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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동네산책

[책동네 산책]출판계여, 시국에 언제까지 침묵할 텐가

이 글에서 인용한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의 글이 출판계 내부에서 설왕설래를 낳고 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지인들이 전화를 걸어와서 "그러다 당신 잡혀 가는 것 아니냐"며 걱정들을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농담 섞인 이야기이겠지만 농담으로라도 섬뜩한 얘기 아닌가. 2010년 대한민국은 이런 사회이다. 혹독했던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바야흐로 대자보와 격문의 시대다. 작가들의 ‘저항의 글쓰기’ 선언이 있는가 하면, 대학생들의 ‘대학을 거부한다’는 대자보도 이어지고 있다. ‘4대강 사업에 반대한다’는 성명이 각계에서 쏟아지고 있다.
급기야는 출판계에서도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출판전문 격주간지 ‘기획회의’ 최근호(269호)에 실린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의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에서다. 대자보와 격문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담는 게 보통이지만 김 대표의 글은 대상이 다르다. 편지글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들’보다는 출판계 내부를 향하고 있다.
단행본 출판사들의 모임인 한국출판인회의 한철희 대표 앞으로 보낸 글에서 김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다시 문화에 대한 검열을 시작했고, 이념으로 편을 가르고 있으며, 비상식을 상식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폭력이 비폭력을 다스릴 거라 믿고, 더 강한 공권력이 시민의 복종을 유도할 것이며, 책과 영화와 그림은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의 선진화를 위해 필요한 선전에 복무해야 한다는 믿음이 사회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지요. 시민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치고, 작가는 불법시위 불참을 선언하고, 영화인들은 자숙을 고백해야 하는 사회가 다시 온 것입니다.’
김 대표는 그러면서 문화예술위원회가 보조금 지급 대가로 ‘시위 불참 확인서’를 요청했을 때, 영화진흥위원회의 영상미디어센터·독립영화전용관 장악이 논란이 됐을 때 출판인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지난해 국회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를 항의하는 전 문화인 성명서가 발표될 때 한국출판인회의가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단체 이름으로 참여하기를 보류했던 것 역시 자탄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여러 책에 자주 인용된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천주교인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인이었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김 대표가 쓴 편지글이 이 시를 길게 풀어쓴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안타까운 것은 김 대표의 상황인식이 특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석에서 만나는 출판인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현 정부가 아파할 사안을 다루는 책을 출판하려면 왠지 모를 공포를 억눌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는 출판계 사정설까지 나오는 판이다.
그럼에도 출판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므로,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나는 천주교인이 아니므로 침묵했던 시 속의 주인공처럼 침묵하며 개별 참호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 참호 속에 숨어 포연이 지나가길 기다리고픈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건 본능이니까. 그런데 김 대표가 물었듯 ‘작가가 사라지고 영화인이 사라지고 시민이 사라지고, 급기야 독자가 사라진 다음’에 참호에서 나온 출판인에게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201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