완성해나갈 뿐"이라고 말한다. (경향신문 3월26일자 임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