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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리뷰]엥겔스 평전

연말이 가까워 오고 있으므로 좀 있으면 따져보게 되겠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평전을 많이 본 것 같다. 벽돌 두께를 자랑하는 <다윈 평전> <제인 구달 평전>에서부터 <김대중 평전>에 이르기까지 평전이 많이도 나왔다. 과거에도 그랬는지 지난해, 올해 유독 평전이 자주 나온건지는 비교할 순 없지만 여하튼 요사이 들어 평전이 많이 눈에 띈다.

“현미경으로 좁고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으로 넓고 멀리 보라”는 격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소 즐겨 쓰던 말이었다. 그가 실제로 이런 시야와 안목을 갖추고 있었는가와는 별개로 현미경과 망원경은 어떤 사물이나 사안을 관찰하고 평가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유용한 도구인 것은 틀림없다. 어떤 사람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특정 인물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가 어떤 시점에서 어떤 발언이나 행동, 생각을 했는지 면밀하게 알아내는 동시에 왜 그런 행동이 나왔는지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건 ‘평전’ 작가들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래의 <엥겔스 평전> 리뷰기사를 작성하면서 도입부로 썼던 문단인데 분량이 넘치면서 쳐냈던 부분이다. 우리 회사의 선배 한분은 평전 읽기 및 모으기가 취미이다. 그러고보니 그 선배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평전을 쓰기도 했다.

나는 원래 평전이나 전기를 즐겨 읽는 편이 아니었다. 30대 되기 전에 읽은 평전이라고 해봐야 <전태일 평전> 정도가 유일한 것 같다. 그런데 어쩌다 한권씩 심심풀이로 평전이나 자서전, 전기 등을 읽다보니 재미가 들었다.

<엥겔스 평전>은 평전 읽기의 즐거움을 고스란히 안겨준다. 옛날에 살았던 주인공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는 것은 통시적·공시적으로 뜯어보는 것을 뜻한다. 잘 된 평전은 인물 이야기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와 시대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엥겔스가 살았던 시대는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명명한 시기와 겹친다.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또한 엥겔스의 사상적 궤적을 쫓아가는 것은 19세기 유럽 지성사를 훑는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 평전> 리뷰 기사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대학 시절 들었지만 전혀 맥락이 연결되지 않았던 단어들이 회상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청년 헤겔파, 헤겔 좌파, 헤겔 우파 같은 단어들 말이다. 몇번을 손에 들었다가 '어흐!!' 소리를 내면서 포기했던 '포이어바흐'는 또 어떻고! 신기하다.

대학 시절 운동권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합습'이란 것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엥겔스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게 그리 많을리 없었다. 그런데 책을 보니 인간적으론 마르크스보다 훨씬 인간미가 느껴질 정도로 엥겔스는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엥겔스 평전>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것 한가지는 기록으로서의 편지의 역할이다. 오랫동안 맨체스터에 있었던 엥겔스와 런던에 살았던 마르크스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이게 고스란히 남았다. 평생의 동지 사이의 개인적인 서신교환이었기에 깊은 속내를 숨기지도 않았다. 몸이 좋지 않으면 온몸에 오돌돌하게 종기가 돋곤 했던 마르크스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중요부위'에 종기가 돋았다고 엥겔스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평전을 위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됐음은 물론이다.

엥겔스에게 죽어서까지 따라다닌 마르크스의 그림자를 지웠다
그래도 ‘모순’까지 지워지랴

엥겔스 평전 - 10점
트리스트럼 헌트 지음, 이광일 옮김/글항아리

본격적인 평전으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 우리는 엥겔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카를 마르크스(1818~1883)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로미오’라는 이름은 옆에 ‘줄리엣’이 있어야 존재가 완성되고,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버로’가 결합했을 때 비로소 대공황기 미국을 주름잡았던 2인조 강도단 ‘보니&클라이드’가 탄생한 것처럼 엥겔스는 마르크스란 이름이 더해져야 완성되는 인물이다.

영국 런던대 퀸 메리 칼리지 역사학부의 36세 소장파 교수인 트리스트럼 헌트가 지은 <엥겔스 평전>의 미국판 제목 <마르크스의 장군>은 엥겔스에 대한 일반인의 통념을 따르고 있다. 엥겔스 평전인데 제목에 마르크스가 등장한다. 그런데 영국에서 출간된 원서제목은 달랐다. 한국어판 부제인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였다. 엥겔스를 독립적인 인물로 보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그래서 영국의 어느 서평가는 “엥겔스를 그가 평생에 걸쳐 헌신한 마르크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해준 역작”이라고 평했다.

지은이가 엥겔스의 삶에서 가장 크게 주목한 면모는 ‘모순’이다. 프로이센의 부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엥겔스는 청년 시절 일찌감치 공산주의자로 변신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중년이 될 때까지 ‘이중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세계 최대 공업도시로 성장한 영국 맨체스터의 면직공장에서 오랫동안 공장주로 일한 것이다. 여우사냥과 고급 샴페인, 유흥을 즐겼고 여자들을 밝혔다. 한국에서 ‘강남’과 ‘좌파’가 형용모순으로 들리듯, ‘프록코트’(서양식 남자 예복)와 ‘공산주의자’는 어색한 조합이다.

엥겔스가 죽기 전부터 비판자들은 그의 삶을 모순 덩어리로 비판했다. 엥겔스는 ‘장사꾼’의 삶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철학자이자 혁명가로 나서게 됐을 때 하늘을 날 듯 기뻐한 것을 보면 이중생활을 갑갑해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그다지 모순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엥겔스가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린 스케치.
이른바 '베를린 자유파' 친구들이 빈병이 나뒹구는 술집에서 왁자지껄 어수선하게 논쟁하고 떠드는 장면이다.

엥겔스가 떠안은 모순은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이름이 밝게 빛나게 될 마르크스를 향한 ‘헌신’의 대가였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일가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졌다. 엥겔스가 자신의 면직공장과 악명높은 공업도시 맨체스터에서 건져올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생생한 관찰과 통계는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자본>을 집필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인용됐다. 엥겔스가 자본가로서 번 돈과 지식, 경험이 자본가들의 최대의 적 마르크스를 먹여살리고 <자본>이 쓰여지는데 사용된 것이다.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관계는 단순한 후원·수혜 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한 몸’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책에는 마르크스와 가족들이 보여준 뻔뻔함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생활비와 집필에 필요한 생생한 자료들을 보내달라고 칭얼댔다. 극심하게 빈곤한 적도 있었지만 엥겔스의 금전적 도움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 마르크스 일가는 부르주아식으로 먹고, 마시고, 교육받고, 즐겼다. 자신의 위치를 ‘제2바이올린’으로 규정한 엥겔스는 그를 종종 ‘물주나리’라고 불렀던 ‘제1바이올린’ 마르크스를 위한 헌신을 단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가정부와 잠시 눈이 맞아서 아들을 낳자 세상엔 비밀로 숨기고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죽어서도 마르크스 옆에 눕는 대신 화장해 바다에 뿌려지도록 했다. 마르크스의 권위와 영광을 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엥겔스는 외모와 성격에서도 마르크스와 대비됐다. 명성으로 보자면 마르크스가 ‘해’, 엥겔스가 ‘달’이었지만 외모와 기질은 반대였다. 엥겔스는 날렵한 몸매에 훤칠한 키, 희고 고운 피부, 쾌활한 성격 등 좋게 말해 보헤미안적인, 나쁘게 말해 바람둥이의 재질을 타고났다. 반면 마르크스는 육체적·정신적 침체에 쉽게 빠져들 정도로 예민했다. 평생 오만가지 잔병을 달고 살았고 오만할 정도로 고집불통이었다. 마르크스는 별명이 ‘거친 검정 멧돼지’였다.

엥겔스가 보여준 모순과 헌신은 ‘열정’의 다른 말이었다. 늙어서는 혁명가들로부터 ‘리전트 파크 로드(엥겔스의 거주지)의 달라이라마’로 불린 그는 죽는 순간까지 사회주의·공산주의 조직을 건설·강화하고 전략·전술을 고안해 막후에서 조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철없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를 비판할 땐 가차 없었다. 마르크스 사상이 훼손되지 않고 굳게 뿌리내리게 하는 역할은 기본이었다.

마르크스의 매장기록(위에서 네번째 칸). 장례 주관자 난에 엥겔스가 서명했다.

20세기 한때 세계 인구 3분의 1이 공산주의 체제에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공산주의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무자비한 폭력과 인권유린이 공산주의 정권에서 일어났다. 지은이는 엥겔스가 유연한 사람이었고, 20세기 공산주의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톱다운’ 방식의 혁명에는 대단히 회의적이었다며 적극 변호했다. 엥겔스는 20세기 사회주의에 책임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사마 빈 라덴이 저지른 잔인한 테러에 대해 예언자 무하마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처럼” 19세기 런던에서 활동한 철학자들이 스탈린주의가 20세기에 저지른 폐해를 책임질 순 없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의 과학적 분석과 변혁적 상상력이 지닌 가치에 주목한 것이지만 지난 20세기에 그들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주장은 애정이 지나친 느낌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해서 보자는 것인데 아버지 없는 아들은 없는 법이다.

<엥겔스 평전>은 평전 읽기의 즐거움을 고스란히 안겨준다. 옛날에 살았던 주인공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는 것은 통시적·공시적으로 뜯어보는 것을 뜻한다. 잘 된 평전은 인물 이야기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와 시대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엥겔스가 살았던 시대는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명명한 시기와 겹친다.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또한 엥겔스의 사상적 궤적을 쫓아가는 것은 19세기 유럽 지성사를 훑는 것이기도 하다. (201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