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순서가 돌아오는 마지막 칼럼이 신문에 실렸다. 연말이기도 하고, 몇번 아니지만 올해 썼던 칼럼들이 모두 딱딱하고 강한 비판이 담겨 있었기에 마지막 칼럼은 조금 가볍고 훈훈하게 써보고 싶었다.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한해를 정리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어수선하기만 하고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렇지만 올해 나에게 돌아올 마지막 순번을 마감하고 나니 홀가분하긴 하다. 지난주 교보문고가 내놓은 올해 베스트셀러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가 떴길래, 교보문고에서 베스트셀러 집계 업무를 하시는 분과 잠깐 얘길했는데, 자신은 이미 2015년은 지났고 2016년에 가 있다고 농담했다. 그 기분을 알겠다. 아듀, 2015!
올해 걸은 곳 가운데 중국의 만리장성도 있었는데 만날 여행만 다니는 것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뺐다. 그러고보니 작년엔 점심시간에 통인동, 서촌 골목을 자주 걸었는데 올해는 그쪽으론 발걸음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하튼 내년에도 많이 걸으려고 한다.
예전에 '걷기'를 주제로 한 원서를 읽다 만 적이 있다. 지은이는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산다고 했는데 조미난 조크를 했다.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은 이동할 때 주로 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탄다. 그게 아니면 뛴다. 나처럼 걷는 사람은 이상하게 본다.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에겐 걷기, 산책 문화가 없다.'
[로그인]연말 골목길을 걸으며
골목을 걷는다. 도열한 연립주택들 사이로 난 길은 응달 쪽은 서늘하고, 양달 쪽은 햇살이 따갑다. 아이가 앞서 걷고 아내가 나와 보조를 맞춘다. 아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지하철역 3개 거리를 왕복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아이는 옷가게를 구경하다가 엄마를 졸라 <스타워즈> 로고가 새겨진 빨간색 후드 점퍼를 하나 사고, 내내 먹고 싶다던 돈가스를 무한리필 식당에서 물릴 정도로 먹었으니 넉넉하게 소득을 올린 셈이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좀 이른 듯싶지만 올 한 해를 결산해본다. 달력이라는 게 묘해서 12월31일에서 1월1일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처럼 지구가 자전을 한 바퀴 하는 것에 불과한데 연말이 되면 지난 한 해를 결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따져보니 올 한 해 셋이서 꽤 여러 곳을 걸었다. 집 근처 불광천 산책로를 거의 매주 걸었고, 제주 올레길과 한라산, 설악산 백담계곡과 지리산을 걸었다. 아이가 돌을 넘겼던 해의 여름 나는 아내와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아이가 어느 세월에 커서 함께 지리산에 오나’라고 했는데 그 ‘어느 세월’이 지난 것이다.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세상에서 좋은 것은 없다’는 농경시대 속담의 뒷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다. 잘 먹고 잘 자란 아이를 앞세우고 겨울 햇살이 사선으로 떨어지는 골목을 걷고 있자니 마음이 훈훈해진다.
안타깝게도 소시민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노루 꼬리만큼이나 짧다. 올 한 해 나라 밖 세상은 더욱 불안하고 위험해졌다. 시리아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참상,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경악스러운 테러들, 미국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총기 난사 사건들은 인류가 절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들게 한다. 나라 안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우리가 발 딛고 선 ‘고장난 저울’은 더욱 기울어졌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저울은 수평을 유지했을 때 제 기능과 역할을 완수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의 저울은 기울어져 있고 추는 저울을 쥐고 있는 사람 마음대로 정한다. 그런 저울은 현재를 망칠 뿐 아니라 미래까지 깡그리 망쳐버린다”고 했다. 고장난 저울 위에 선 청년들은 ‘헬조선’ ‘지옥불반도’라는 섬뜩한 아우성을 쏟아냈다. 꼰대 기성세대는 “우리 젊었을 땐 절망을 선택할 수조차 없었다”며 이들을 쥐어박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려면 아직 1년 남았는데도 코밑이 제법 거뭇한 저 아이도 서서히 ‘무한 경쟁의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우울은 증폭된다. 아이의 입에 금수저를 물려줄 재력도 없고, 세속적인 기대에서 벗어난 다른 삶을 살아보라고 권유하기엔 용기도 상상력도 부족한 아빠이기에 더욱 면목이 없다.
김경집은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산다. 지금은 힘들어도 미래의 삶은 보다 나을 것이라는, 나아야 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산다”면서 “지금 우리는 고장난 저울을 버리고 새로운 저울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한 장 남은 올해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단다고 사정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지 않으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느니 하는 말을 쏟아내고, 마스크를 쓰고 집회에 나선 시민을 IS 테러리스트에 빗대는 국정 최고책임자가 해가 바뀐다고 행태를 바꿀 리 만무하다. 오히려 그는 국민 편가르기를 강화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자중지란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궁금증만 안겨주는 야당은 견제는커녕 제 한 몸 추스르기도 버거워 보인다.
“아빠, 근데 이 길로 가면 집으로 가는 거 맞아요?” 우울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아이가 퍼뜩 깨운다. 나는 “물론이지. 그리고 세상의 모든 길은 연결돼 있어”라고 답한다. 그래, 일단 걷자. 때론 딱히 어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걷기 위해 걷는 것도 좋으니까. (2015.12.11)
(2008년 8월 과천 서울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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