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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휘뚜루마뚜루

기억살인-아들님이 생애 최초로 쓴 소설

기억살인

 

김선호

 

#1

그 초밥집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차올랐다. 부장으로 승진 했다는 성취감, 몇 년 동안의 노력이 이렇게 나에게 찾아 왔다는 뿌듯함, 그리고 아내와 이렇게 휴일을 같이 보낼 수 있다는 기쁨이 제일 컸다.

, 얼마나 힘든 나날이었는가!

지난 20년 동안은 일만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상사에게, 또 회사한테 인정받기 위해 다른 일들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나를 믿어주고 배려해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또 미안했다.

20년 동안 수고 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오늘은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기로 했다. 장소는 직장 동료가 휴일에는 아내와 함께 가보라고 극찬한 초밥집이였다. 젊은 청년이 하는 집인데 맛이 일품이라고 침이 튈 정도로 추천했다.

어서 오십시오!”

초밥 집에 들어서자 주방에서 한 청년이 우렁차게 외쳤다. 다른 종업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가 사장일 가능성이 컸다.

세 사람이 먼저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나 다른 사람은 없고 작고 아담한 가게여서 우리 부부같이 조용한 사람들이 식사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일반적인 초밥 집보다는 가격이 싼 편이였다. 잠시 고민을 하다 특초밥 세트를 주문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몇 분을 기다리자 그 청년이 우리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와서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와 아내는 초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가슴 한구석에서 뭉클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내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그런데 주인이 되게 젊네.”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는 그를 보았다. 아무리 잘 쳐줘도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우리 아들이랑 비슷한 나이일텐데.

일을 다 끝냈는지 그는 우리의 옆 테이블에 앉아 땀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가슴에 걸려 있는 배지에 김호연이라고 적혀 있었다.

초밥이 참 맛있네요.” 아내가 그를 향해 말했다.

, 네 감사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내가 호기심이 들어 물었다.

힘들긴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요리를 하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돈이 필요하기도 해서요.”

호연은 어릴 때 부모님을 잃어버려 고아원에서 생활 했다고 한다. 최근에 고아원에 들어오는 후원금이 줄어들어 생활하기 어려워지자 지인에게 가게를 물려받아 후원금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호연을 보고 있자니 우리 아들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랑 같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지금도 소름이 돋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떨쳐 내자.

우리는 자식이 없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신기하네.” 아내가 말했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자, 왜 쓸 때 없는 이야기를 하고 그래.”

나는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고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려고 할 때 그가 배웅을 나왔다. 다음에 또 온다고 말하고 가려고 했다. 그 순간 호연이 식당으로 들어오려는 사람과 부딪혀 휘청했다. 잠깐 동안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올라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이마에 선명하게 나 있는 흉터 자국을.

 



#2

민호는 우리의 보물이었다. 민호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부부의 큰 행복이었다. 내가 회사일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민호만 보면 모든 피로가 가셨다.

민호는 웃음이 많고 활동적인 아이였다. 앉아 있기보다는 서 있는 것을 좋아했고, 걷기보다는 뛰어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성격이 민호에게 화를 불러왔다. 민호가 4살 무렵이었다. 내가 해외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던 날, 아내와 민호가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 며칠 동안 보지 못한 아빠를 보고 반가웠던 것인지 민호는 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 순간이었다. 민호의 이마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생기는 것은.

어린아이로서는 힘든 수술이었는데 민호는 다시 밝고 활기찬 아이로 돌아 왔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그것이 우리 부부에게 아주 큰 위안이 되었다. 흉터도 앞머리를 내리면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 때 가끔 보이는 민호 이마의 상처는 마음 한구석을 후벼 팠다.

하지만 신이 우리 가족에게 내린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

민호의 다섯 번째 생일 날, 우리 가족은 축하하기 위해 놀이공원을 찾았다. 민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했다. 회사일 때문에 휴일에도 쉬기 어려웠지만 민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역시 시간을 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날이었다. 민호의 이마에 흉터가 생긴 이후 처음 느끼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민호가 웃을 때마다 나의 스트레스는 날아가는 듯 했다.

이른 아침부터 바이킹과 회전목마, 후룸라이드를 타고 점심으로 돈가스를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민호가 가자고 졸라 댔던 범퍼카를 타기로 했다. 그날이 주말이고 범퍼카가 아이들에게 워낙 인기 있는 놀이기구여서인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다른 곳보다 많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상사의 전화였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이 전화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말하고 조용하게 통화할 만한 곳을 찾아 줄에서 빠져나왔다.

 

만약 그때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더라면?

만약 그날이 주말이 아니었더라면?

아니면 만약 범퍼카를 타기로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것 보다 전화통화가 길어졌고, 통화를 마치자마자 급히 돌아왔다. 아내와 민호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찾던 도중 바닥에 주저 않아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나는 불안한 느낌이 들어 급히 달려 왔다.

왜 그래, 민호는 어디 있어?”

민호 손을 잡고기다리다가사람들한테 밀려서.”

?!”

찾아 다녔는데찾아 다녔는데.”

그 날, 나는 미친놈처럼 민호를 찾아 다녔다. 놀이공원의 미아보호소를 수백 번 들락거리고, 놀이공원 관리소에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헤집고 다녔다. 놀이공원이 폐장한 이후에도 주변을 수십 번은 돌았다.

 

첫 번째 주에는 놀이공원 경비가 나를 쫓아낼 때까지 찾아다녔다.

 

두 번째 주에는 경찰서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112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가 짜증낼 때까지 전화했다.

 

세 번째 주에는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고 눈앞이 헤롱거릴 정도로 인터넷을 뒤졌다.

네 번째 주까지도 회사에 가지 않았다.

 

네 번째 주의 마지막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만약 다음 주에도 회사에 나오지 않으면 퇴사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에 있었던 무언가가 끊어졌다.

 



#4

다시 회사에 나갔다. 상사의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했다. 민호의 생일로부터 6개월쯤 지났을 즈음, 겉으로 비춰지는 나의 일상은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민호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정신병 환자처럼 행동했다. 발작을 일으키고, 매일 밤 민호를 부르며 통곡하다 정신을 잃었다. 밥도 먹지 않아 초췌해졌다.

민호를 찾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아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아내는 민호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담요로 감싸 안고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인형을 뺐으면 울면서 나한테 매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민호를 부르며 민호랑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내의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회사일도 만만치 않은데 아내까지 신경을 쓰려니 내 눈에서 다크서클이 사라질 새가 없었다.

하루는 회사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던 중 전화가 왔다. 오랜 친구 녀석이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다며 나오라는 것이었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잠시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가보기로 했다.

동창모임에 나온 친구들은 회사 얘기, 가족 얘기, 승용차 얘기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며 술을 마셨다. 한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꽤 친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연락이 끊겼던 친구였다. 그는 사람의 뇌에 전자기적인 자극을 주어 무엇이든 그것에 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았다. 무슨 SF소설도 아니고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가 꽤 술에 꽤 취한 상태라는 것도 그의 말을 흘러듣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현듯 아내가 생각이 났다.

 

만약 정말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아내를 민호의 기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면?

그 후 동창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정신은 온통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쏠려 있었다.

 

동창모임 바로 다음 날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 네가 전화하다니 별일인데?”

기억정말 지울 수 있는 거 맞아?”

?”

동창회에서 네가 그랬잖아.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내가정말로 그런 말을 했냐?” 그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나왔다.

아니야?”

그것보다, 그런데, 너 말고 내 말을 믿은 사람이 있어?”

다들 안 믿는 눈치던데.”

침묵이 이어졌다. 숨을 가다듬는 듯 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 그럼 됐어. 그리고기억은 지울 수 있어불법이긴 하지만.”

불법이란 말에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정말 지울 수 있어?”

그럼! 우리 조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줬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지울 수 있어?”

사물, 사건, 인물,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 상관없어.”

부작용은?”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없어. 그래서 너의 문제는 뭔데?”

나는 민호와 내 아내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니까, 네 아내가 아들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니 그 기억을 지워 달라?” , 그런 셈이지.”

, 역시,”

역시라니?”

우리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오는 사람은 대부분 과거의 실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거든.”

잔말 말고. 그래서 지우려는 데 얼마나 들어?”

그건 기억이 얼마나 방대한지에 따라 다른데. 그런데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인물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제일 복잡해. 네가 말하는 데로 아내의 기억에 서 네 아들의 기억을 지우면 아들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기억에 모순이 생기지 않게 네 아내의 삶을 통제해야 하고.”

……

여보세요?”

그럼 좀 생각해보고 전화 할게.”

 

전화를 끊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런 삶을 유지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아내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평생을 이렇게 산다는 것은 결코 좋은 삶이 아니다. 불법이란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민호의 기억을 지운다면 아내는 평상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민호를 찾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호를 죽인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인데, 그럴 수 있을까?

 

아들을 죽이고 얻는 평화가 의미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지만 내 마음은 점점 더 아내의 기억을 지우는 쪽으로 끌려갔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욕구가 너무 강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정을 잡았다. 마침내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아내는 한손은 집밖으로 나서는 나의 손에 이끌리면서도 다른 손은 아내는 인형을 꽉 안고 있었다. 아내는 움츠리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아내는 아예 나오려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호 보러.”

아내는 내 말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나를 따라 나섰다.

나는 그 날, 아내에게 있던 민호를 죽였다.

 

#5

아내의 기억을 지운 후로부터는 신기할 정도로 속전속결이였다. 민호에 관한 모든 기록이나 흔적을 지우고 이사를 했다. 새로운 동네에는 모르는 사람들뿐이었으니 우리에게 민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다만 아내가 민호를 아는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것을 통제해야 했다. 아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지냈다.

아내가 민호를 찾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아내의 기억 속에 민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으니까. 아내에서서 민호를 지운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기도 했지만, 그 비수도 점점 무뎌져 갔다.

아내의 발작이 없다보니 나도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회사는 승진으로 보상했다. 평탄한 나날이 이어지고 시간이 지나자 나도 민호를 서서히 잊게 됐다. 그렇게 20년을 살았다. 우리에게 불행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어느 날, 호연과 마주쳤다.

 

#6

그 초밥집에서 다녀온 이후에도 호연과 이마의 흉터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부모님을 잃고, 이마에 큰 흉터가 있는 아이가 둘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 생각이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나는 호연이라는 청년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며칠 후 초밥집을 혼자서 다시 찾았다. 이야기를 수월하게 할 수 있게 점심 때가 지난 시간에 갔다. 손님은 없었고, 호연은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 또 오셨네요.”

그가 꽤 반가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마도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렸을 것이다.

, 그래요.”

음식이 나오고 호연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모님을 어떻게 잃게 됐는지는 민감한 부분이라 이야기하는 것을 꺼릴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나에게 술술 털어 놓았다.

부모님을 어떻게 잃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호연이 말했다.

그냥 사람들에 밀려서 이리저리 움직였고, 정신 차려 보니 경찰서더라고요. , 워낙 어렸을 때여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찾지 못하자 고아원에 가게 됐고요.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자라면서부터 점점 머릿속에서 부모님을 잊게 됐습니다.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살 만 하더군요.”

호연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 아들이 죽지 않고 어디선가 계속 살았더라면?

 

가끔 부모님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부질없는 소망이겠지요.”

지난 20년 동안 잊고 지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괜찮으세요?” 호연이 물었다. 내 안색이 창백해졌던 모양이다.

마침 그때 손님이 들어왔다. 주방으로 달려가는 호연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집에 가는 도중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겨우 앞이 보여 집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다. 그 순간, 혐오감이 벅차올랐다.

 

아들을 죽이고 얻은 거짓된 삶,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내 표정이 평소와 달라 이상했는지 아내가 물었다. 나는 아내를 뒤로하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잠시만 좀 내버려둬요!”

아내가 문밖에서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없자 그것도 곧 사라졌다. 그동안 내 머리는 터질 듯 굴러가고 있었다.

아내한테 말해 봤자 소용없어, 아내는 민호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만약 호연이 내 아들이 아니라면? 나만 곤란한 상황이 될 뿐이야.

 

호연을 무시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어. 계속 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니까.

그때 기억을 지우지 말아야 했어.

 

아니야, 아내한테서 민호를 지운 건 잘한 일이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살지 못했어.

 

하지만 민호랑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민호가 아닐 수도 있어.

 

설령 아니라고 해도 다시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마음속에서 이 사실을 그대로 말하자와 말하지 말고 그냥 살자, 두 가지 목소리가 다투고 있었다. 둘 다 좋은 방안은 아니었다. 3의 방안을 찾아야 했다. 이 모든 일이 아내의 기억에서 민호를 지운 것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에 박혔다.

 

내 기억에서 민호를 지운다면?

 

생각해보니 이점이 많았다. 더 이상 민호를 생각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아내의 기억을 지웠다는 것도 잊어 죄책감을 없앨 수 있다. 호연을 만날 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보다 나은 방안은 없었다.

20년 전과 같이 나는 그 친구를 만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기억을 내 지워달라고 했다.

……

왜 그래?”

정말그래야겠어?”

뭔 소리야, 내가 말했잖아, 이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내가 20년 전에도 말했듯이, 사람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잘 알잖아!”

나도 괴로워서 그런다.”

뭔 소리야?”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기억을 지웠다가 나한테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다반사거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제는 내 친구까지 그러니알았어. 일정을 잡아 줄게.”

 

이번에는 내가 수술대에 오르기 전, 나는 다시 민호를 회상했다. 이제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니.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기억을 지운 결과가 이거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것이 최선의 방안이야.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들이 울렸다. 드디어 수술대에 올랐을 때 의문이 생겼다.

 

나만이 유일하게 민호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데, 나까지 잊어버린다면 민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정말, 살인이 아닐까?

 

나에게 이런 살인을 할 자격이 있을까?

 

이제 나는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7

잠에서 깨어 보니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큰 문제는 없는 것 같고 결과는 곧 통보해 준다고 했다.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무언가 긴 꿈을 꾼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초밥집이 보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내 발은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또 오셨네요? 어서 오세요.”

호연이 언제나처럼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끝)


※2018년 제26회 숭실문학상 황순원 소설 문학상 부문 장려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