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 하면 연례행사처럼 직업별 평균수명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지난주 초에도 원광대 김종인 교수팀이 11개 직업군에 대한 평균수명을 조사한 결과를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눈길은 끌지만 직업별 평균수명은 이미 우리에게 대강의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종교인이 단연 장수하는 그룹으로 오래 전부터 조사돼 왔고, 교수와 기업인 등등도 장수하는 그룹으로 분류돼 왔다.
그런데 직업별 평균수명에 대한 통계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직업군이 있다. 바로 정치인 그룹이다. 대체로 일반인들이 인식하기에 정치인은 스트레스도 심하고, 때로는 몸싸움도 불사해야 하는 '험한' 직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치인은 두번째로 장수하는 직업군이다. 앞서 나왔던 여러 통계에서도 정치인은 장수하는 직업군으로 종교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번에 나온 원광대 김종인 교수팀의 연구에서도 종교인의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장수하는 직업군은 ‘종교인’인데 반해 단명하는 직업군은 ‘체육인·작가·언론인’으로 집계됐다. 특이 두 직업군 간의 수명 차이는 무려 13년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광대 보건복지학부 김종인 교수팀은 1963년부터 2010년까지 48년동안 언론에 난 3215명의 부음기사와 통계청의 사망통계자료 등을 바탕으로 국내 11개 직업군별 평균수명을 비교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4일 밝혔다.
연구팀이 분류한 직업군은 종교인(승려·신부·목사 등), 연예인(배우·탤런트·가수·영화감독), 정치인(국회의원·시도지사 등), 교수, 고위공직자(장관·차관·정부기관 관료 등), 기업인(기업 회장·임원 등), 예술인(도예·조각·서예·음악 등), 체육인(운동선수·코치·감독 등), 작가(소설가·시인·극작가 등), 언론인(기자·아나운서), 법조인(판사·변호사·검사) 등 11개 그룹이다.
분석 결과 전체 직업별 평균 수명은 종교인이 80세로 가장 높았다. 뒤를 이어 정치인(75세), 교수(74세), 기업인(73세), 법조인(72세), 고위공직자(71세), 연예인·예술인(각 70세), 체육인·작가·언론인(각 67세) 등의 순이었다.
특히 최장수 직군인 종교인의 80년대 평균수명 80세와 작가의 80년대 평균수명 61세를 비교하면 수명 최대 편차가 19세에 달했다.
이처럼 종교인이 장수하는 이유로 신체적으로 규칙적인 활동과 정신수양, 정신적으로 가족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고 과욕이 없음, 사회적으로 절식, 금연, 금주의 실천, 상대적으로 환경오염이 적은 곳에서의 생활 등이라고 연구팀은 꼽았다. (경향신문 4월4일자 보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상당 기간을 정치부에서 근무했기에 일반인보다는 나름 정치인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때도 이런 류의 통계가 나와서 개인적으로 왜 그럴까 궁금해하면서 이유를 따져봤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나름의 연구와 관찰을 통해 정치인들이 오래 살 수 있는 이유를 꼽아봤다.
먼저 정치인이 매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는 사실은 틀림 없다. 4년 마다 돌아오는 선거를 보자. 선거를 앞두고 벌여야 하는 공천경쟁의 스트레스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18대 국회의원 공천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나 같이 배짱 약한 사람은 정치 하라고 해도 못하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생각해보라. 지역구 공천을 받기 위해 4년 내내 지역구를 갈고 닦았는데 당에서 전략공천이랍시고 명망가를 꼿아버리면 일순 쫓던 개가 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해당 지역구를 튼튼히 지킨 국회의원이라 할지라도 그 자리를 노리는 신인들의 도전은 거셀 수 밖에 없다. 어렵사리 공천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본선에서의 경쟁은 말 그대로 피가 튀기고 살이 탄다. 상투적으로 말해서 총만 안들었지 전쟁 그 자체이다. 선거 결과가 나오기까지 후보가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극심할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설명해도 상상이 안된다.
익히 알듯이 스트레스는 현대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그 양은 줄어들지만 스트레스 자체가 없어지진 않는다. 그런데 왜 정치인은 오래 살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발견한 비밀의 열쇠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누가 콘트롤하느냐이다. 아무리 극한의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이라하더라도 주체가 어떤 자세로 그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정치인은 바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각종 모임과 회의, 식사 등 스케줄이 빡빡하다. 이처럼 바쁜 생활이 건강에 그리 좋을리 없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이처럼 바쁜 스케줄을 다 소화하면서도 '정신건강'을 지키는, 오히려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비법이 있다. 바로 내가 그 모임의 주인 또는 주인공이 되면 된다. 근데 모든 모임에서 내가 주인공이 될 순 없는 법이다. 그럴 경우는? 상관 없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적에도 내가 지켜본 바로는.
또하나, 정치인은 좋게 말하면 공명심, 비꼬아서 말하자면 자기합리화의 천재들이다. 주변의 상황이 아무리 험악해도 자기 중심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대처방식을 생각해낸다. 어떤 정치인에 대해 주변에서 아무리 '또라이'라고 욕을 해도, 본인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이처럼 자신이 고결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는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일례로 지난 대선에 나왔다가 형편없는 성적을 거뒀던 어떤 정치인이 있다. 그는 지난 대선이 세번째 도전이었다. 대선이 끝나고 좀 지난 뒤 그는 자신을 '마크'했던 기자들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첫번째와 두번째 도전에선 거의 당선이 가능할 수도 있었던 거물급이었지만 세번째엔 워낙 형편이 없었던지라 분위기는 맥이 빠졌고, 기자들의 질문도 겉돌기 일쑤였다. 급기야 한 기자가 "다음번에도 출마하실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듯 말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당연히 나가야지." 가정법을 동원한 말이었지만 실은 국민들이 자신을 '심하게' 원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말투였다. 대선에서 3%의 지지도 못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국민이 자신을 원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고 아마 지금도 그럴거다.
또 한가지. 정치인은 크건 작건 권력이 있다. 시쳇말로 대통령은 감기도 안걸린다는 말이 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지난해 말 예산안 날치기를 항의하기 위해 여러날을 노상에 천막을 치고 찬바닥에서 잤다. 어떤 기자가 그의 체력을 감탄하자 그 말을 들은 어떤 당직자는 말했다. "나도 대표 시켜주면 1년 내내 눈밭 위에서라도 자겠다”고. 권력이 그만큼 좋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이 역시 정치인을 오래 살게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래 살고 싶으면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인가?
참고로 정치인과 친하지만 처지가 완전 딴판인 그룹이 바로 언론인이다. 언론인이 꼴찌 그룹에 속한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오래 살려면 술 좀 줄여야 할텐데. 쿨럭. ㅠㅠ) 사실 내가 봐도 언론인 선배들은 외모 자체가 나이에 비해 늙어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조로한다는거다.
언론인은 왜 오래 살지 못할까? 정치인과 정반대의 메카니즘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매일 매일 기사를 마감해야 하는 기자들은 시간의 노예이다. 물론, 기자 사회에서도 정치인의 습성을 타고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종을 위한 경쟁, 낙종에 대한 공포는 꽤나 큰 스트레스 요인이다. 법조 출입을 오래한 어떤 선배는 한창 큰 사건이 굴러가고 있을 땐 아침에 경쟁지를 집어들기가 겁이 났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자는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일하는 직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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