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럴 기회도 사라져 버렸지만 나도 회사에서 내근을 할 땐 인왕산 자락을 종종 산책하곤 했다. 자주 갈 때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가기도 했다. 직장 근처에 이렇게 좋은 산책길이 있고, 짬을 내서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그리고 회사 구내식당이 있는 9층 옥상에서 보면 멀리 인왕산이 건네 보인다. 참 좋은 산이다.
그런데 누구는 ‘참 좋은 산’이라고 감탄만 하고 지나가는데 누구는 그냥 산책만 하거나 등산만 하지 않고 열심히 생각을 길어올려 일기를 썼다. 이 책을 쓴 궁리의 이갑수 대표의 내공에 비하는 나는 한참 아래다. 인왕산 자락 산책의 목적을 그날의 스트레스 해소와 다리운동에만 뒀던 게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기사, 쓴다고 해도 그 양반의 내공에 훨씬 못미쳤겠지만. 이갑수 대표는 몇번 만난 적이 있는데 참 맑은 분이다. 장난기도 있다. 리뷰 기사에서 썼지만 그가 운영하는 궁리출판사 사무실은 왠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나오는 출판사 사무실 분위기가 날 것 같다. 신혼인 박중훈이 싸온 도시락을 열면 완두통으로 하트가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선배들이 놀린다. 그래도 신랑은 좋다고 헤벌쭉이다. 이런 분위기 말이다.
여하튼 이 책을 보면서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진심이다. 일기는 커녕 주기(週記)도 쓰기 어려운 게으름뱅이도 꿈을 꾸는 건 자유다.
손을 댄 책 몇권을 가방에 넣고 다니고는 있으나 이 책이 올해에 제대로 읽은 마지막 책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남의 일기로 한해 독서를 마무리하게 된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다. 웬지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신인왕제색도 - 이갑수 지음, 도진호 사진/궁리 |
인왕산 일기 - 이갑수 지음/궁리 |
<나의 사랑 나의 신부>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간 텔레비전에서 여러번 방영됐고, 주인공 중 한 명이 저세상 사람이 됐을 정도로 오래된 영화이지만 한편의 동화처럼 예쁘고 낭만적이다. 아무리 신혼부부에 관한 이야기라지만 어찌보면 닭살이 돋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영화가 그런 거부감이 별로 들지 않았던 것은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를 꿈꾸는 출판사 직원으로 설정된 덕도 있었을 것이다.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대개 출판사 직원은 일반 샐러리맨에 비해서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있고 낭만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의 출판사 사람들은 이런 얘기에 열이면 열 모두 손사래를 치지만 말이다. 그런데 <빛으로 그리는 신인왕제색도>와 <인왕산일기>를 보면 그런 고정관념이 100%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은이는 서울 경복궁 뒤편에 자리잡은 인왕산 발치 통인동에서 출판사를 운영한다. ‘추석 차례상 앞에서 궁둥이 쳐들며 절을 한’ 게 50번을 넘었다니 나이 드실 만큼 드신 양반인데 바람이 나서 바람난 얘기를 새살새살 책으로 풀어냈다. 대상은 바로 인왕산. 점심시간에 자신이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게시판에 메시지를 남긴 다음 DJ가 달아놓은 댓글을 보면서 흐뭇해 하는 모습은 엔간히 철이 든 사람에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자기가 유난히 비를 좋아하는 이유가 혹시 태어난 날 비가 왔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어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그날 비가 왔습니다. 영점사미리가 왔습니다”라는 답변을 듣고는 큰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흉을 보려는 게 아니라 부러워서 하는 얘기다.
그는 지난 1년간 인왕산을 바라보며 쓴 글을 월·수·금요일에 출판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화·목·토(일)요일에는 인왕산에 올라 남산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일기를 썼다. 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인왕산을 올랐고, 오르지 못하는 날은 아래서 올려다 보았다. 사진을 찍은 이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그 출판사의 영업부장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장소(‘인곡정사’가 있던 자리·현재는 옥인동 군인아파트)를 찾아내 일주일에 3번, 1년간 인왕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담배가게 주인이 13년 동안 매일 아침 자신의 가게 앞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는 내용의 영화 <스모크>를 흉내낸 것이다.
지은이는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인왕산을 바라보며 안부를 여쭌 얘기며, 인왕산을 발로 밟으며 건져올린 추억과 사색들, 통인동 골목과 통인시장을 오가며 만난 이웃들 얘기들을 맛깔나게 풀어냈다. 그가 좋아하는 시, 판소리와 국악, 막걸리 얘기가 간간이 등장해 감칠맛을 더한다. 많을 땐 1년에 100번 넘게 오르는 인왕산은 그에게 ‘그 분’이다. ‘그 분’은 어떨 땐 ‘임’이고, 어떨 땐 신령한 존재이다. “나는 인왕산에 오를 때마다 승천하다 말고 잠시 인간 세상에 웅크리고 있는 용의 가쁜 숨결소리를 듣는다.”(2010·7·9) 지은이는 인왕산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본다. 이 사실이 몹시도 신기하다. 나는 너의 옷을 입고 너는 나의 옷을 뒤집어 입고 있다. 이 사실이 몹시 우스꽝스럽다.”(2009·11·18) “나 죽고 난 뒤에 나보다 오래 사는 이가 있어, 혹 그가 나를 추억하면서, 야 인왕산 자락에 살던 그 양반 성질이 얼마나 쌀쌀맞았노. 그 성질머리가 꼭 최근 이 겨울 날씨 같지 않았겠나, 그쟈. 해주신다면 참 고맙겠네, 참으로 고맙겠네.”(2010·1·15)
좋아하는 막걸리 몇잔에 흥이 오르면 판소리 한자락을 뽑아내는 그이지만 실은 무척이나 꼼꼼하고 조용한 성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0년 넘게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명편집자 출신이다. 그의 일기를 보면 그는 젊은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애정은 온통 메말라 버석거리는 세상과 견주어 빛날 수밖에 없다. “저녁 6시.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그널 음악이 울리자 모두들 퇴근 준비를 했다. 통인시장에 들러 깎은 밤 한 됫박을 사고 큰길로 나와 경복궁역으로 걸어가는데 동대문 쪽 하늘에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보름달이었다. 달님한테는 대단히 죄송한 표현이지만 노릇노릇 잘 구운 빈대떡처럼 아주 맛있게 보였다. … 아는 사람 만나면 저 향기로운 달 좀 보라며 소리치고 싶었는데 아는 이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2010·3·30)
2010년이 저물어 간다. 지은이는 2011년에도 인왕산에 오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흉내내어 이렇게 말해볼까. 나에게 늙음이란 더 이상 저 인왕산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2009·11·25) 이 책이 12월에 출간됐기 때문일까? 남의 일기를 보면서 ‘내가 올 한해 무슨 일을 했나’, ‘내년엔 무슨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옳거니! 어릴 적 해가 바뀔 때마다 했던 결심,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됐던 것 중의 하나가 일기쓰기였다. 한데 이 책을 읽다보면 내년엔 꼭 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든다. (201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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