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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남이 읽은 책

'다음 국가를 말하다-공화국을 위한 열세가지 질문'(박명림.김상봉)

다음 국가를 말하다 - 10점
박명림.김상봉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지난주 이 책을 구해 살짝쿵 맛을 보고 있는데 토요일자 신문에 서평기사가 실렸다. 두분이 편지로 의견을 주고 받는 형식으로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글인데, 대폭 수정보완을 거쳤다. 두분 다 워낙 꼼꼼하신 분들이지만, 많은 글들을 쏟아내며 바쁘신 분들이라 연재할 당시에도 글이 늦게 넘어와 애를 먹곤했다. 연재될 당시 나도 한두번 당번을 맡아 글배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감시간이 임박해오면 독촉 전화를 하는데 "3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말을 들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은근 부아가 치솟던 기억이 난다. 당시 편집자들의 고충이 이런거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쓸데없는 얘긴 각설하고. 머릿말과 첫번째 장 밖에 보지 못했는데 일단 책의 지질이 마음에 든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좋아서 접어서 한손으로 들고 보기에 편하다. 아직 앞부분 밖에 보지 못한 상태여서 단정적으로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문장이 평이해 쉽게 읽힌다. 띠지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정치 교과서'란 문구가 보이는데 필자들이 실제 염두에 뒀는지는 모르지만 젊은 독자들을 상당히 의식하고 책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중 하나가 매우 친절한 편집자 주석이다. '네그리의 다중'과 같은 전문용어에 대한 설명도 있으나 '6월민주항쟁' '마르크스' '레닌' '5.18민중행쟁'과 같은 우리 세대에겐 상식으로 통하는 항목에 대한 설명도 편집자주로 설명돼 있다.
 
최근 <김대중 리더십>을 쓴 최경환 비서관을 일전에 우연히 만났는데 최 비서관이 이와 관련된 얘기를 했다. 젊은이들에게 읽히는 책을 만들자는 것이 출판사와 자신의 의도였는데, 출판사에서 하도 쉽게 쓰라고 주문을 해서 힘들었다는 얘기와 함께 각주를 만드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심지어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용어까지 각주로 설명을 달아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늙은건지, 요즘 걱정들이 쏟아지는 것처럼 역사 교육이 소홀해 젊은이들의 역사 상식이 떨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낯선 풍경이기는 마찬가지다.

<다음 국가를 말하다>는 일독을 한 뒤 따로 정리를 해둬야겠지만 두 저자의 서문만 봐도 매우 강렬하다. 맨 앞에 나오는 김상봉 선생이 쓴 머릿말을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었는데 하마터면 내릴 역을 지나칠뻔했다. 그는 '생각은 불편에서 시작된다'는 말로 머릿말을 시작했다. '국가'라는 담론은 보수우파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독재 정권이 아닌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운영하는 작금의 '국가'가 국민에게 보여주는 온갖 패악질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시민들마저도 국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좋은 공화국’을 향하여

정치학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와 철학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활발한 의견 제시와 운동을 계속해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이들이 양극화가 심화하고 희망이 사라져가는 우리 사회를 놓고 13차례에 걸쳐 묵직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두 저자가 서로에게 묻고 답하기를 시작한 계기는 2008년 촛불시위에서 터져나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시위대의 외침이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탄생한 이명박 정부를 향한 이 외침은 대의민주주의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적신호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과 다른 모습의 국가 공동체에 대한 요구였다. 헌법 제1조 1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이들이 주목한 것은 공화국, 즉 다 함께 잘 사는 나라였다.

‘민주공화국’의 ‘민주’가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권력주체를 규정한 개념이라면 ‘공화’는 모두를 위한 국가가 돼야 한다는 내용과 목적(김상봉)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공화국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성취한 절차적 민주주의에 만족하는 가운데 공동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소홀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퇴보할 위험에 놓이게 됐다(박명림).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한 저자들의 진단은 암울하다. 경제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면서 실업과 비정규직, 계층간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늘어난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GNP 대비 복지비용은 같은 OECD 회원국가들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출산율 꼴찌, 자살률 최고라는 기록은 삶의 피폐와 불안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모습을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제일주의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기업국가가 됐다. 기업국가란 기업이 국가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사회의 운영원리 자체가 이윤과 효율을 추구하는 기업논리로 무장된 국가를 말한다. 김 교수는 “우리 시대의 위기는 정치적 삶에서 이익을 넘어서는 의로움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박 교수 역시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공준(公準) 대신 모든 분야가 이익 중심으로 재편된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 모순의 정점은 지난 대선을 강타한 CEO 대통령론이다. 이윤과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총수와 대화, 관용, 타협이 필요한 국가지도자는 상호 모순이다.

경제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정치와 법이 무력해진다.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고 가치를 배분하는 본래의 목적을 떠나 당파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개별 사안에 대한 토론과 합의 대신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라는 단순 잣대로 사안을 환원시킨다. 사회적 타협의 기반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결정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폐단이 생겼다. 그러나 법은 많은 경우 강자의 이익을 지켜주는 보루로 작용한다. 엘리트와 기득권층,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조는 정치와 사법을 넘어 교육·언론·종교·노동·금융·유통·지식 등 사회 전 분야로 확장됐다.

이런 상태에서 소수의 자원을 둘러싼 사회 구성원간의 경쟁은 갈수록 격화한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시험점수와 실적 때문에 발버둥친다. 그런 한편 부와 권력, 지위의 세습 구도가 견고해진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면서 부모의 능력과 재산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는 세습사회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역근대화’(박명림)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공동체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돼 가는 시점에서 저자들은 국가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개인의 문제는 전체의 문제이며 공동체의 변화를 통해서만 개인의 상황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폴리스를 떠나 살 수 없다”(아리스토텔레스), “사람은 나라 안에서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함석헌)라는 표사(表辭)에는 공동체에 대한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뜻이 담겨있다.

민주화 이후 지식사회와 진보진영은 전체를 지양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추구해왔다. 이는 국민이란 이유로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유린한 20세기 전체주의, 개발독재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전체에 대한 무관심은 공동체의 붕괴와 개인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이는 비단 지배세력이나 보수정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공유하는 나라의 이상이 없었다는 점은 민주화 운동세력이나 독재 권력의 후예나 똑같았고(김상봉) 당장의 정치적 계산이 거시적 청사진의 마련을 늘 압도했다(박명림).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다시 국가다. 그런데 그 국가란 과거와 같은 의미의 전체적, 억압적인 국가가 아니다. ‘나’라는 개인이 모여서 ‘나라’가 되는 ‘서로주체성’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국가는 참된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부정되고 지양돼야 한다(김상봉). 또 개인과 사회, 국가, 세계가 한 연결고리 안에 들어가면서 다문화사회와 통일, 세계시민으로서의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박명림).

두 저자는 ‘폴리스’(정치)와 ‘오이코스’(경제)가 분리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사례를 들거나 우리 건국헌법에서 조소앙·김구·이승만·유진오가 꿈꾸었던 평등사회의 이상을 제시하는 등 공화국의 이념과 역사를 더듬어 나가면서 묵직한 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이상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다.

김 교수는 권력구조를 현재의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을 실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대통령중심제는 정책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되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를 몇몇 스타 중심의 정치쇼로 만든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강령의 작성자이기도 한 그는 또 정치적 무력감과 불신을 떨쳐버린 진보정당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CEO를 노동자가 직접 뽑는 노동권 강화를 주장한다.

박 교수는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을 모색한다. 권력과 여론의 흐름이 과거와 달라진 만큼 국가, 정당·언론 등 대의기제, 시민사회 사이의 새로운 3권분립이 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기존 입법·사법·행정부 외에 감독부(감사원·검찰·공정위·금감위·선관위·방통위·인권위) 신설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시민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시민 개인이 찾고 구하는 실천적 행위가 곧 좋은 공화국을 향한 목적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꿈꾸는 ‘다음 국가’는 다음 정권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현실과의 타협, 인간의 이기심 속에서 끊임없이 유예되는 국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꿈꾸기를 그친다면 더이상 희망이 있을 수 없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김상봉·박명림의 서신대담’이란 제목으로 2009년 1월부터 8월까지 연재됐던 글을 보완한 것이다. (경향신문 2월12일자 한윤정 기자)

참 민주공화국 왜 시대정신인가
두 학자의 연재 글 보완해낸
우리 사회 미래에 대한 제언

우리 시대와 나라를 깊이 걱정해온 실천적 철학자 김상봉(사진 오른쪽) 전남대 교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성찰하고 새 길을 모색해온 정치학자 박명림(사진 왼쪽) 연세대 교수. <다음 국가를 말하다>는 역량 있는 두 학자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열어 갈 것인가를 두고 함께 숙고한 결과를 모은 책이다. 연전에 일간신문에 편지형식으로 매주 번갈아 연재한 글을 묶고 내용을 보완했다.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두 학자는 지금 여기의 시대정신이 ‘참된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데 공감하면서, 왜 공화국이 시대정신인지, 도대체 공화국이 무엇인지, 그 공화국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찬찬히 따져 들어간다. 학문 분야의 차이가 두 사람 글에 다른 분위기를 입히기도 하고, 또 세상을 보는 시선의 차이로 각론에서 이견을 보이기도 하지만, 참된 공화국이라는 과제 상황을 대하는 태도의 진지함은 같은 모습이다.

두 학자가 공히 공화국을 위한 사유의 거점으로 삼는 사람이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임을 이 책은 보여준다. 김상봉 교수는 “이 땅의 민주화운동사 또는 민중항쟁사 속에서 발효된 지혜에 기대어 새 나라의 밑그림을 그리려 했다”며 “내겐 그 가운데 첫째가는 지혜의 원천이 바로 함석헌이다”라고 말한다. 박명림 교수도 “현대 한국에서 개인과 전체에 대해 함석헌보다 더 깊이 고민한 사상가는 드물다”며 함석헌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모든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 시대의 말씀은 전체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말씀은 민중의 입에서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말씀은 무엇인가. 박명림 교수는 “좋은 공화국”이라고 단언한다.

왜 하필이면 ‘좋은 공화국’이 ‘시대의 말씀’ 곧 시대정신인가.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김상봉 교수는 나라 혹은 국가에 대한 진보파의 진지한 탐구가 부족했던 이유를 먼저 따져본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전 사회주의 이론이 국가를 소멸해야 할 대상, 다시 말해 마침내 사라질 필요악으로 본 것이 “바람직한 국가에 대한 상상을 억압해온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소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존재의 조건이다. “우리는 나라를 스스로 형성함으로써 그 주인으로 자유를 누리거나 아니면 국가의 노예로 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공화국은 어떤 공화국인가? 김상봉 교수는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공화국, 한마디로 줄여 ‘민주공화국’이라고 말한다. “민주국가가 모두에 의한 나라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나라가 민주공화국인 셈이다.

박명림 교수는 민주공화국 이념이 담긴 헌법 제1조의 역사를 추적하여 그 사상의 깊은 뿌리를 드러낸다. 그는 먼저 2008년 촛불항쟁 때 수십만 시민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면서 헌법 제1조가 법전에서 나와 국민 속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헌법 정신이 “추상에서 구체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념이 1919년 4월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처음 명시돼 면면이 계승됐다는 사실이다. 그 헌장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한 이래 단 한번도 바뀜 없이 1948년 제헌헌법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민주공화국의 내용이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념, 다시 말해 ‘국가사회주의’ 성격이 두드러진 민주공화주의였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극심하게 탄압한 유신헌법에 와서 처음으로 헌법에 등장했다고 박명림 교수는 알려준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야말로 건국정신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세력은 ‘진정한 건국정신’을 왜곡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제대로 만나 그 이상을 구현해야 할 때이며, 그런 만남을 위한 ‘공준’이 헌법 제1조라고 말한다.

박명림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더 많은 물질을 향한 투쟁’을 넘어 ‘좋은 영혼을 위한 투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가 보기에, 좋은 영혼 없이 좋은 시민 되기는 불가능하고, 좋은 시민 없이 좋은 공화국 만들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좋은 영혼이 되기 위한 투쟁은 좋은 공화국을 위한 투쟁이다.” 김상봉 교수는 자신이 창안한 개념인 ‘서로주체성’으로 ‘좋은 영혼들의 공화국’을 설명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하나의 과제인바, 한갓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성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몫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자기 혼자서는 자기가 될 수도, 자기를 형성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오직 너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내가 된다. “이처럼 내가 오직 너와 만나 우리를 이룸으로써만 나를 형성하고 실현하는 활동을 가리켜” ‘서로주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참된 공화국이란 서로주체성이 실현된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한겨레신문, 2011년2월12일자 고명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