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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과 사람

[인터뷰]만화가 박건웅

이 작품을 박건웅 작가에게 그리라고 권유한 사람은 보리출판사의 윤구병 대표라고 한다. 2년 정도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선이 강해서 보는 사람에 따라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윤구병 대표는 박 작가에게 "피카소가 게르니카라는 작품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는데, 당신은 수백, 수천컷이 게르니카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극적인 제목과 달리 내용은 의외로 담담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박 작가는 원래 제목을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몇가지 다른 아이디어들도 있었고. 그런데 윤구병 대표가 이걸 뒤집고 '나는 공산주의자다'란 제목을 내놓고는 밀어부쳤다고 한다. 그게 허영철이라는 개인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므로 정직하게 내보이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사실 이 만화책에는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어가는 과정은 간략하게 그린다. 원제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처럼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았던 한 개인의 사연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허영철씨 회고록'을 만화책으로 펴낸 박건웅씨
나는 공산주의자다 1 - 10점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보리
나는 공산주의자다 2 - 10점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보리

박건웅씨(38)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들에 천착해온 만화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인 노근리 사건(<노근리 이야기>), 빨치산 무장 유격투쟁과 장기수(<꽃>) 등의 소재가 박씨의 손을 통해 만화로 태어났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만화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2년여의 작업 끝에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옹(90)의 회고록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보리)를 <나는 공산주의자다>(보리)라는 제목의 만화책 2권으로 펴낸 박씨를 어린이날을 즐기려는 상춘객으로 발디딜 틈 없는 인사동에서 만났다.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꽃>의 모티프가 장기수였는데 책이나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지식을 가지고 그렸거든요. 추상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장기수의 구체적인 삶을 그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꽃>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박씨는 <꽃>을 거칠고 투박한 목판화 느낌으로 그렸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같은 기법을 사용했다. <꽃>은 여러 색채가 사용되고 대사가 전혀 없는 대신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흑백에 대사가 등장한다는 차이가 있다. “근대 초기에 나온 판화 작품들을 많이 참고했고 당시의 인쇄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묻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주인공 허씨는 192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철이 들 무렵 고향을 떠나 노동자로 일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해방 뒤 남로당에 입당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안과 황해도 장풍군에서 각각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전투에도 참가했다. 54년 8월 공작원으로 남파된 허씨는 이듬해 7월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정부 당국과 가족·친지의 ‘전향’ 권유를 끝내 거부한 허씨는 36년을 교도소에서 지내고 마침내 91년 2월 출감했다. 현재 고향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허씨는 여전히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들에 관한 이야기는 자칫 비분강개 혹은 신파조로 흐르거나, 선동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소재 자체가 자극적인 탓이다. 그러나 박씨의 작품은 독자가 이런 느낌 없이 현대사를 차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소재와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 것이 돋보인다.
박씨는 대학시절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위력을 상실한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허씨의 고집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을까. “불편한 면이 없지는 않았죠.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니까요. 반대로 미국을 숭상하는 노인들도 계시잖아요. 그분들의 삶도 역사죠.” 원작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36년 감옥생활을 대폭 줄이는 대신 허씨가 감옥에 가게 된 인생역정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도 ‘역사’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박씨에게 역사에 매달리는 이유를 물었다. “예전에 어느 일본 학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신들은 근·현대사에 소재가 무궁무진한데 왜 그리지 않느냐’고 비판을 하더군요. 작가들은 저마다 세상과 만나고 소통하고 싶어합니다. 묻힐뻔한 근·현대사 이면의 이야기들을 단순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만화의 형식으로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201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