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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리뷰]글로벌 위험사회 vs. 이성적 낙관주의자

이처럼 짝으로 세울 수 있는 책들이 간발의 시차를 두고 출판돼 나오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데 뒤에 짝이 될만한 책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채 한권을 소개하고 나면 다음 책을 소개하기가 좀 머쓱한 상황이 되곤 한다. <이성적 낙관주의자>가 먼저 나왔는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 가운데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 리뷰로 소개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울리히 벡의 신작이 나왔는데 맞세우면 요지가 극명하게 대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두권의 책은 펼치는 담론이 같은 층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벡의 경우 현상 분석을 하기보다는 추세를 보고 사회학적 추상화의 작업을 하고 있다. 그에 비해 매트 리들리는 저널리스틱한 분석을 했다. 또한 생물학을 베이스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둘을 붙여보았는데 이런 글의 성격상 약간의 비약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심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책 vs 책]‘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불안과 희망의 엇갈린 메시지
-“글로벌 리스크 방치땐 위험… 세계 공동 노력으로 통제해야”
-“인류 삶의 질 높아지는 추세… 문제 잘 해결하고 번영할 것”

글로벌 위험사회 - 10점
울리히 벡 지음, 박미애.이진우 옮김/길
이성적 낙관주의자 - 10점
매트 리들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인식 해제/김영사

현대인은 불안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불안과 희망은 때로는 개인 차원을 넘어선다. 시시각각으로 전해지는 테러·재해·기상이변·경제위기 등에 관한 뉴스는 ‘내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인류가 존재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실제로 희망을 가득 안고 있거나, 적당히 둔감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는 최악의 원자력발전소 사고인 체르노빌 사건이 일어난 1986년 <위험사회>란 책을 발간함으로써 단박에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키워드를 만들어낸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2007년에 쓴 것이다.

제목에서 예상되듯 <위험사회>에서 제시한 담론을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 심화시켰다. 지난 20여년 사이 세계는 훨씬 더 글로벌해졌고, 위험도 개별 국민국가 차원으로는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화됐기 때문이다. 벡이 말하는 위험사회론의 핵심은 현대가 만들어낸 리스크를 세계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리스크는 위치와 장소를 규정할 수 없고, 결과를 추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영국 동물학자 매트 리들리가 쓴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울리히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의 주요 징후로 들고 있는 테러·온난화·경제위기·빈곤 등에 대해 정반대 입장에 서 있다. 인류절멸을 예언한 비관론은 항상 존재했지만 인류는 절멸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구촌 최대 이슈인 지구온난화에 관한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의 주장을 ‘상업주의’로 몰아붙인다. 지난 10만년 동안의 인류 역사가 번영으로 수놓아졌듯 100년 후 인류는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지금보다 더 잘살고 있으리라는 것이 리들리의 믿음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로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다른 동물과 달리 교환하고, 전문화하고, 분업함으로써 ‘집단지능’을 창조했다는 점을 꼽는다. 그는 각종 통계수치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낙관주의를 ‘이성적’이라고 자신한다.

벡이 보기에 리들리의 낙관주의는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현대인의 전형적인 반응 가운데 하나인 ‘부정’에 해당한다. 이는 예견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현대사회에 상존하는 위험의 속성을 외면하는 태도다. 그러나 리들리는 <이성적 낙관주의자> 초반부터 반격을 늘어놓았다. 기대수명·실질소득·재해 등 어떤 면으로 봐도 인간사회는 현대로 올수록 덜 위험해지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렇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삶의 질’이 높아지는 추세이고, 생명과 건강을 해치는 위험도 줄어들었다.

벡은 위험의 개념을 세분화함으로써 리들리 식의 반박에 대처했다. 기아·질병·전염병·자연재해 등 ‘외부적 위험(danger)’과 기후변화·금융위기·테러와 같이 인류가 만들어낸 ‘내재적 위험(risk)’을 구분한 것이다. 위험사회론에서 말하는 위험은 바로 후자인데, 이것은 현대사회가 성공했기에 생겨났다. 냄새도 없고 타지도 않는 무독의 화학물질 프레온 가스가 피부암을 유발하는 오존층 손상이라는 전혀 의도치 않았던 위험으로 이어졌듯 리들리가 찬양해마지 않는 현대문명의 업적이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위험성을 강조한 것으로 끝났다면 위험사회론은 수많은 비관론의 한 버전에 불과했을 것이다. 벡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글로벌 리스크가 가진 ‘계몽’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글로벌 리스크를 인류가 인정한다면 이 리스크를 ‘변형’하고자 하는 공동의 노력과 결속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벡이 바라는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론을 염세주의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기획으로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벡과 전혀 다른 차원에 서 있는 리들리는 결론에서도 갈라진다. 아마도 리들리가 벡을 만난다면 “별걱정 다 하시네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리들리의 신념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벡이 말한 종류의 대처를 하고 있거나 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자, 누구의 말이 더 그럴듯해 보이는가? (201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