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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Gallery Sunho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

학습만화 시리즈에 대한 아이의 몰입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마법천자문' 시리즈와 '마법천자문 과학원정대' 시리즈를 동시에 따라가면서 탐닉하고 있는데, 전자의 경우 '단어마법' 시리즈라는 새로운 라인업이 시작됐다. 마트에 장난감을 구경하러 가곤하는데 그 옆에 책 코너가 있다. 아이는 장난감을 한번 휘릭 둘러보고는 반드시 책 코너로 간다. 어른들이 마치 신간을 휘리릭 구경하듯 마법천자문 시리즈 새 책이 나오진 않았는지, 자기가 못본 과학원정대 시리즈가 추가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거다.

지난 연말에 두어권 사줬는데, 그사이 또 새 책이 나온 것을 아이가 발견, 갖은 구실을 붙여서 사달라고 안달복달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설 연휴 마지막날 인터넷 서점에서 4권이나 주문했다. 그날부터 '주문했어요?', '언제 도착한데요?' 등등 질문공세에다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 오면 좋겠다'가 이어졌다. 마침내 어제가 도착 예정일이었고 아이는 아침부터 부푼 꿈을 안고 유치원엘 갔다. 그런데 유치원에 다녀왔는데도 책이 도착해 있지 않자 아이는 대실망하더니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나에게 대여섯번은 전화를 해서 어디쯤 왔는지 확인해주길 간청했다. 인터넷 서점의 배송조회를 뒤져서 택배 기사와 통화에 성공했는데 물건이 밀려 밤 11~12시쯤이나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차라리 내일 오시라고 하고는 아이에게 이 소식을 전했더니 아이는 엄마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대성통곡을 하더란다. 조금 지나 아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택배 기사에게 다시 전화해서 밤 늦게라도 갖다달라고 부탁하면 안되겠느냐고. 다행히 택배기사는 그러마고 했다. 11시 조금 넘어 집근처까지 왔을 때 택배 기사가 전화가 왔고 아내가 책을 받았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막 잠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 책 표지만 보고 눈을 감았단다. "책이 너무 보고 싶어 잠이 안올 것 같다"는 아이의 말에 엄마는 "그러지 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책 보고 유치원 가라"고 당부를 했단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내가 일어나 부스럭거리자 아이도 따라 일어났다. 눈이 반쯤 감긴 상태에서 "아빠, 고맙습니다"라고 하더니 내가 세수를 하고 오자 이불에서 나와서 책을 펼쳐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어릴 적을 생각해보면 뭔가 갖고 싶으면 눈을 감아도 그게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부모님이 사주신다고 하면 그 날짜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마침내 그날이 오면 아침에 눈에 번쩍 떠졌던 그런 행복한 기다림이 떠오른다.

우리집 현관의 보일러실로 통하는 미닫이 문에는 두장의 그림이 걸려 있다. 내가 작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다가 돌아오던 날 아이가 그려서 현관문 바깥쪽에 붙여놓았던 것이다. 일주일간 못본 아빠가 돌아온다는 게 신났던 것인지, 아빠가 사오기로 약속한 선물이 반가웠던 것인지, 여하튼 아빠가 가장 크게 그려져 있다. 아이 엄마가 살짝 투정을 하기도 한 그림이다. 대체로 아이들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크게 그린다는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빠다. 작년 가을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감동이 새삼스럽다. 일주일간 서양식만 먹어서 오자마다 매콤한 것을 먹고 싶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이 그림을 보자 일주일간의 느글거림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 그림으로 인해 우리 가족의 비밀이 또 하나 공개가 돼 버렸다. 그렇다. 우리 가족은 왕족이다. 우리 가족은 집에서는 모두 왕관을 쓰고 산다. 퇴근해서 집에 가자마자 왕관을 쓰고 살려니 귀찮아 죽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