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면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지난 주말 각 신문 출판면들은 모두 <거의 모든 것의 미래>와 <사회적 원자>를 주목했다. 각각의 책은 큰 각 언론사 출판담당 기자들에게 '어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두 책은 모두 '과학서'이다. 읽기 전에 대강 예상은 했지만 읽어가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책에서 다루는 사례들이 많이 겹친다. 인용된 연구 사례나 학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커스도 약간 다르고, 스탠스도 좀 다르다. 둘 가운데 하나만 고르기도 그렇고 해서 '책 대 책'이란 컨셉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2권을 동시에 읽고 비교해 보는 것 말이다.
문제는 분량이었다. <거의 모든 것의 미래>는 본문만 450여쪽, <사회적 원자>는 250여쪽이었다. 이럴 때 쓰이는 말이 바로 '미친 척'이다. 미친 척하고 하루만에 두권을 읽고 원고지 10장 안팎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도전. 결과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루 만에 읽은 책을 '완전히' 소화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겠지만, 나름 요약해서 소개하고 비교를 했어야 하는데 작업을 하다 만 느낌이다.
덕북에 지난 수요일 역시 새벽 3~4시가 되서야 집에 갈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미친 짓'은 해볼만 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측 과학'의 역사를 훑을 수 있었고(<거의 모든 것의 미래>), 네트워크 이론 및 복잡계 과학 등 최신의 물리학 이론과 실험을 일별할 수 있었다.(<사회적 원자>)
<사회적 원자>의 경우 출판사는 보도자료에서 인간사회에서 빈부격차가 생기는 것은 어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물리적?)으로 당연한 이치임이 밝혀졌다고 부각시켰다. 이탈리아 수학자 알프레도 파레토에 의해 이미 증명된 사안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오해나 이데올로기적 전용이 이뤄질 수 있어 주의해서 받아들일 필요하다고 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빈부격차가 생기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증명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빈부격차가 자연스런 현상이므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것이 별로 문제가 안된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보수층에서 이런 식으로 전용할 수 있겠다. 이미 전용하고 있다. 반대로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자연스런 흐름이므로 인위적으로 평등화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부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내가 능력이 뛰어나서, 혹은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인데 왜 내놓아야 하느냐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과학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경험하고 목도했듯 과학 역시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두권의 과학책에서 내가 내 맘대로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거의 모든 것의 미래 - 데이비드 오렐 지음, 이한음 옮김/리더스북 |
사회적 원자 -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사이언스북스 |
영국의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과학적 사고의 목적은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보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본다’는 것은 과학이 어떤 현상을 지배하는 규칙 또는 법칙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을 본다’는 말은 이렇게 밝혀낸 과학적 법칙이 다른 조건들이 모두 같다면 영원이 반복돼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쇳가루가 자석에 달라붙는 현상, 물의 온도가 일정한 정도로 내려가면 얼음이 되는 현상 등은 그 원리가 규명됐는데 보통의 상황에서 쇳가루는 언제나 자석에 달라붙고, 물은 0도 이하로 내려가면 무조건 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말은 과학의 목적이 현상의 규명이자 미래의 예측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21세기 들어 인류가 경험한 굵직한 자연적·경제적 재난만 떠올려보더라도 과학의 예측력은 형편없거나 적어도 매우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것의 미래>(이한음 옮김·2만5000원)와 <사회적 원자>(김희봉 옮김·1만5000원)는 이 질문에 대해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의 미래>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이룩한 과학적 업적의 파노라마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점성술사들로부터 시작된 예측이라는 작업은 피타고라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뉴턴·아인슈타인 등 인류 최고 천재들의 노고를 거쳐 학문으로 정립됐다.
그렇지만 이 책의 목적은 현대 과학의 예측력이 형편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미래의 3가지 분야인 날씨·건강·부(富)의 흐름을 설명하고 예측을 내놓지만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일기예보를 접하고, 전염병에 대해 배우며, 주가전망에 신경을 쓴다. 그리고 매번 실망한다. 그럴 때마다 과학자들은 변수가 너무 많다거나 고려하지 못했던 변수가 발생했다고 변명한다. 자신들의 예측모형과 방식은 문제가 없는데 부수적인 것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식이다. 지은이는 과학자들의 사고방식, 기계론적이고 선형적인 사고방식이 문제라면서 예측모형 자체의 결함을 살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원자>의 지은이 마크 뷰캐넌의 관심사는 경제학 등 기존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을 밀어내고 물리학적 방식으로 인간과 사회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사회물리학’이다.
<사회적 원자>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사회를 하나의 물체에, 인간을 원자에 대입시키면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갓난 아이가 부자가 될지, 특정 기업이 얼마나 번창할지 알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집단 사이의 사건들이 모였을 때 시장의 변동, 유행, 여론의 변화 등에서 나타나는 수학적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 세상도 물질 세계 못지않게 수학적인 정확성을 가진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한다. 특히 부의 양극화 현상은 자연계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물리적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니 부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두 책은 모두 과학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인간과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에까지 나갔다. <거의 모든 것의 미래>는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히려 미래에 대한 적절한 준비와 대응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은이는 그럼에도 예측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적어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얼마나 미래 예측에 취약한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회적 원자>는 인간을 원자와 같은 수준에 놓음으로써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특권을 내려 놓을 것을 요구했다. 인간이 물질세계의 원자와 같다면 자유의지, 만물의 영장 운운하며 뻐길 일은 아닌 셈이다. (201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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