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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습의 시작인가, '올드 스타'들의 막간 출연인가.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는 그간 시대정신으로 군림해온 신자유주의가 바꿔놓은 세계의 일그러진 맨얼굴을 일거에 보여주었다.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근원에서부터 분석했던 선현(先賢)들을 떠올리게 했다.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제1계명인 '경쟁하라, 경쟁하라!'를 열심히 실천하던 사람들은 알토란 같이 쌓아뒀던, 그리고 한없이 부풀기만 할 것만 같았던 펀드들이 한순간에 녹아내리고 생계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9·11 테러로 무너지는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떠올렸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책으로 돈을 번 사람은 저자가 유일하다는 우스개 소리가 실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IMF 금융위기 이후 국내 출판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던 경제·경영, 자기계발서들이 지난해 하반기와 올해 상반기를 거치면서 주춤하고 있는 현상이 이의 방증이다.

돌아온 '올드 스타'들?
 대공황의 공포를 연상시키며 세계를 휩쓸었던 불길을 잡기 위한 소방수로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금리생활자들을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말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지난해 케인스주의자인 폴 크루그먼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수여하면서 케인스를 추인했다. 크루그먼은 10년전의 저작을 개정해 올해 초 내놓은 <불황의 경제학>(세종서적)에서 "대공황이 우리 할아버지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준 교훈들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가 오래전에 내놓았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위기와 무관하게 오랜 번역기간을 거쳐 지난 2월 출간된 평전 <존 메이너드 케인스>(후마니타스)은 시의적절했다.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가 문제의 근원을 궁구하기 시작했다. 케인스는 정부에 의한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제시함으로써 대공황이란 벼랑으로 내몰린 자본주의를 구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해부해 자본주의가 거대한 착취의 기제에 다름 아니며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자본주의 사상의 대표주자가 있다. 칼 마르크스다.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관심은 '복권' '열풍' 등의 제목을 단 외신을 통해 먼저 전해졌다. 유럽에서, 중국에서, 일본에서 <자본론>의 판매가 눈에 띄게 급증했다는 것이다. 정치·외교 전문지인 <포린폴리시>는 지난 5·6월호에 "경제위기가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켰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기고문을 실었다. 기고문에 인용된 독일의 한 출판업자는 "2008년에 <자본론>이 수천권 팔렸다. (책이 출간된) 100여년전에 견줄만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경찰도 외신기사를 상당히 꼼꼼히 챙겨보나 보다. 얼마 전 경찰이 서점들을 상대로 <자본론>의 매출동향을 파악하려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물론 경찰은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뗐지만 경찰 혹은 정권은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을 일단은 쓸어내려도 좋을 것 같다. 서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제위기 이후 <자본론>의 판매량이 조금 늘기는 했지만 크게 의미를 둘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지난 5월 일본을 다녀온 한 지인은 "일본의 교보문고라고 할 수 있는 키노쿠니야 서점에 갔더니 별도로 전시해놓은 문고본이나 일반단행본 중에 마르크스나 일본 68세대의 경험에 대한 해설서가 비중있게 놓여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라고 말했다.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처음 발표된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작 <게 공선>이 현대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이 이미 알려진 바 있지만, 만화판 <게 공선>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고 <자본론> 만화판도 새롭게 선을 보여 비중있게 전시되고 있더라는 것이다. 지난 7월9일~12일 열린 동경국제도서전에 갔던 국내 인문·사회 출판인들도 이같은 경향을 눈여겨 보고 돌아왔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살아있다>(후와 데쓰조), <마르크스의 역습>(미타 마사히로), <자본주의 붕괴의 수모자들>(히로시 다케시) 등이 많이 거론됐다.
 출판계에서 일본 번역서의 비중이 만만치 않음을 감안하면 이런 흐름은 조만간 반영돼 나타날 터이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을 알기 쉽게 해설한 국내저작물도 이미 속속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발간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임승수, 시대의창)은 1만부 가까이 팔렸다. 출판사 스스로 "이런 종류의 책이 1만부 가까이 팔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놀라워할 정도다. <자본론>의 모든 내용을 전달하기 보다는 잉여가치론과 같은 핵심개념들을 뽑아서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쉽다는 점이다. <자본론>을 강의하는 '원숭이 선생님'과 학생들의 대화로 구성돼 있는데 일본의 문고본들에서 본 대화체 형식과 비슷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출간 당시 "원전 <자본론>의 인기를 압도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7월에 나온 자본론 해설 또는 자본주의 비판서만 해도 여러 권이다.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강상구, 레디앙)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에 비견된다. '인류사를 뒤흔든 <자본론>을 가장 쉽게 풀어 쓴 책'을 표방한 이 책의 저자는 "전국민의 애독지 '스포츠 신문'이 경쟁상대"라고 밝힐 정도다. 저자는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살지만, 그 구조가 어떤건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왜 '호황'이었다가 감자기 '공황'이 오고 또 '불황'이 지속되는지 사람들은 평소에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알기도 쉽지 않다"면서 "<자본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이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왜 노동자는 항상 가난하고, 왜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 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왜 파업할 수밖에 없는지도, 공황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자본론>을 읽고 나면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어린왕자의 귀환>(김태권, 돌베개)은 마르크스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노동과 상품, 비교우위 등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기본원리들을 설명하고 이의 허구성을 만화로 풀어내 주목된다. 이 책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대학교지나 학술잡지, 노보 등에 연재했던 만화를 엮은 것이라고 하는데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규제철폐와 개발주의 등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전혀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번역서인 <촛불세대를 위한 반자본주의 교실>(삼천리)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원시적 축적, 제국주의 시대, 지구화 시대로 나눠 기본 개념과 구조를 설명한 뒤 반자본주의 운동의 역사, 현대 사회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의 핵심 쟁점과 운동의 주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론'보다는 '실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해'한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처럼 다양한 형식의 <자본론> 해설서들이 나오는 것은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의 시의성이 1차 이유이겠지만, 이들이 논거로 삼고 있는 <자본론>이 워낙 방대하고 어렵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변혁의 열망이 팽배했던 1980년대와 그 열기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건, 논술이 강조됐던 이후 세대이건 <자본론>이 어떤 책인지는 대강 알고 있다. 선배들과의 '학습'을 통해서건, 논술교재를 통해서건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개념을 들어본 적이 있으며 게중엔 밑줄을 쳐가며 외웠던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떠올렸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기 때문에 또다시 다이제스트를 뽑아들게 된다.
 새롭게 번역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에 대한 높은 관심도도 특기할만하다. 이 책 역시 경제위기와 무관하게 3년전부터 기획됐는데, 초판 발행 보름만에 3000권이 모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워낙 명저라는 것도 있겠지만 현재의 위기상황이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역자가 지적하듯 폴라니는 마르크스 혹은 케인스의 아류 혹은 비슷한 성향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폴라니는 시장경제라는 것 자체가 허구에 불과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역자인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중대 기로에 서 있는 현 시점에서 폴라니를 읽는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 설명한다.
 아담 스미스나 마르크스, 케인스, 하이예크 등 경제사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학자들이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시장의 존재 자체는 인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폴라니의 이런 주장이 얼마나 전복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진영이나 포스트케인지안 등 범좌파 진영, 심지어 우파 진영에서도 폴라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상당한 학술적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이 책에 대한 높은 관심은 아직은 지식사회의 테두리에 머무르고 있는듯 하다. 역자가 나선 폴라니 관련 대중강좌가 모두 성황을 이뤘다고 하니 테두리의 넓이가 조금씩 넓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폴라니가 시장경제를 묘사하기 위해 언급한 '악마의 맷돌'(새로 번역된 책에선 '사탄의 맷돌'이라고 지칭됨)이 금융위기 이후 각종 칼럼에서 빈번하게 인용된 바 있어 꼼꼼한 독자들이라면 그에 대해 궁금함을 가졌을 법도 하다. <거대한 전환>을 출간한 길을 비롯해 몇몇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이 폴라니의 다른 원전의 번역을 준비중이라고 하니 관심 있는 사람은 거장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질 것이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일본에서도 지난해에 이 책이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고 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컴백한 '올드 스타'들의 행로는 어떠할 것인가. 이들의 저작이나 이들에 관한 책이 관심을 받는 이유가 균열상이 드러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돕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맞는다면 '이해 이후의 무엇'이 중요하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점을 이해했다고 해서 취업을 걱정하고 직장에서의 퇴출을 고민하는 우리의 현실이 곧바로 바뀌지는 않는다. 한권의 책에서 그것을 요구하는 것도 터무니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현재로선 '상품'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상품의 세계에선 패스트푸드가 됐건 고급요리가 됐건 재탕이나 모방은 고객이 금방 알아챈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서툰 흉내내기는 소비자의 입맛만 버려놓아 정작 제맛을 낸 제품들을 외면받게 만들기도 한다. 본격 학술서 분야와 대중교양서 분야 모두에서 우리의 눈과 우리의 문제의식으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고 한국의 현실에 맞는 탈출구를 제시하기 위한 정교한 노력이 필요하다. 외면받던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반짝'했을 때 그 관심의 폭을 최대한 넓히고 유지하려면 당연히 필요한 노력이다. <기획회의 253호> 2009.8.5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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