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 안에 책을 보고 리뷰 기사를 써야할 때 항상 고민되는 것이 리뷰의 성격을 발췌요약형으로 갈 것이냐, 비평형으로 갈 것이냐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몰랐던 지식과 정보를 저자의 시각으로 풀어낸 것이다. 따라서 좋은 리뷰란 책이 담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적절하게 발췌요약하고, 저자의 시각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어야 한다. 이게 말로는 쉬운에 짧은 시간을 감안하면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기사를 써놓고 나서 부끄러워서 낯이 뜨거워지거나, 아쉬워서 마음이 허탈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질적인 차원에서의 애로사항도 있다.인터넷 서점이 발달하면서 출판사는 책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제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제공했던 보도자료(출판사 서평이라고 한다)를 그대로 인터넷 서점에 올린다. 그래서 속된 말로 보도자료 보고 배겼다가는 '쪽'팔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어떨땐 일부러 보도자료를 보지 않거나 보더라도 건성으로 보고 만다. 보도자료가 담고 있는 훌륭한 문구들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다.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탁신 친나왓을 세밀하게 해부한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미국과 유럽, 동아시아 강대국에 비해 다른 나라나 문화에 대한 나의 지식이 너무도 얕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구조나 정치문화가 다르다 하더라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재미난 발견이었다. 이번 책은 탁신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 탁신의 연설문이나 언론 인터뷰 문구가 곳곳에 인용돼 있는데 정치인들의 수사법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내가 잘 몰랐던 사실들 위주로 발췌요약형으로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렇게 가기엔 성이 차지 않았다. 리뷰를 쓰는 내 입장에서 재미가 덜하면 읽는 사람은 더 재미가 없다. 그래서 새벽까지 끙끙대다가,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일단 퇴근한 다음 마감하는 날 평소보다 좀 일찍 출근을 했다. 그리고 '동원과 배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체를 다시 썼다. 큰 틀에서 보자면 아래 기사도 보도자료가 설정한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나름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또 한주가 지나갔다.
-탁월한 민중들의 영웅 - 부패 정치인으로 불신
(부제에 편집부 선배가 넣은 말놀이가 숨겨져 있다. 굵게 표시된 글자를 연결해 보라.)
탁신 Thaksin - 파숙 퐁파이칫.크리스 베이커 지음, 정호재 옮김/동아시아 |
세상만사가 다 그렇겠지만 어떤 유명한 인물, 특히 유력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양면적인 경우가 많다. 한국 현대정치사만 보더라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서부터 최근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양면적인 경향을 띠는 것은 ‘동원과 배제’라는 현대 정치의 메커니즘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려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든 지지층은 동원·결집시키고 반대파는 소외·배제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물론 국면에 따라서 동원과 배제의 강도와 이에 따른 긴장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이런 ‘동원과 배제’의 프레임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정치인과 정치구도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21세기 아시아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극적인 궤적을 그렸던 인물 가운데 한명인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 탁신은 입헌군주제 및 내각책임제 국가인 태국에서 2001년 총리에 취임, 높은 지지율을 자랑하며 재선에 성공했으나 2006년 쿠데타로 실각한 뒤 현재 타국을 유랑하고 있다. 그를 해부한 <탁신-아시아에서의 정치 비즈니스>는 표지에 ‘민중의 영웅인가, 부패한 정치인인가’라는 질문을 싣고 있다. 이 질문은 탁신의 정치적 성공과 실패, 그의 퇴진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태국의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인데, 이런 질문이 으레 그러하듯 정답은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공동저자인 파숙 퐁파이칫 출라롱꼰대학교 교수는 태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크리스 베이커는 영국 태생으로 1980년 태국으로 이주해 세계에 태국을 알려온 독립 저널리스트인데 부부 사이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민중의 지도자로 등극했다.
소득과 부, 권력 편중에서 야기된 태국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민중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군부와 관료가 강세를 보였던 태국 현대 정치사에서 탁신은 분명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사관학교를 나와 경찰조직에 투신했던 탁신은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이동통신과 정보통신(IT) 분야에서 사업을 확장하던 중 1998년 타이락타이(TRT)당을 창당, 급진적인 개혁공약을 내걸어 3년 만에 집권했다. 자신을 ‘주식회사 태국의 CEO(최고경영자)’로 규정한 그의 집권기간 동안 수치로 나타나는 실적도 괜찮았다. 2004년 태국 경제는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인 6~7% 성장을 기록했고, 주가지수는 3배가량 올라갔다. TRT당은 탁신 집권기간 치러진 4번의 선거에서 태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대선이 아니라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였지만 탁신 개인의 승리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면 탁신은 누구를 동원하고, 누구를 배제했는가? 기업경영에서 홍보와 마케팅·로비의 위력을 실감한 그는 2001년 선거를 앞두고 지속적인 광고 캠페인과 언론플레이를 통해 자신을 구태의연한 정치가와 대비되는 개혁가 이미지로 포장했고 직접 유권자들과 만나 화려한 언변을 자랑했다. 그가 내세운 개혁 구호는 군부·관료 정치에 신물이 난 시민운동가·지식인·종교인 등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탁신은 집권 이후 지극히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정치와 개인 비즈니스를 구분하지 않았고, 반대파는 물리적으로 억압했으며, 비판언론을 탄압해 여론을 조작했다. 특히 ‘포브스’지의 갑부명단에 오를 정도로 천문학적인 재산과 관련된 도덕성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태국 경제의 실적이 좋아지는 사이 탁신과 탁신 가족 소유 기업들도 엄청난 이권을 챙기면서 몸집을 불려간 것이다. 그가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도화선은 가족 기업을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 싱가포르계 기업에 팔면서 세금 한푼 내지 않은 사건이었다.
개혁가, 민족주의자, 변화의 주역, 국내 자본의 수호자로서의 신뢰를 잃고 자신을 지지했던 개혁적 중산층 엘리트들이 점차 떨어져 나가자 탁신은 ‘민중’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동원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탁신은 2005년 선거에서 마을금고 확대, 저렴한 주택 공급, 낮은 세금, 건강보험을 위한 투자 확대, 신규 저리 융자, 빈곤층 아동을 위한 특별 지원금 등 저소득층을 위한 공약들을 쏟아냈다. 시골마을 곳곳을 순회했고 저소득층 근로자들과 점심을 먹으며 현장에서 민원을 해결해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2001년에 선보였던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하자”는 선거구호는 2005년 선거에서 “TRT의 심장은 인민이다”라는 격렬한 구호로 바뀌었다. 이 전략은 성공했다. 재벌 정치가가 노동자·농민 등 사회 하층 계급의 적극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반탁신 시위대 '옐로셔츠')
우리는 탁신의 정치행보를 현대 정치 문화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정치 문화의 지평에서 특수성과 보편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탁신은 기존 정치인과 관료를 구태의연하고 무능력한 세력으로, 자신을 능력있는 CEO로 각인시켰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한국의 이명박 등 ‘정통 정치인’ 출신이 아닌 지도자들에게서 유사하게 드러나는 방법이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막히자 ‘민중’과 직접 소통을 추진한 것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한국의 노무현 등을 연상시킨다. 정치와 개인 비즈니스를 구분하지 않은 채 이권 챙기기 및 이권 나눠먹기에 정치권력을 적극 활용한 것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탁신의 특징이다.
이 책은 탁신이 자서전과 연설, 인터뷰 등을 통해 쏟아낸 말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분석, 적재적소에 인용했다. 특히 재산 은닉 문제로 재판을 받던 시절 탁신이 했다는 항변은 ‘CEO정치인’이 대세가 된 시대를 살고 있는 유권자들의 뇌리에 오래 남을 만하다. “태국의 고질병을 해소하기 위해 당신은 정치인의 어떤 능력을 원합니까? 만일 미래를 위해 정치인이 반드시 청렴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가 됩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이건 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2010.10.23)
'~2010 > 구워진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꿀벌의 우화 (4) | 2010.11.03 |
---|---|
[흐름]'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 이후… (2) | 2010.10.26 |
[책vs책]<나무를 심은 사람>과 <나비문명> (0) | 2010.10.22 |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최종 갈무리 (2) | 2010.10.21 |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리포트 (2) | 2010.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