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에서 '올해의 인물'로 꼽아도 별다른 이의가 없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사진이 필요해서 구글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샌델 교수의 별명에 관한 것이다. 샌델 교수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었더니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심슨가족'(Simpsons)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검색됐다. 이건 뭔가 싶어 링크를 따라갔다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작년에 샌델의 <Justice> 원서가 처음 나온 직후 영국 가디언이 관련 기사를 게재한 모양인데 댓글에 대한 가디언의 댓글 같은 곳에서 샌델의 별명에 관해 재미나게 코멘트를 해둔 것이었다.
샌델 교수의 실물을 보지 못하신 분들은 '빵' 터지는 강도가 덜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심슨가족'을 한두번 안보신 분들은 없으실텐데 이 인물 보신 기억이 있으신가? 나도 본 기억은 있지만 누군지 잘 몰랐다. 표정을 보면 알겠지만 악역인 것은 확실하다. 설명을 보니 주인공 바트 심슨의 아빠가 다니는 직장인 원자력 발전소의 악덕 사장 몽고메리 번즈(Montgomery Burns)란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웃으시는 분들은 샌델 교수의 내한 강연을 들었거나, <정의란 무엇인가> 관련 기사를 열심히 보신 분들이거나, 인터넷에서 샌델 교수 강의 동영상을 보신 분일 것이다. 아 참! 매년 1000명씩 듣는다는 샌델 교수의 하버드 대학교 제자일 수도 있겠구나.
아직 터지지 않은 분들은 다음 사진과 비교해서 보시길 권한다. 샌델 교수가 방한했을 때 기자간담회에서 그를 실제로 봤을 때 웬지 인상이 낯이 익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이제 알게 됐다.
격주간지 '기획회의' 284호(2010.11.20)에 기고한 글을 갈무리 하려다가 사설이 길어졌다. '2010 출판계 키위드 30'의 한꼭지를 보냈는데 책이 나왔다. 기획회의는 '자기구원'을 2010 출판계 키워드 1번으로, <정의란 무엇인가> 돌풍을 2번으로 꼽았다. 자기계발서 몰락, 20대 당사자 담론 활발 등이 뒤를 이었다. 새삼 느끼지만 출판 트렌드가 세태의 흐름을 읽는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밌다.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는 최근 ‘한국의 정치철학자들, 정의란 무엇인가를 따지다’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연구소는 지난 5월 출간돼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키며 50만부 이상 팔려나간 책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이 토론회의 출발점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저자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이름을 빌려 ‘샌델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2010년 출판계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신드롬이었다. 국립국어원은 ‘신드롬(syndrome·증후군)’을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신드롬이 아닌 다음에야 인문, 그것도 철학 분야의 책이 8년 만에 처음으로 베스트셀러 목록 1위에 올라 10주 넘게 자리를 지키며 ‘전염병과 같이’ 이 사회를 휩쓸어 50만부 이상 팔려나갈 수 없다.
이것은 ‘샌델 신드롬’이었던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과거에도 샌델의 책이 번역된 적이 있었고,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 2종의 책이 더 나왔지만 아직 <정의란 무엇인가>에 미치지 못한다. 샌델의 내한 강연회 때 많은 청중들이 몰리긴 했지만 한국의 독자들은 샌델이라는 ‘저자’에 매혹됐다기 보다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 책이 도전적으로 묻고 있는 ‘정의’란 키워드에 넓고 깊게 공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정의(正義)의 정의(定義)’에 대해, 그리고 정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사람들이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질문과 회의가 이 책을 만나면서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계기를 부여받은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에서부터 용산참사, 4대강 사업, 천안함 사건까지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일어난 사건들을 한번 떠올려 보자.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법은 참으로 적절하지 않은가?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위와 같이 정의(定義)하고 끝낼 수는 없다. 정반대의 프레임이 이 책을 베스트셀러 1위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한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이 책을 2010년 CEO를 위한 여름휴가철 추천도서로 올렸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사회’를 국정의 화두로 제시했다. 아시다시피 ‘공정(公正)’은 ‘공평하고 올바르다(정의롭다)’는 뜻이다. 새로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 책이 읽고 싶어진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를 물을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책을 쓰거나 만드는 사람들은 한권의 책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을 꿈꾸면서도 겉으론 ‘한권의 책이 세상을 바꿔봐야 얼마나 바꾸겠냐’고 수줍어 한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 진지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의 선전이 눈에 띈다. 이런 흐름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순 없으나 <정의란 무엇인가>가 일종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기획회의' 284호(201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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