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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리뷰]아주 평범한 사람들

매주 수십권의 신간이 배달돼 오는데(조만간 정말로 한주에 배달되는 신간의 수를 꼭 세어보고 말리라. 만날 '수십권의 신간'이라고 기술하는 건 기자로서 할 일이 아니다.) 책을 봉투에서 꺼내는 순간 손에 쫙 달라붙는 책들이 있다. 이건 그냥 직감이다. 직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손에 붙긴 붙었는데 펼치는 순간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책들도 상당히 많으니까. 그런데 이 단계에서 눈에 쫙 붙는 책들이 등장한다. 손에 붙든, 눈에 붙든 나에게 붙는 책들은(붙는다는 표현을 쓰다보니 좀 그렇다. 책에 무신 본드가 묻어 있는 것도 아니고) 셋중 하나의 경우일 것이다.

첫번째는 그 책이 별 것 아닌데 내가 잘못 짚은 것.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일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쪽팔리니까. 두번째는 책이 워낙 양질이라 용케 내가 그걸 알아보는 경우다. 세번째는 그 책이 내 관심사와 취향에 딱 들어맞는 경우일 것이다.

출판담당 기자로서는 첫번째는 지양해야 하는 사태이다. 대신 두번째와 세번째는 적절히 안배에서 힘을 실어줄 책을 골라내는 것이 출판담당 기자의 임무이자 능력이 될 터이다. 그런데 크게 다룰 책을 고를 때 책을 끝까지 정독하고 고를 수는 없다. 그건 현재 한국 출판계와 서평을 쓰는 신문사의 사정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짧은 기간 내에 발췌해서 살펴보고 골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괜찮을 것 같아서 골랐는데 막상 읽어나가다 보니 고역인 경우도 없지 않다. 반대로 크게 키우기엔 좀 부족해 보이지만 대안들도 별로여서 골랐는데 읽어나가다가 크게 감동을 받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앞서 얘기한 두번째와 세번째에 모두 해당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이 나온 주에 공교롭게 <엑스페리면트>(마리오 지오다노 씀/배명자 옮김/이레)라는 소설책도 같이 나왔는데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작가가 독일 101경찰예비대대의 행태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부분에서 기대고 있는 '1971년 스탠포드 대학 감옥 실험'을 소재로 한 픽션이다. 필립 잠바르도 스탠포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2주일간 실시하려다 6일만에 중단시킨 것으로 유명한 이 실험은 인간의 폭력성향이 환경에서 추동된다는 가설을 강하게 지지한다. 대학 건물 지하에 모의 교도소를 만들고 자원자들을 모아(폭력성향 검사 등에서 보통으로 나온 남성들도 선택했다) 제비뽑기로 간수와 죄수의 역할극을 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간수들로부터 욕설과 폭력 행위가 발생했던 것이다.(스탠포드 대학 감옥 실험에 대한 위키피디아 정보보기.) 배경을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으로 바꾼 이 소설은 한차례 영화화 됐는데 할리우드에서 다시 영화로 만들어져 2010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될 모양이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훑어 보면서 떠오른 또 한권의 책이 <더 리더>의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이다. 평소 소설을 읽을 틈이 없어 보지 못하는데 이 책은 겨울 휴가 때 우연찮게 붙잡아서 빨려들어갔었다. 2차 대전 즈음 사생아로 태어난 독일인 주인공 남성이 죽은 것으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세탁한 채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이 이미 알아낸 아버지의 행적은 절대권력의 숭배자였다. 나치가 벌인 전쟁에도 진심으로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아들은 신분을 가장한 채 그에게 접근, 그의 수업을 수강한다. 겨울 방학을 맞아 교수는 자신의 별장으로 몇몇 학생들을 부르는데, 교수는 나타나지 않고 난데 없이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사내들이 들이닥쳐 복종을 요구한다. 암울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권력의 권력자의 폭력적 지배와 자발적 복종, 공포 등등의 문제를 소설로 꽤나 잘 형상화 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고보니 <엑스페리먼트>와 <귀향> 모두 작가가 독일인이다.

세권을 한 꿰미에 꿸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고르면서 <엑스페리먼트>와 <귀향>을 같이 언급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촉박한 시간을 이겨낼만큼 실력이 충분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렇게 블로그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일단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다.

엑스페리먼트 - 10점
마리오 지오다노 지음, 배명자 옮김/이레
귀향 - 10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이레

p.s. 고백컨데 이 책을 지면에 소개하면서 크나큰 실수가 있었다. 글이 아니라 그래픽에서다.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즉 철십자를 표현한다는게 뒤집혀서 나간 것이다. 일히 알겠지만 하켄크로이츠를 뒤집으면 불교를 상징하는 만(卍)자가 되고 만다. 주말에 편집국으로 전화들이 걸려왔고, 내게도 항의 메일이 여러통 왔다. 결국 '정정'기사가 나갔고, 메일을 보낸 분들께도 사과메일을 발송했다. 기자 생활 10년 만에 제일 쪽팔린 상황이었다.

특수 상황선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 - 10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지음, 이진모 옮김/책과함께

연쇄살인범이 잡히면 그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악마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류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학계의 논의도 크게 보면 비슷한 구조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극도로 유대인을 증오했거나 잔악한 사람들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즉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미국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1992년 처음 발표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원제 Ordinary Men)은 이런 질문을 물고 늘어져 강력한 가설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목에 등장한 ‘평범’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게 만든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주창했듯, 사악함이나 세뇌효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 등 심리적 요인이 잔혹한 행위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학살 책임자나 피해자보다는 학살을 직접 수행한 말단의 당사자를 집중 추적한 연구서로 최초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온 뒤 요나 골드하겐이라는 학자가 같은 자료로 브라우닝과 정반대의 결론, 즉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 책을 출간하면서 꽤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브라우닝은 개정판(98년) 후기에서 골드하겐의 공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 양자 사이의 논쟁의 뼈대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아주 평범한 학살 집행자들’은 나치 독일 당시의 ‘101예비경찰대대’. 101예비경찰대대는 1942~43년 폴란드에 투입돼 유대인 3만8000여명을 학살하고, 4만4200여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명실상부한 ‘죽음의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의 중년 남성 500여명으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대 구성원은 대부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反)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철저한 훈련과 이념교육을 받은 정예부대는커녕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 검찰이 1960년대에 전직 101예비경찰대대원 125명을 취조한 기록을 분석,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 전문가’가 돼 갔는지 규명했다. 1942년 7월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 작전에 나서기 직전 101예비경찰대대의 지휘관은 임무를 설명하면서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말한다. 500여명 가운데 12~13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유대인 1500여명의 머리통을 총탄으로 차례차례 날려버리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물론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몇명 죽이고 나서는 빠져나온 부대원도 생겼다. 20% 정도가 열외를 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놀랍지 않은가. 10명 가운데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니와 범죄자도, 적군도 아닌 민간인을 시체더미로 만드는 데 나선 것이다. 학살 작업을 거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들도 첫날의 경험을 한 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역겨움을 호소했다. 부대로 돌아와 독한 술에 만취했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말한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사살 임무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들은 결코 ‘미쳐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대부분은 학살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학살을 즐기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요소는 ‘동조(同調)’와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체면을 중시했고, ‘최고위층의 명령’이라는 권위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

브라우닝은 “학살을 저지른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결코 사면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했을 때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브라우닝의 결론은 평범한 사람도-나를 포함해서-특수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우닝도 “잔혹성은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뿌리를 볼 때 사회적”이라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한 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이야기에서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우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정부들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지그문트 바우만)라는 명제는 불편하지만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이해가 홀로코스트 학살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살 임무를 거부한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었으니까. (201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