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책과 사람

'말단노동 잔혹사' 당당하게 담아낸 '사회 초짜'

유재인씨이 책이 배달돼 오자마자 다른 책과 달리 유달리 저자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톡톡튀는 문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겉으론 냉소적이고 심드렁해 보이지만 속으로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사실 안그런 사람 없겠지만-그렇다고 속내를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는 듯한 문체였다. 이런 필자는 지면에서 정식으로 '데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새침한 친구였다. 기사 말미에도 썼지만 새로운 에세이스트로서 성장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앞으로도 어깨에 힘빼고 좋은 글들을 써주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말단노동 잔혹사’ 당당하게 담아낸 ‘사회 초짜’
-‘3년 백수’ 끝 공기업 입사 유재인씨, 에세이집 출간 화제

위풍당당 개청춘 - 10점
유재인 지음/이순(웅진)

유재인씨(28)는 공기업에 다닌다. 명문대 반열에 드는 대학을 졸업하고 꼬박 3년간 취업준비생, 다시 말해 백수로 빌빌대다가 입사했다.
모두가 선망한다는 공기업이지만 그가 맡은 일은 말단 행정직. 기안문서의 첫 문장 들여쓰기는 3칸, ‘첨부’의 폰트는 ‘제목’의 폰트와 같은 것으로 등등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대한민국이 걱정하는 ‘문제적 세대’에 속하는 그는 최근 펴낸 에세이집 <위풍당당 개청춘>에서 ‘대한민국 20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 잔혹사’를 코믹하면서도 우울하게 그려냈다.
백수 생활에서부터 입사, 무한반복되는 ‘행정’과 조직의 모순, 신혼 생활까지 유씨가 쓴 200자 원고지 10장 내외로 써내려간 에세이들은 적나라하다. 눈칫밥 생활 3년 만에 하찮은 기안만 작성하고 하찮은 계약만 하면 힘들지 않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기 세금계산서를 누락시켰다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적도 있다. 노조 집행부로서 첫 회의에 참석해 ‘왜 비정규직 문제는 다루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이번 집행부는 초짜가 많아서 노조가 힘들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등장 인물들이 팀장·차장·부장 등으로 호명돼 있지만 워낙 적나라해서 회사에 알려지는 게 걱정되지는 않느냐고 물어봤다. “부담은 있었지만 제 책에 등장하는 그런 분들이 다른 회사에도 다들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글엔 전반적으로 냉소가 흐른다. 하지만 이 냉소는 자타가 공인하는 정처없는 세대로서의 방어막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자신의 세대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고 주문한 책에 대해 “우린 그딴 식으로 안하는데요”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들은 ‘신자유주의가 왜 나쁜지를 책으로 배웠던 선배들’과 달리 기안문서의 폰트와 서체에 영혼을 혹사시키면서 신자유주의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반미는 모르지만 ‘불온한 쇠고기는 안먹을래’라면서 촛불 들고 일어서는 게 자신들이라는 거다. 유씨는 이른바 ‘20대 논객’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동세대에 대해서도 “대다수 20대와 달리 진짜 특이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20대는 취직하기 전엔 취직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저도 그랬어요. 사회의 어떤 부분을 바꿔야지라는 생각이 든 건 백수로 살 때가 아니고 오히려 취직하고 난 뒤였어요.”
백수 초년 시절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회에 내던져지자 작은 부조리조차 바꾸기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유씨는 ‘그러나 난 아직 20대’라고 다짐했다. 그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믿기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밤하늘의 별보다 더 촘촘하다”고 말했다. 속도감 있게 튀는 문체와 달리 새침해 보이는 유씨. 이상과 현실, 직장과 개인, 일과 생활 사이를 빗질해 솔깃한 얘깃거리를 끄집어내는 새로운 에세이스트가 막 세상에 등장했다. <201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