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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책과 사람

[인터뷰]테리 이글턴

대학 1학년 때 학생회 사무실이나 동아리방 같은 곳에 가면 쉽게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바로 얼마전 방한했던 테리 이클턴이 쓴 <문학이론입문>이었다. 세미나 커리큘럼 앞부분에 이 책의 일부가 들어있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남은 이 책에 대한 추억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둘러싼 언저리 정보만 남았다.

첫번째는 나의 지독한 오해인데 얼마전 <신을 옹호하다>나 <반대자의 초상> 등 이글턴의 책들이 번역돼 나오기 전까지 나는 그가 그렇게 젊은 나이인지 몰랐다. 지금 67세이니 절대 젊은 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대학 1학년 때 이미 그 나이였을 것으로 상상했다는 것이다. 워낙 유명한 비평가라는 평이 있어서 그런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이미 호호 할아버지이거나, 솔직히는 이미 저세상 사람인줄 알았다. 대가들에게 종종 갖게 되는 나이에 대한 오해이다.

두번째 추억은 창피하고도 괴로운 것인데, 책의 내용이 지금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했지만 당시엔 무지 괴로워했다. 왜? 대학 1학년이 영미문학비평 방법론을 논한 책을 집어들었을 때 겪어야 할 고통을 상상해보라. 결국 완독하지 못한채 끝내고 말았지만 <문학이론입문>은 두고두고 나에게 읽으려했지만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던 허다한 책 목록 가운데 1순위에 올라있다. 얼마전 비슷한 연배의 출판계 인사와 만나 이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역시 비슷한 악몽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부실한 번역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아래 링크를 건 판본은 내가 접했던 판본이 아니므로 현재 유통중인 판본의 번역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지적이 사실이라고 해도 악몽의 강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글턴은 이번 방한이 1993년 방한에 이어 2번째라고 했다. 그는 기자간담회 모두 발언에서 "93년에 왔을 땐 훨씬 팔팔했었고 정력적이었는데 이제는 늙고 쭈글쭈글해져서 왔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 더 급진적으로 됐으면 됐지 보수적으로 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보수언론의 기자도 왔다고 들었는데 내가 하는 말이 틀리다면 손가락질을 하면서 질문을 해도 좋다"고 조크를 하기도 했다. 시간이 되면 강연도 들어보고 싶었으나 시간도 몸도 부족해 그러지 못했다. 대신 그의 강연문 하나가 올라와 북마크를 해두었다. 읽다가 만 <반대자의 초상>이나 <신을 옹호하다>와 함께 틈틈이 읽어볼 요량이다.

문학이론 입문 - 10점
테리 이글턴 지음, 김현수 옮김/인간사랑
신을 옹호하다 - 10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모멘토
반대자의 초상 - 10점
테리 이글턴 지음, 김지선 옮김/이매진

“너무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로 세계 양분”
-해외석학강좌 위해 방한 급진적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


마르크스적 전통을 잇는 급진적 문학비평가이자 문화이론가인 테리 이글턴(67)은 20대 시절 독창적인 문학이론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영국 랭커스터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글턴은 논리적이면서도 신랄한 문체로 유명하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그를 가리켜 ‘그 끔찍한 테리 이글턴’(that dreadful Terry Eagleton)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고려대 영미문화연구소·영어영문학과가 진행하는 해외석학강좌를 위해 방한한 이글턴이 6일 기자들과 만났다. 최근 이글턴의 책 한 권이 <신을 옹호하다>(원제 ‘Reason, Faith, and Revolution’)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됐는데 이 책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이글턴은 “ ‘신을 옹호하다’란 제목은 잘못 번역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무신론에 관한 논의가 가치를 지니려면 논지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취지”라면서 “적을 알아야 그것에 반대되는 논지를 더 잘 펼칠 수 있듯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신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글턴은 “현대 자본주의는 구성원의 공유된 믿음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을 잘 버는 한 어떤 믿음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형이상학이나 종교적 현실에 기대 작동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인데 이것이 커다란 모순이라는 게 이글턴의 주장이다. 이글턴은 “미국의 예를 들자면 가장 물질적인 사회이지만 변질적 형이상학, 놀라울 정도의 근본주의로 가득찬 사회”라고 말했다. 이글턴은 “세계가 너무 믿는 사람들과 너무 믿지 않는 사람들로 양분됐다”면서 “남북한의 문제도 너무 믿는 사람이 많은 북한과 너무 믿음이 없는 남한의 대비를 해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서구의 좌파 사상가들이 신과 윤리의 문제를 다룬 저술을 속속 출간하고, 국내 좌파 지식인 사이에서도 정의·윤리 등 형이상학적 주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데 대해 이글턴은 ‘좌파의 쇠락’과 연결된 것으로 분석했다. 좌파가 권력을 잡고 있던 시절엔 이런 문제를 고민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지만 이제 현실에서 쇠락한 좌파에게 신학이나 윤리의 문제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의 모색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자원으로서 성찰 및 탐구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현대사회의 갈등의 국면은 진보·보수가 아닌 ‘비극적 휴머니즘’과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대립에 있다고 말했다. “비극적 휴머니즘에서 ‘비극’은 슬프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부숴야만 새로운 삶, 인류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고전적 비극이 가지는 패턴이지요. 기독교에서 이런 믿음이 발견되고, 정신분석학·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도 비극을 통한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유주의는 미래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이글턴은 6일 오후 고려대에서 ‘신념과 근본주의’를 주제로 강연했으며 7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문학의 내면’을 주제로 강연한다. 9일 광주 전남대, 10일 대구 영남대에서도 강연이 예정돼 있다. 이글턴은 <마르크스는 왜 옳았는가(Why Marx was right)>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있으며, 내년 2월쯤 출간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10.9.7)

테리 이글턴 고려대 강연문 '신념과 근본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