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서경식/철수와영희)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서경식 지음, 송현숙 그림/철수와영희 |
그래서 어떤 이는 <나의 서양미술순례>, <다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시대를 건너는 법>, <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등 전작들을 통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오던 것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온 서경식을 '인식틀을 날카롭게 벼리게 해주는 숫돌'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서경식이 2006년 4월부터 2008년 3월까지 2년 동안 연구휴가를 얻어 한국에 머물면서 진행한 연속강연을 엮은 이 책 역시 우리에게'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를 경험하게 한다.
그가 택한 전략은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 등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들을 해체하고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저자는 "당연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전제를 다시 한 번 의심하고, 보다 근원적인 곳까지 내려가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 간단히 답을 얻을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며 끊임없이 묻는 것, 자신의 기존 관념을 지배에서 해방시켜 기어이 정신적 독립을 얻어 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참된 지적 태도"라고 말한다.
먼저'국민'과'국가'부터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공권력의 인권유린 사례가 드러나면"국가가 어떻게 국민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 서경식은 화자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이 문장 자체에 배제와 차별의 인식이 깔려 있다고 예리하게 짚어 낸다. 즉, 국민이 아니면 인권유린을 당해도 되느냐는 것이다. 어느 민주화 인사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자신이 겪었던 고초를 소개하며 "나는 간첩이 아닌데도 고문을 당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간첩은 고문해도 상관없고, 간첩이 아닌 사람을 고문할 때만 문제가 되는가.
이 질문은 일본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배제와 차별을 겪어야 했던 재일 조선인들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질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대한민국엔 이미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주 외국인이 살아가고 있다. 외국인 문제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거나, 혹은 정규직으로서 비정규직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당신은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부당한 대우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분노하고 규탄하는'동포애'를 발휘하지만 우리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차별은 당연하게 여기며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저자는 일본의 침략과 역사왜곡 문제만 나오면 목에 핏줄이 서는 우리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도 묻는다. 서경식이 보기에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과 국교 정상화를 할 때 베트남 전쟁에 대해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전쟁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사과한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우연히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한편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인이 흘린 피로 경제 발전의 초석을 이뤘다고 말한다. 이것을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입해보자.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이중기준을 갖고 있음이 쉽게 드러난다.
서경식은 절망스러울 정도로 답답한 일본 사회를 구원해줄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한국에서의 장기체류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현해탄 너머에서 바라봤던 조국은 민주화를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시켰고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가 하면 여성이 총리가 되는, 일본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여의 한국 체류기간에서 그는"한국은 일본 사회를 닮아가고 있으며 어떤 면에선 일본보다 앞서서 신자유주의화를 향해 치
닫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른바 한국판'시라케(しらけ)'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말 시라케는 '퇴색하다',' 빛이 바래다'라는 뜻으로서 1970년대 일본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60년대만 해도 일본에선 민주나 인간해방, 인간 평등과 같은 커다란 서사나 꿈을 추구하는 분위기였지만 70년대가 되면서 이러한 사회변혁 분위기가 무너지면서 등장한 것이 시라케 세대다. 당시 윗세대는 아랫세대에 대해"너희는 시라케 세대다"라며 비판했지만 아랫세대는 윗세대가 입으로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말들을 하면서 현실에선 너무도 쉽게 자기 정당화를 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와 커다란 서사에 대해 냉소적으로 되어 갔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우리는'정의'라든지'지식인'같은 말을 꺼내려면 왠지 모르게 겸연쩍음을 느껴야 한다. 그는 말한다. "70년대엔 민주화, 노동해방, 민족 통일이라는 꿈들, 큰 서사에 사회의 상당한 다수자들이 가치를 공유하고 우파·보수파와 맞서 싸워 왔는데 지금은 그런 대립점이 좀 애매해 졌고 모두가 '생활 보수파'가 됐다고 할까, 그런 시대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이명박 후보의 도덕적 결함을 상세하게 알면서도 압도적인 표차로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도 시라케
현상의 하나가 아닐까.
알프레드 마샬이'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을 강조했다지만 이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특히 미시에서 거시까지 전 분야에서 경쟁의 구조가 공고해진 사회에선 오히려'나'와'우리'에 대해선 한없이 따뜻하고 '너'와 '너희'에 대해선 차가워지는 것이 생존을 위한 제1의 법칙이된다. '시라케'해지는 것이 미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는"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만난 한국인들의 순수한 진보정신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면서도 "진보적인 한국 사람들마저도 여러 문제들에 대해 아직까지 기존의 사회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였다"고 지적했다. 그가 말하는 기존의 사회 통념에는 대체로 다수자의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다수자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한다는 것은 내가 나와 나의 삶의 주인공이 되기 보다는 다수자에 의해 해석되고 규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수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기 위해선 뒤집어 보기가 필요하다.
그는'생명은 선이고 죽음은 악이다'라는 도덕률이 과연 누구의 이데올로기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까지 나아간다. 대다수의 종교나 문화에서 자살은 인간이 선택해선 안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서경식은 이런 가르침에는 노동력 재생산이나 가문의 지속 등을 위해 개인의 선택을 가로막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자살을 찬미하려는 것이 아니다. 생명 그 자체까지도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고통스러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갇힌 상황보다는 강제수용소에서 해방되는 순간 자살을 한 것이야말로 인간으로 복귀했음을 뜻한다.
'희망'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자위하기도 하고, '절망하지마세요. 희망을 가지십시오'라고 다른 사람을 격려하기도 한다. 저자가 보기에 이런 말은 참혹한 현실을 바로보지 않으려는 나약함 또는 자기만족의 발로이다.
'솔직한 비관주의자'를 자처하는 저자의 말대로 오히려 "안 그렇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허망이다"라고 저항하고 충돌하는 것만이 다수자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계간 광장 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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