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의 압박, 두꺼운 책의 즐거움...

짧은 시간 내에 리뷰를 써내야 하는 입장에서 두꺼운 책은 아무래도 부담이다. 솔직히 황당하게 두꺼운 책은-최근에 나온 <앤디 워홀 일기>는 큼지막한 크기에 942쪽이었고, <생각의 역사1>(들녘)은 1239쪽이었다-물리적인 시간의 한계 때문에 일독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머릿말과 목차를 보고 읽을 부분을 골라 발췌읽기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700~800쪽 분량에다, 개인적 관심사를 다루는 흥미있는 책일 경우다. 대개 그렇듯 앞부분을 조금 읽다보면 재미를 붙이게 되고 끝까지 읽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런데 속독법의 대가가 아닌 이상 700~800쪽 짜리 책 한권을 아무리 빨리 읽더라도 필요한 시간의 절대치가 있다.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도 남아 책을 붙들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페이지 끝을 접어가면서 읽는데 한권을 모두 끝내고 나면 책의 모서리 부분이 불룩해진다. 나름 중요한 부분을 밑줄긋고 접어 놓는다고 한건데 이것도 너무 많아지면 어떤 내용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는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메모지를 갖다 놓고 중요한 표현이나 키워드를 간단히 쓰고 해당 페이지를 기록해 두는 방식이다. 눈길을 끄는 도판이 있는 페이지를 표시하는덴 포스트잇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렇게 꼬박 한권을 읽고 나면 12시가 가까운 시간이 된다. 마감은 내일 낮인데 말이다. 여기서 드는 갈등. 새벽까지 쓰고 갈까, 아니면 내일 아침에 와서 쓸까. 책을 읽어내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기 때문에 읽은 내용을 리뷰하는데 들어갈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아래 두권의 책도 그랬던 경우다. 두권 다 분량이 각주와 참고문헌 포함 800쪽이 넘는다. 첫번째의 경우는 시간에 너무 쫓겨 마감을 하다보니 매끄럽게 정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두번째는 첫번째 책의 경험이 있어선지 첫번째 보다는 고통이 덜했다. 한국전쟁을 전공한 모 교수가 다른 일로 사무실에 들렀다가 이 책을 보더니 "이 책이 번역됐나요? 매 학기 학생들에게 원서로 읽히는 책인데"라며 반색을 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데 학술적인 무게가 검증됐다는 얘기다. 그런데 책의 내용과 서술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그탓에 밤을 새야 했지만.

2005년에 번역된 앤드류 고든의 <현대일본의 역사>(이산)는 도쿠가와 시대에서부터 일본 근대의 출발이라는 메이지 유신을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 정치사의 다이나믹스를 다뤘다. 존 다우어는 앤드류 고든이 하나의 챕터로 다룬 부분을 한권의 책으로 부풀렸다. 원경과 근경에서 일본을 바라본 두 책을 함께 놓고 보면서 맥락을 이해하고 관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종전 후 일본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은 뭐니뭐니 해도 맥아더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다. 맥아더 평전은 마이클 샬러의 <더글러스 맥아더>(이매진)가 꽤 인정받는 책이다. 최근 나온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살림)(이 책 역시 1084쪽이라는 분량이 압도하지만 저널리스트 특유의 쉬운 문체인 것이 위안이다)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보여준 행위들을 고찰하면서 그를 마마보이에다 소영웅주의에 휩싸인 인물로 그렸다.

두꺼운 책의 미덕은 역시 내용을 축약하지 않고 상세하게 기술해 사안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는 것과 풍부한 자료가 동원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저자가 설정한 문제의식의 줄기가 초반에 잡힌다면 긴 글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중간에 덮는 수밖에...

전쟁의 집 - 제임스 캐럴 지음, 전일휘.추미란 옮김/동녘

　2001년 9월11일 오전 9시40분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아메리칸 항공 소속 여객기가 미국 국방부 청사인 워싱턴DC의 펜타곤으로 돌진했다. 시계를 정확히 60년 전인 1941년 9월11일로 돌리면 같은 장소에서 이 건물의 착공식이 열리고 있었다. 연면적 12만㎡에 건물 내 통로의 길이만 해도 약 28㎞인 오각형 건물. 지상 5층, 지하 2층이며 현재 2만9000여명이 근무하는 미국 국방부 청사. 이 책은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미국의 군사안보정책이 어떻게 형성됐고, 2차 대전에서부터 한국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벌인 전쟁들이 어떻게 기획·실행됐는지 '전쟁의 집' 펜타곤을 중심으로 추적했다.
　미국 대외정책·안보정책 역사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 책에선 펜타곤과 독특한 인연으로 묶여 있는 저자 제임스 캐럴의 이력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의 아버지 조지프 캐럴은 국방부 국방정보국(DIA) 창설을 주도했고 훗날 국방정보국장을 지낸 뒤 퇴역한 공군 장성이다. 제임스 캐럴은 대학 시절 ROTC에 몸담았지만 신학교로 옮겨 가톨릭 신부가 됐고, 몇년 뒤에는 사제복을 벗고 전업작가가 됐다. 펜타곤이 완공되던 1943년 1월 마지막 주에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펜타곤에 들어가 숙제를 하고 복도를 뛰어다니며 놀았던 그는 자신의 놀이터였던 펜타곤이 '모비딕'(미국 소설가 멜빌이 지은 소설에 등장하는 악마적 이미지의 거대한 흰 고래)이 돼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느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않는다.
　저자는 투철한 군인이던 아버지가 남긴 정신적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펜타곤 사람들을 덮어놓고 '전쟁광'으로 그리는 흑백논리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그가 들이대는 비판의 칼날이 무뎌보이지는 않는다. 펜타곤이라는 거대한 건물이 완공되면서 전쟁이 있어야 조직을 유지·확대할 수 있는 거대한 관료층이 형성됐고 이들은 미국 대통령조차도 쉽사리 통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됐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쳐 나간다.
　펜타곤 60년 역사를 꿰기 위해 그가 들고나온 꿰미는 펜타곤 고위 간부들이 벌였던 갈등과 고뇌, 주요 사건들이 일어난 날짜의 우연한 겹침, 그리고 핵무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제임스 만이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에서 딕 체니, 콘돌리자 라이스, 리처드 아미티지, 폴 월포위츠 등 네오콘 6명이 부시 전 대통령의 전쟁고문단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추적한 바 있지만 이 책은 등장인물의 폭을 넓혔다. 2차 대전 당시 도쿄 대공습을 이끈 전쟁 영웅 커티스 르메이, 공산주의에 대한 편집증적 공포심과 적개심으로 냉전에 대한 미국의 망상을 주조했던 초대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털, 펜타곤 건설과 원자폭탄 개발을 진두지휘한 레슬리 그로브스, 핵무기를 '절대무기'가 아닌 평범한 무기의 하나로 인식했던 폴 니체가 한쪽에 있고 핵무기가 불러올 파멸적 위험을 알아차리고 경종을 울리려 했으나 실패한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 소련 봉쇄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조지 케넌, 7년간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며 베트남전을 기획·실행했지만 훗날 열렬한 반전주의자가 된 로버트 맥나마라가 다른 한쪽에서 심연을 드러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도 빠질 수 없다.
　지은이는 펜타곤이 완공됐던 43년 1월의 마지막 1주일에 주목한다. 루스벨트는 이때 독일과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해 전쟁의 참혹함을 키웠으며, 처칠과 루스벨트는 독일 본토에 대한 공동공습을 결정했다. 이 공습은 상대국 국민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훗날 미국이 벌인 전쟁의 주요 형식인 '전략 폭격'으로 자리잡았다. 원자폭탄 연구가 본격 시작된 것도 이때다. 저자는 "9·11 테러가 대단한 변화를 보인 순간이 아니라 수십년 전부터 진행되던 미국적 변화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건에 다름아니다"라면서 펜타곤이 완공됐던 시기에 이미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틀이 총체적으로 주조됐고 이후의 역사는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구조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구조적 접근법과 행위자의 선택을 중요시하는 행위자 중심의 접근법을 동시에 시도한 것이다. 저자는 "펜타곤의 등장 이야기는 개인적인 편집증과 공적인 편집증의 결합, 심리적 압박감과 정치적 압박감의 지속적인 결합이 그 특징이며, 그것은 실체 없는 하루살이들이 영향력과 도덕적 엄숙함을 과시하면서 반복적으로 유형이 실체로 변환하는 과정이었다"면서 "역사를 만든 것은 비인격적인 힘과 인간의 선택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핵전쟁의 공포가 이 책을 쓰게 된 강력한 동기였다고 말한다. 미국이 핵개발에 나선 직접적인 계기는 나치 독일이 핵개발에 나섰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였고, 냉전시기엔 소련과의 대결이 핵무기 확장의 강력한 명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냉전이 사라지고, 나치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가 사라졌어도 미국은,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군부는 핵무기를 줄일 생각이 없다. 이제 그들은 '테러리즘'이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냈고 오히려 권한을 더욱 확대했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류를 수십번 절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녹여 보습으로 만들지 않는 한 21세기의 우리는 지난 60여년을 살았던 사람들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2009. 8.1>

패배를 껴안고 -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민음사

　1945년 8월15일 정오 일본인들은 라디오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히로히토 천황의 육성을 듣게 된다. 1억 일본인의 군주는 "일본군은 이제 무장을 해제하고 귀국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항복'이나 '패배'라는 말은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2차대전 종전을 알리는 항복 선언이었다. 아울러 히로히토는 그의 신민(臣民)에게 이렇게 명했다. "견디기 힘듦을 견디고 참을 수 없음을 참아라."
　2주쯤 지난 9월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열린 항복문서 조인식에 천황은 없었다.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 "과거의 유혈과 대학살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계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에 의한 일본 점령, 사실은 미군정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51년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연합국 총사령관에서 해임했다. 일본의 자유주의적 언론인 아사히 신문은 이튿날 '맥아더 원수를 그리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일본 국민을 바른 길로 친절하게 이끌어 준 것은 바로 맥아더 원수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52년 4월28일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5년8개월 동안의 미군 점령기가 현대 일본을 주조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군정기에 천황은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반쯤' 내려왔고, 미군정이 2주만에 초안을 잡아준 '평화헌법' 제정으로 민주주의적 정치 체제가 도입됐다. 헌법 9조의 군대 보유 금지 조항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당시 맥아더와 미국이 지녔던 '일본 개조'라는 메시아적 열망의 실상과 한계, 스스로 부과한 점령정책 전환에 따른 '역코스(reverse course)'에 대한 분석은 현대 일본 연구의 주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미국인으로서 일본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존 다우어 매사추세츠 공대(MIT) 교수가 1999년에 출간,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 책(원제 Embracing Defeat)은 기존의 연구서들과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미국에 의한 작용에 주목한 기존 연구들과 달리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 일본인들이 패배를 받아들이는 과정, 즉 내부로부터의 역동성에 주목했다.
　저자는 일본 민중들의 '상실감'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 천황제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천황과 지배층의 행태, 그리고 미군정의 정책을 대비했다.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의 작용과 반작용을 촘촘하게 동원된 사료로 잡아냈다.
　천황을 위해 최후의 1인까지 결사항전 해야 한다는 주술에 걸려 있었던 일본 대중들에게 갑작스런 패전은 존재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일본에 침략당한 나라들에 대한 죄책감 보다는 전장에 나가 있는 가족들이 자결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으며,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생계에 대한 걱정이었다. 지식인들은 군국주의에 침묵 또는 동조했다는 자괴감에서 '회한의 공동체'(마루아먀 마사오)를 구성했지만, 퇴폐와 향락에 빠져든 경우도 허다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좌파 노동운동가들은 한때 민주주의와 혁명을 꿈꾸었지만 천황제의 굴레를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층 역시 충격은 컸지만 놀랍도록 빠르게 변신했다. 죽음을 독려했던 그들 중 패전 소식에 자결한 사람은 350명에 불과했다. 패전 선언으로부터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2주간 고위층과 군 간부들은 군수품을 빼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천황은 교묘하기 짝이 없는 논리로 전쟁 책임과 도덕적 책임 모두에서 빠져나갔다. 타도의 대상 미국은 하루 아침에 숭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저자가 '패자의 내면'에 주목하는 것은 현대 일본 모델은 승자, 즉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된 게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교배에 의해 생성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모델은 전쟁 중에 그 원형이 만들어졌고 패전과 점령에 의해 강화되어 수십년간 유지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황과 맥아더는 패전과 점령의 세월 동안 양두 정치의 두 군주처럼 군림했고, 일본의 '기나긴 전후'는 89년 히로히토가 사망한 뒤에야 진정으로 막을 내렸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70여장의 사진을 비롯해 잡지와 서적, 노래 가사와 방송, 유행어와 일기, 신문 독자 투고까지 두루 섭렵한 풍부한 사료들은 추상적인 '일본'이 아닌 구체적 인간으로서 '일본인'의 내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2009. 8.15>

현대 일본의 역사 - 앤드루 고든 지음, 김우영 옮김/이산

더글러스 맥아더 - 마이클 샬러 지음, 유강은 옮김/이매진

콜디스트 윈터 -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이은진.정윤미 옮김/살림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 제임스 만 지음, 정인석.권택기 옮김/박영률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