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구워진 글

[리뷰]새로운 빈곤

소비자 사회는 ‘빈곤층’을 버렸다
새로운 빈곤 - 10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천지인

한반도 대운하나 4대강 사업과 관련해 자주 거론됐던 것 가운데 ‘취업유발계수’란 게 있다. 정부나 기업이 10억원을 투자했을 때 늘어나는 취업자 수를 말한다. 취업유발계수란 개념은 투자가 많이 될수록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이 개념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툭하면 ‘얼마를 투자했으니 일자리가 늘어나고 경제가 얼마만큼 성장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수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제 기업의 대규모 투자는 십중팔구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하도록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 ‘피고용자 대규모 해고계획’에 다름 아닌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면 그 회사의 주가는 되레 올라가고 ‘시장’의 갈채를 받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업이 투자를 늘릴수록 일자리가 줄어든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빈곤이 늘어나는 모습은 역설이 아니라 정상이 돼버렸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에서 탈근대 사회의 인간의 모습을 쓰레기에 비유했던 지은이는 노동과 소비주의, 빈곤이라는 키워드로 현대 사회를 고찰한 이 책 <새로운 빈곤>(원제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에서도 쓰레기의 비유를 그대로 이어갔다. 소비자 사회에서 ‘실업자=빈곤층’은 잉여인간, 쓰레기에 다름 아니며 배제와 격리의 대상일 뿐 설 자리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빈곤층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했고 빈곤층이 대접받는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로 일컬어지는 근대 사회에선 ‘예비 노동자’로서의 지위나마 주어졌다. 노동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했던 이 시대엔 ‘일을 하라’는 명령이 빈곤층에 주어졌다. 빈곤층은 공장노동을 통해 규범에 복종하고 훈련된 행동을 하는 습관을 교육받으며 근대사회에 편입됐다. 자본주의 반대세력 역시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고 외치며 노동을 신성시했다. ‘노동’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개인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이라는 ‘노동윤리’의 표현이었다. 보편적 고용 혹은 완전고용은 아직 달성되지 않았지만 근대 사회의 노동윤리는 이것이 이뤄지리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기준에 비춰볼 때 일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실업은 비정상, 규범의 위반이었다.
그러나 탈근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은 더이상 일하는 삶이 아니다. 노동이 있던 자리는 소비가 대체했다. 즉 ‘생산자 사회’가 ‘소비자 사회’가 됐다. 근대는 노동이 사회구성의 원리였지만 오늘날의 사회가 구성원에게 내세우는 규범은 소비다. 현대 사회에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비자 노릇을 해내는 사람이 정상인 대접을 받는다.
지은이가 현대 사회의 빈곤층을 ‘신빈곤층’이라고 지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실직은 비정상적 상태가 아니라 ‘잉여’ 즉 남아도는 쓰레기 그 자체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더이상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빈곤층은 처음부터 예비 노동력으로서의 역할조차 주어지지 않고 소비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빈곤층은 ‘실업자’가 아니라 ‘비소비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빈곤층에 주어진 공간은 쓰레기장이다. 과거엔 잉여 노동력의 수출을 통해 인간 쓰레기를 처리하곤 했지만 세계화 시대엔 이런 방법조차 폐기됐다. 신빈곤층이 야기할 위험을 제거하는 방식은 새롭고도 안전한 쓰레기 하치장을 만드는 것이다. 과거 ‘사회문제’로 취급되던 것들이 이제는 ‘범죄’의 차원으로 접근된다. 알코올 중독자와 노숙자, 불법 이민자, 학교 중퇴자, 미혼모는 각자 다양한 내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한묶음으로 묶여 교도소로, 수용소로 보내진다. 과거 교도소와 수용소의 목표는 이들을 교화시켜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한 격리와 배제의 임무가 주어졌다.
빈곤층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힘을 결집시켜 내가 설 자리를 달라고 할 수 있지 않으냐고? 과거 그랬던 적이 실제로 있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 만개했던 복지국가가 그랬다. 잘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주는 압박, 사회 불평등의 혹독한 징후들을 완화함으로써 사회 불평등의 원리를 재천명해야 하는 필요성 등 여러 이질적인 요인에 의해 복지국가가 출현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복지국가의 성공은 복지국가의 쇠퇴를 불러왔다.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사다리를 타고 높은 자리에 먼저 올라간 사람들은 더이상 그 사다리가 쓸모없다면서 치워버리자고 선언한 것이다. 그 다음은 우리가 익히 알듯 신자유주의 시장만능 사회의 도래였다. 이제 빈곤층을 위한 정치적 전망도, 정치적 전망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정치적 기구도 없다.
현대 사회의 작동 원리를 극도로 암울하게 그린 지은이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는 책 말미에 소득 자격과 소득 확보 능력의 분리를 언급한다. 노동 자체와 노동시장을 분리시키자는 논리인데 짤막하게 암시할 뿐 상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책의 미덕은 대안제시보다는 현상 분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010.3.27>

'~2010 > 구워진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제인 구달 평전  (7) 2010.04.09
[리뷰]능지처참  (0) 2010.04.08
[리뷰]새로운 빈곤  (4) 2010.04.08
[리뷰]정치를 말하다  (2) 2010.04.08
[서평]미국 외교의 역사  (0) 2010.03.16
[서평]세계금융위기 이후  (0) 2010.03.08
  • 딸기21 2010.04.10 16:20 신고

    이 책 읽으려고 출장때 가져갔는데 못읽었어. 먼저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를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지롤같아서(함규진 번역자 책은 예전에도 읽은 적 있고 꽤 괜찮았는데 이 책에선 바우만한테 눌려서 직역하느라고 다 말아먹은 느낌) 바우만 책을 더 읽을 마음이 사라지고 있어...

  • 까만주름 2010.04.12 10:35 신고

    험... <유동하는 공포>는 지난해에 김진우 선배가 리뷰를 썼는데 상당히 애를 먹으며 읽고 쓰시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제게 바우만은 '어려운 작가'라는 이미지가 강했었죠. 이번책은 제가 읽은 첫 책인데 예상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바우만의 지난 논의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지난번 고진 책도 그렇고, 책 담당 좀 하다보니 '입문서 골라잡기' 선수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ㅎㅎㅎ

    근데 고진도 그렇고 바우만도 그렇지만 좌파 이론가들의 책이 쌓여갈수록 현실에 대한 고찰은 깊어가는 것 같은데 허기도 지울 수 없습니다. 미래는 누가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라서 그럴까요?

  • 김홍식 2011.01.01 10:49

    잘 읽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일부 담고 있는 책을 번역 중입니다. 검색하다가 찾게 되었지요. 제 블로그로 일부 스크랩해둡니다. :-)

    • 까만주름 2011.01.02 13:47 신고

      어이쿠!!! 번역가시라면 전문가이신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격이 아닌가 싶어서 후덜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