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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시사변두리

나도 한강에 돌멩이 하나 던진다, 안철수와 문국현

2012년의 안철수
 대선의 해인 2012년이 반환점을 돈지 오래 됐다. 여야 정당들은 대선에 내보낼 대표 선수를 뽑기 위한 당내 경선을 벌이고 있다. 모든 선거가 그렇지만 여야 내부 경선은 시작되기 전부터 룰을 두고 선수들끼리 기싸움을 벌이더니,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마자 죽네, 사네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후보 결정일이 다가올수록 그들끼리 주고 받는 말에는 더욱 큰 가시가 돋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핏발이 설 것이다.
 그런데도 여야는 모두 대선후보 경선전의 ‘흥행부진’을 걱정하고 있다. 선수들끼리의 치열함과는 딴판이다. 신문지상에 고정 코너로 자리잡은 여야 경선 관련 기사들을 일별해보면 이런 걱정이 엄살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선이 불과 4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장외는 한가할 정도다. 한국처럼 정치 지상주의, 아니 정권 지상주의적 성격이 강한 나라에서 대선은 모든 정치세력은 물론이요 전국민의 향후 5년 동안의 삶을 결정짓는 대형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한가로움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먼저 여야 당내 경선의 구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고로 스포츠 경기든 선거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워야 흥미가 돋는 법이다. 여당의 경우
지난 5년간 박근혜 의원이 2012년 여당의 대선후보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점친 사람은 기초적인 여론조사조차도 해석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나 박 의원에게 지독한 반감을 갖고 있어서 의지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어한 사람 빼고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대역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고 판단될 때 흥미와 관심이 반감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야당의 경우 사정은 더욱 딱하다. 야당은 아예 2부리그, 1부리그로 나뉜 상황이다. 장외에서 몸을 푸는 듯 풀지 않는 듯, 서 있는 듯 앉아 있는 듯, 여하튼 존재하기는 하는데 무작위로 일관하고 있는 안철수라는 인물은 야당이 띄워올린 경선전의 애드벌룬에 대못으로 구멍을 숭숭 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철수가 구멍을 내고 있는게 아니라 당최 바람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안철수를 키워드로 난다 긴다 하는 정치 분석가들이 이미 차고 넘치도록 써댄 상황에서 내가 ‘안철수는 2012년 대선의 메가톤급 폭풍이다’라고 되뇌어봐야 한강에 돌멩이 하나 던지는 격일 터. 그럼에도 돌멩이를 하나 던져보려는 것은 내가 겪은 2007년의 알량한 경험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2007년의 문국현
 2007년 나는 정치부 정당팀에서 여당을 출입하는 막내, 소위 말하는 여당 말진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을 필요는 없다. 당시의 지리멸렬했던 여당의 상황은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기억할 테니까. 당내에 자칭 유력하다는 후보들이 많았지만 ‘메신저 거부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메신저 거부현상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메신저)가 불신을 받을 경우 그가 어떤 메시지를 던져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소수파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언론과 대립각을 세웠고 당연하게도(?) 보수언론은 그가 집권한 5년 동안 저주에 가까운 맹폭을 퍼부었다. 물론 참여정부에 과못지 않게 공도 분명히 존재했었지만 가랑비에도 옷이 젖는 마당에 5년 내내 보수언론이 퍼부은 폭우는 차기를 바라보는 당시 여당 후보들을 메신저 거부현상이라는 굴레에 가둬버렸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다. 정면돌파 아니면 측면돌파다. 메신저 거부현상에 갇힌 여당 후보들을 바라보는 여당 정치인들은 당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름하여 ‘제3후보론’이다. 같이 여당을 출입하던 선배들은 당내의 쟁쟁한 후보들을 ‘마크’하고 있었고, 막내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제3후보 담당이 되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등등이 제3후보군으로 거론됐고 이들에 대한 여권 지지성향 유권자들의 관심도 높았다. 이분들이 모두 내가 잠시나마 담당했던 인물들인데 출마를 하겠다는건지 말겠다는건지, 똑부러지게 말하지 않으면서 항상 여운을 남기는 ‘같기도’ 어법 때문에 고생 깨나 했었다.
 여권과는 별개로 시민사회 진영이 오래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당시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였다. 지금도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광고 카피로 친근한 유한 킴벌리라는 회사를 경영하는 문 대표는 창의경영, 혁신경영, 독서경영 등으로 유명했다. 그는 시민사회와도 꾸준히 후원하고 교류하면서 창의, 혁신, 청렴이라는 문화적 자본을 쌓아가고 있었다. 시민사회 진영에서는 그를 차기 대선주자로 옹립하고자 하는 그룹이 생겨났고 자연스레 언론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화이트칼라 계층을 중심으로 문 대표 지지자가 생겨났고 여론조사에서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기존 정치권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로 소개했고 실제로도 그런듯 했다. 4월쯤인가에 그를 인터뷰했다. 산업부 기자가 아니라 정치부 기자가 인터뷰하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선배와 함께 점심을 겸한 인터뷰를 하면서 한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내놓는 말들은 꿈같은 얘기랄까, 환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더러 “기자분들 참 일 많이 하시죠? 과로에 시달리시는 것 압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그렇게 과로를 함으로써 잃게 되는 것이 국가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참 답답한게 그렇게 과로를 하지 않아도 경제와 산업이 잘 굴러갈 수 있는데 그 굴레를 깨지 못해요”라고 말한다거나, “이제 토목경제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이미 지어놓은 것을 제대로 활용만 해도 충분해요. 꼭 필요한 것들은 지어야겠지만 발상만 전환하면 에너지와 자원을 낭비하고 자연을 해치면서까지 건물을 새로 짓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어 국공립 도서관이 저녁에 문을 닫잖아요. 왜 그럽니까? 공공건물로 지어놓았는데 밤에 놀릴 이유가 없는거죠. 시민들이 퇴근하고 밤에 늦게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을 수도 있고 행사라든지 모임이라든지 이용하도록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문국현과 안철수
 당시 문국현의 대중적 인지도는 썩 높지 않았는데 위에서 소개한 문국현의 어법은 그를 한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반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전투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존 정치권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정치를 개혁하고 국가를 혁신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충만한 인물로 보였다. 그가 출마을 선언한 이후 캠프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대부분 소장파였지만 개혁을 말할 만한 자격이 있는 참신한 인사들이었다. 출마선언을 하고 당을 만들고, 선거운동에 돌입하면서 한때 그의 지지율은 7% 가까이 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그의 행로는 모두 알고 있다. 2007년 대선에서 실패했지만, 2008년 총선에서 이재오 의원을 끌어내리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그는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휩싸이며 의원직을 상실하고 지금은 중국 관련 연구소라는 어정쩡한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안철수 역시 굳이 따지자면 경제인 출신에다가 정치권 밖의 인물이므로 문국현과 비교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안철수가 정치에 진입하는 과정 역시 현재로서는 문국현과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어차피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므로 굳이 그가 출연한 ‘힐링캠프’라는 것을 시청하지도 않았고, <안철수의 생각>은 조만간 읽어볼 요량으로 미뤄뒀지만 그의 화법을 두고 쏟아진 분석들을 보니 화법 역시 문국현과 비슷한 점이 많은 듯 하다.

2007년엔 바람, 2012년엔 태풍
 이처럼 문국현과 안철수를 완전히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대선이 끝난 이후 나는 정치권 인사들, 특히 지금의 야권 인사들과 만나면 문국현 얘길 자주 꺼내곤 했다. 선거가 임박했을 때 있었던 단일화 실패와 이 과정에서 문국현이 보여준 행태에 실망한 때문인지 그들은 문국현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면 손사레를 치기 일쑤였다.
 나는 그들에게 문국현이라는 개인 그 자체보다 2007년 대선 정국에서 문국현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해보라고 충고했었다. 비록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한때 일부 여론조사에서 7%의 지지율을 얻을 정도로-지금도 7% 지지율을 상회하는 야권 후보는 몇명 안된다-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를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지나간 일을 두고 가정해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당시 문국현이 아니라 정치권 밖의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다른 사람을 문국현의 자리에 앉혀 놓았다 하더라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정치권 전반이, 특히 야권 정치인 전체가 일종의 메신저 거부현상의 프레임에 갇혀 옴쭉달싹 못하고 있었고 이런 현상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 지지와 기대가 이를 방증한다.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 안철수 신드롬은 정치권이 스스로 만들어낸 측면이 크다. 2007년 대선 정국에서 사람들이 호소했던 갈증, 그 갈증을 정치권은 채워주지 못했고, 2007년에 불었던 바람은 5년 뒤 태풍이 되어 나타났다. 상당 기간 여의도를 출입했던 정치부 기자로서 야권에 적지않게 아는 사람이 있는 나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시 문국현의 추억
 2007년 필마단기로 정치권에 등장해 18대 총선에서 나름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듯 했으나 허망하게 끝나 버린 문국현의 정치실험은 안철수 측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반면교사일 것이다. 문국현은 문국현대로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단일화 유혹이 있겠지만 독자 출마가 옳다”라거나 “정치에서 워낙 이상하거나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 기업할 때 보다 사람을 가려야 한다”고 안철수에게 충고를 건네고 있다. 나는 그의 충고가 진심이라고 본다.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문국현은 선하지만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정치인 문국현, 아니 정치인이 되기 직전의 문국현 시절의 일화는 안철수를 그와 연결시켜 생각하는데 있어 찜찜함을 남긴다. 이미 두세차례 인터뷰를 한 김에 그의 지방 출장 일정에 맞춰 하룻동안 동행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현안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다. 그는 명쾌했고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아마도 비정규직 문제였을 것이다. 해법을 묻자 그는 발상을 전환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간,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사회적 타협을 이야기했다. 국회가, 정치권이 수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참여정부도 적어도 겉으로는 비정규직을 억제하겠다고 하면서 법제화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국회에서 거부되거나 제도의 본질이 희석돼 버리는 것을 보지 않았으냐고 덧붙였다. 그는 다시 말했다.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그리고 자신은 할 수 있다고.
 곤하게 잠들어 달콤한 꿈을 즐기다 갑작스런 천둥소리에 잠에서 깼을 때 이런 기분일까. 문득 뭔가 이상하다,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나를 매료시켰던 문국현의 말들이 모래 위의 누각처럼 느껴졌다. 그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나름의 방법론도 제시했지만 그 방법론이 구체적이지 않았거나, 아니면 내가 그가 제시한 ‘어떻게’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말하면 이런 질문을 많이 받을 것이다. 정치 경험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서 나라를 잘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고. 이에 대해 안철수 지지자는 만날 싸움질이나 하고 돈이나 받아처먹는 정치 경험이 없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안철수 자신의 대답도 비슷한 프레임을 띄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안철수 지지자들이 아무리 강변해도 이런 질문, 이런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정치 경험을 몹쓸 것이라고 보는 그들의 생각이 맞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토록 믿어마지 않는 안철수가 대통령이 됐을 때 정치권의 저 부패한 능구렁이들에게 되치기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지 않겠는가말이다.
 그래서 나는 안철수든 기존 정치권이든 문국현을 좀 더 깊숙히 연구했으면 좋겠다. 정치권 스스로의 쇄신을 위해, 그리고 좀 더 진일보한 버전의 정치 아웃사이더의 출현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