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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최종 갈무리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대해 몇차례 글을 썼고, 여기 포스팅도 했으므로 더이상 울궈낼 것도 없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발행하는  '출판문화' 10월호에 기고했던 내용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한다. 2010 프랑크푸르트여 안녕이다. 내년에도 프랑크푸르트에 가는 행운을 이어갈 수 있으려나...

디지털 시대를 사는 출판계와 도서전의 몸부림

   2009년에 이어 2010년에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방문해 취재하는 기회를 누렸다. 일간지 출판담당 기자라고 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세계 최대의 도서전’으로 불리기에 손색없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현장을 매번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은 아니므로 운이 좋았던 셈이다. 그러나 2009년 처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막연함은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특징을 개괄하고 최근의 변화상, 분위기를 소개하는 원고를 써 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2009년에 처음 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징그러울 정도로 크고, 분주하고, 복잡했다. 독자에게 책 한권을 소개하려면 최소 몇 시간이 걸리는 마당에 그토록 거대한 도서전에 모인 책들의 특징과 트렌드를 잡아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관심만큼 보인다’라면 모를까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명제가 맞는다면 2010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내가 느낄 막연함이 1년 전보다 더 적어지리라는 가능성은 애초부터 그리 높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원고청탁서의 맨 마지막에 있는, ‘현장에서 느낀 소감을 자유롭게 풀어달라’는 요청에 준거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두어야겠다.

#디지털? 디지털!

 <디지털 네이티브>(돈 탭스콧 지음·이진원 옮김·비즈니스북스)의 지은이는 1977~97년 태어난 세대를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명명했다. 인터넷 및 모바일 기기와 함께 성장해온 디지털 원주민은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부모 세대와 사고방식, 행동양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이다. 디지털 원주민에 대비되는 이전 세대는 디지털 세계로의 ‘이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며서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이 분류법에 따르자면 2010년 10월 6일부터 10일까지 열린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디지털 이주민이었을 것이다.

 전자책 담론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이 된 것으로 안다. 출판계 인사들에 따르면 전자책 담론이 등장한 이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물론이요, 각종 도서전에서 디지털을 둘러싼 화두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적은 없었다. 아날로그 시대의 총아였던 ‘디지털 이주민’ 출판계가 디지털 시대의 높은 파고에 적응하고 헤쳐나가기 위해선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이건 2009년도 그랬고, 2010년도 어김이 없었다.

 그러나 2010년은 조금 달라보였다. 내가 가진 비교근거의 빈약함을 감안하더라도 2010년은 내용과 형식 모두 디지털을 위한 도서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디지털’이라고 하면 항상 따라붙었던 물음표가 있던 자리에 느낌표가 붙었다고나 할까? 아니, 물음표를 떼고 느낌표를 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참가사의 대부분이 출판사와 출판 에이전시인 것은 여전했지만 각종 컴퓨터 프로그램 업체들, 전자책 제작 및 독서를 위한 전자기기 업체들, 소위 ‘미디어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참가가 크게 부각됐다. 출판과 연계될 수 있는 분야와 인물들이라고는 하지만 쏠림이 느껴졌다. 아니, 디지털을 빼면 변변한 화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출판전문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다룬 기사의 제목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곧 전자책(E-Book) 전시회가 될 것인가?’라고 달았다. 아이패드(iPad)와 아이북스토어(iBookstore)가 없었던 2009년엔 저작권 침해(piracy)가 디지털에 관한 주요 테마였다면, 2010년엔 전자책과 디지털이 위협보다는 기회로 여겨졌으며, 내년엔 구글이 구축중인 전자책 서점인 ‘구글 에디션’이 화두로 떠오를 것이란 이야기가 담긴 기사였다. ‘우리는 언제쯤 전자책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갖게 될 것인가?’라는 제목은 또 어떻고!

 미디어 전문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충격과 공포’라는 익숙한 수법의 예언을 내놓았다. 그는 도서전 개막과 함께 열린 전문가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디지털 혁명이 계속되면서 출판산업은 인력을 현재에 비해 40% 가량 줄여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했다. 한편, 2009년 도서전에서는 2018년이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압도할 것이라는 전문가 설문조사가 발표됐는데, 이번 도서전에선 그 시점이 더 당겨질 것이라는 전문가 코멘트가 나왔다. 익히 들어온 주문(呪文) 아닌가?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가여운 중생이여, 디지털을 믿을지어다!’

#포위된? 포위한?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최측은 출판산업과 여타 미디어산업 사이의 디지털 격차를 줄인다는 목표를 내걸고 ‘스파크(SPARK)’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선보였다. ‘핫 스팟(Hot Spot)’과 ‘스토리 드라이브(Story Drive)’가 그것이다. 그럴듯하지만 실은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컨퍼런스와 세미나, 프리젠테이션 등을 카테고리별로 분류, 지정된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개최토록 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문학·출판서비스·정보관리·교육·모바일·디바이스 등 6개 주제의 ‘뜨거운 곳(핫 스팟)’이 마련됐다. 현장에서 진행된 프리젠테이션을 몇개를 단편적으로나마 지켜봤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발표의 주체와 내용면에서 모두 ‘디지털’ 또는 ‘디지털 시대의’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스토리 드라이브는 출판사와 영화·게임 등 미디어 관계자들의 만남을 유도하기 위한 공간이었는데 이에 대해 위르겐 부스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집행위원장은 “이야기의 바다가 지닌 잠재력은 한계가 없다”면서 “테크놀로지는 단순히 운반의 도구에 불과하며 콘텐츠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영화로 제작된 판타지 소설 <잉크 하트>의 작가 코넬리아 푼케가 도서전 개막식에 초청돼 스포트 라이트를 받은 것도 주최측의 의도를 반영했다. 푼케의 신간 <레크리스>(소담주니어)는 한국에도 번역됐는데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씌였다. 아예 소설 집필과정에 영화제작자가 참여했다. 현지 언론은 친절하게도 개막식에 참석한 푼케가 영화제작 문제 때문에 곧바로 영국으로 날아갔다는 소식을 시시콜콜 전달했다.


 스토리 드라이브에 대한 주최측의 설명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지지 않는가? 쉬운 예로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모두 소설에서 출발해 영화, 게임 등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미 수차례 복습된 스토리텔링의 무한 잠재력에 대한 주최측의 강조는 좀 애처로워 보인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전자출판과 전자책 담론에 무분별하게 휩쓸려가면서 불안해하던 출판계가 스토리텔링이라는 본연의 장점을 재발견한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디지털 시대를 맞아 돌파구를 찾으려던 출판계의 노력은 그리 큰 진전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한편으론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최측이 디지털에 대해 보여준 열망 또는 강박은 출판산업의 권력, 특히 자본력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에 관한 단서를 보여준다. 주최측으로서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유인요소가 떨어지면서 참가를 꺼리는 출판사들을 대신해 도서전의 방대한 부스를 채워줄 새 주인공으로 등장한 전자출판 관련 업체들이 반가웠을 것이다. 도서전 기간 동안 매일 발행돼 무료로 뿌려진 ‘Fair Dealer’, ‘The Bookseller Daily at Frankfurt’, ‘Publishing Perspectives SHOW DAILY’ 등 출판전문지들의 특별판에도 힌트가 숨겨져 있었다. 광고의 상당수가 출판 관련 인터넷·전자기기업체들의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출판계가 디지털에 포위당했다는 것은 새삼 입에 올리기 민망할 정도로 다 아는 얘기다. ‘포위-포위당함’의 도식에서는 당연히 디지털이 주체이고 출판이 객체이다. 그런데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최측은 이런 도식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복을 시도했다. 출판 스스로가 디지털로 전환하면 ‘디지털 주체’와 ‘출판 객체’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포위-포위당함’이라는 도식도 허물어진다. 이런 깨달음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이런 판단에서 나온 전략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지금의 내 역량으로는 버거운 주제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워 보였다.

#노벨 문학상과 주빈국에 대한 단상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매년 10월 초순에 열리는데 공교롭게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와 시기가 겹치는 경우가 많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내로라 하는 작가들을 초청해 기자회견, 대담, 독자와의 만남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 해당자가 도서전 참가를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체류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난해의 경우 도서전 개막전에 수상자가 발표됐다. 그래서 수상자 헤르타 뮐러가 도서전에서 독일 방송과 한 공개대담을 취재해 기사로 썼었다.


 올해 도서전을 취재하기 위해 출국하기 전 온라인 도박배팅 전문 사이트인 ‘래드브룩스닷컴’에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군의 상위에 랭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고 시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더 높게 점쳐지면서 한국은 후끈 달아올랐다. 고 시인이 수상하면 수상하는대로, 다른 작가가 수상하면 하는대로 후속취재를 하기 위해 대기를 했지만 아는대로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수상자로 발표됐다. 도서전에 와 있던 전세계 취재진은 요사의 작품을 출판한 독일 출판사 부스로 우르르 몰려갔다. 일단 요사가 도서전에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 다음 나는 ‘페루관’을 찾아갔다. 그들의 자축분위기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페루관’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두개의 부스가 붙어 있었는데 하나는 페루 수도 리마에서 온 출판사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남미작가연합’이 마련한 공동부스였다.

 물론 다른 페루 출판사들이 페루관이 아닌 다른 곳에 부스를 차렸을 수 있다. 하지만 ‘페루관’으로 지정된 곳이 규모가 그러할진대 전체 참가사의 규모는 매우 적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배출이 큰 경사인 것은 맞지만, 이것에 너무 목을 메는 분위기는 적잖이 불편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작고 초라한 페루관을 떠나, 2005년 주빈국으로 초청됐었고, 2010년엔 220평방미터 규모로 깔끔하게 부스를 꾸민 한국관으로 돌아오면서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2010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렸다. 올해 주빈국은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 문학과 출판에 관한 내 관심과 지식의 짧음을 감안하더라도 2010년 주빈국에 대한 주최측 및 참가자들의 배려와 관심도, 주빈국의 열의도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안하게도 그래서 별로 할 말이 없다. 2009년 주빈국 중국이 인적·물적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고, 현지 언론의 관심도 대단했던 것에 비하면 크게 대조적이었다. 그나저나 2011년엔 아이슬란드가 주빈국이라는데, ‘주머니’와 ‘책가방’이 모두 빵빵한 주빈국을 모시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라고 해서 다음 주빈국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는 서울국제도서전의 처지와 별 차이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문화] 201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