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 없이 인용되고, 재해석되고, 변주되는 인물 프로이트. 다시 또 프로이트다. 프로이트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가까이 들어와 있는지에 관한 일화 하나. 내 아이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래서 나는 내년에 '지옥의 문'이 열린다고 농담하곤 한다. 여하튼 초등학교에서 취학전 아동 학습법 비스무리한 팸플릿을 하나 나눠줬나보다. 주말에 집에서 뒹굴대다가 이 자료가 눈에 띄길래 펼쳐봤다. 프로이트의 그 유명한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성욕기 등으롷 이어지는 성적 발단단계와 단계별 특성에 대한 설명이 앞쪽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대학 시절 내가 다니던 학과의 학생회실 가까이에 심리학과 학생회실이 있었다. 동아리에서도 심리학과 ‘학우’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프로이트 얘길 하면 웃으면서 자기네도 프로이트 보고 심리학과엘 왔는데 수업시간에 프로이트 얘길 하면 교수님이 화를 낸다고들 말했다. 심리학에선 프로이트는 심리학사의 한 장면을 차지하는 인물일뿐 현대 심리학에선 프로이트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프로이트보다는 실험용 쥐와 더 가까웠다.
이 책 <프로이트의 환자들>은 말 그대로 프로이트를 찾아왔던 환자들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중간에 프로이트와 융, 라캉에 관해 설명한 챕터가 들어있다. 얼마전 라캉에 관한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 모음이 출간되기도 했거니와 요사이 각광받는 서양 철학자들이 대체로 라캉을 즐겨 인용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그중 하나다. 그래서 프로이트와 융, 라캉에 관한 해설이 개인적으로 매우 유용했다. 푸코나 데리다 등 서양 철학자들은 또한 동음이의어, 이음동의어, 어원 등을 가지고 어떤 현상이나 개념 등을 설명하길 즐기는데 이 또한 프로이트가 앞서서 시도했던 작업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프로이트를 키워드로 한 책을 크게 소개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주에 프로이트를 키워드로 하는 책이 국내 저작이 또 나왔다.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웅진지식하우스)인데 우리 고전 속 등장인물의 심리를 프로이트 이론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런 경우 안타깝다는 말 밖에. 고전을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같은 출판사에서 최근 나왔던 <전을 범하다>와도 맥이 닿아 있는 듯 하다.
'의사' 프로이트의 맨얼굴
-탐정처럼 환자 이야기속 작은 단서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 찾아내
프로이트의 환자들 - 김서영 지음/프로네시스(웅진) |
엘리자베스라는 젊은 여성이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를 찾아와 양쪽 다리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었다. 최근 그녀의 아버지와 언니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수술을 받았다. 오래전 아버지가 쓰러지자 간병을 하던 엘리자베스는 어느날 다리에 통증을 느꼈으나 충분한 휴식으로 나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엘리자베스는 결혼한 두 언니네 부부를 포함한 가족들과 피서를 가는데 다시 다리 통증을 느낀다. 피서에서 돌아온 후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그러던 중 둘째 언니가 죽었다.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자신의 증상에 관해 사소하더라도 떠오르는 것들을 말해달라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밤에 아버지가 부르면 맨발로 침대에서 찬 바닥으로 뛰어내려야 했기에 항상 발이 차갑다고 느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느날 이웃 청년과 파티에 갔다가 늦게 돌아온 날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사실도 말했다. 피서지에서 둘째 형부와 단둘이 산책할 때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한 언니가 부럽다’고 느꼈던 것도 떠올렸다. 그리고 둘째 언니가 죽었을 때 ‘언니가 죽었으니 이제 내가 형부와 결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을 스쳤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의 ‘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죄책감이 ‘무의식’에서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망각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기억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스트레스가 마음의 병을 낳았고 이는 몸의 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분석이었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환자와 대화를 하면서 환자들 스스로가 ‘자유연상’을 통해 진실의 문에 다가가도록 했다.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프로이트는 그녀가 어느 파티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위키피디아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라는 말로 프로이트에 관한 설명을 시작한다. 그렇다! 프로이트는 52년 동안 주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환자들을 상대했던 정신과 의사였다.
그는 환자들을 상담하고 치료하면서 상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이렇게 축적된 사례들이 영어판 기준 8000여쪽에 이르는 프로이트 전집에 오롯이 담겼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런 사실을 까먹고 정신분석학자로서의 프로이트만 떠올리곤 한다.
<프로이트의 환자들>은 프로이트 전집에서 환자들의 이야기 150가지를 추출했다. 프로이트를 키워드로 나온 책들은 부지기수이지만 그가 분석한 환자 사례들만 모은 책은 처음이다.
이 책은 프로이트가 정립한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례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례들을 프로이트가 어떻게 분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문 연구자가 전집에 방대하게 펼쳐진 사례들을 1권으로 요령껏 압축했기에 프로이트 입문서로 제격이다.
책에는 도라라는 가명으로 불린 여성 히스테리 환자, 쥐를 이용한 고문 행위를 두려워한 남성 강박증 환자(쥐 인간), 말을 무서워하는 아이 한스 등 많이 알려진 프로이트의 환자들은 기본이요, 단순한 말 실수나 거짓말, 프로이트 자신에 관한 분석도 담겼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정신분석학을 ‘의사과학’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그러나 “정신분석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 인간이 겪는 정신적 고통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것”이라면서 “프로이트는 이러한 목표에 충실한 의사였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구체적인 정신분석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 기법들을 우선 나 자신의 말과 감정, 기억에 적용해 봄으로써 나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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