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 사장은 출판을 담당하던 초기에 인사를 나누기 전부터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출판계에선 꽤 유명한 편집자 출신으로서 자신의 출판사를 차려 푼푼하게 꾸려가고 있는 분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간간이 만나곤 했는데 자신의 책을 준비중인 건 몰랐다. 간만에 편한 마음으로 독서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지은이는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나서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복수를 하겠다"는 애교 섞인 이메일을 보내왔다. 실은 이렇게 글을 쉽고도 짜임새 있게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ㅠㅠ
“재주는 부지런함만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 깨닫는다는 한 글자는 도덕의 으뜸가는 부적이다. 옛 사람의 책 가운데 경전과 역사적 종류 같은 것은 한 글자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 나머지 책 중에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하나하나 정밀하게 궁구하여 심력을 나눌 필요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60, 70장쯤 된다고 치자. 그 정화로운 것을 추려낸다면 십수 장에 불과할 것이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정작 그 핵심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한다. 오직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손 가는 대로 펼쳐 봐도 핵심이 되는 것에 저절로 눈에 가서 멎는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단지 십수 장만 따져보고 그만둘 뿐인데도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전부 읽은 사람의 배나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두세 권의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백 권을 읽고, 효과를 보는 것 또한 남보다 배가 되는 것이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키보드로 몇글자만 딸각거리고 엔터키를 누르면 정보가 차고 넘치는 시대 아니던가. 바야흐로 정보의 ‘검색’과 ‘요약’, 그리고 ‘효율’이 생존의 필수조건이 된 것이다. 책을 ‘그냥’ 읽는 사람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책읽기 방법 혹은 독서법에 관한 책들도 적지 않게 나오는데 대체로 전투적·전략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읽을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책읽기의 대가들이 썼다는 이런 책들은 나름의 가치가 크다 하겠다. 그렇지만 이런 책들은 왠지 숨이 막힌다.
책을 향한 느슨한 '사랑 고백' 독서본능을 깨우다
책 사용법 - 정은숙 지음/마음산책 |
“재주는 부지런함만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 깨닫는다는 한 글자는 도덕의 으뜸가는 부적이다. 옛 사람의 책 가운데 경전과 역사적 종류 같은 것은 한 글자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 나머지 책 중에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하나하나 정밀하게 궁구하여 심력을 나눌 필요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60, 70장쯤 된다고 치자. 그 정화로운 것을 추려낸다면 십수 장에 불과할 것이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정작 그 핵심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한다. 오직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손 가는 대로 펼쳐 봐도 핵심이 되는 것에 저절로 눈에 가서 멎는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단지 십수 장만 따져보고 그만둘 뿐인데도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전부 읽은 사람의 배나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두세 권의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백 권을 읽고, 효과를 보는 것 또한 남보다 배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문장가 홍길주가 쓴 <수여방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매우 자신만만하고 패기가 넘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나는 책 읽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8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지만, 아직까지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는데 지은이는 역시 이 구절을 인용해 놓고는 “아직 두세 권의 책을 읽고 백 권의 효과는커녕 한 장의 이해 정도밖에 못하는 나로서는 (홍길주의) 이런 경지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라고 말한다. 26년차 출판 편집자이자 출판 경영자라는 지은이의 프로필을 감안하면 이 말엔 겸손이 어느 정도 섞여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키보드로 몇글자만 딸각거리고 엔터키를 누르면 정보가 차고 넘치는 시대 아니던가. 바야흐로 정보의 ‘검색’과 ‘요약’, 그리고 ‘효율’이 생존의 필수조건이 된 것이다. 책을 ‘그냥’ 읽는 사람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책읽기 방법 혹은 독서법에 관한 책들도 적지 않게 나오는데 대체로 전투적·전략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읽을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책읽기의 대가들이 썼다는 이런 책들은 나름의 가치가 크다 하겠다. 그렇지만 이런 책들은 왠지 숨이 막힌다.
‘아날로그적 독서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는 지은이가 이 책의 제목을 ‘독서법’ 혹은 ‘책읽기 방법’ 등으로 달지 않고 굳이 ‘책 사용법’이라고 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아예 “책을 보지 않고 책을 발견할 수는 없고, 또 조금조금 책을 보는 사이에 저절로 어떤 ‘도’가 생긴다는 우리 선인들의 말을 귀담아볼 때, 책읽기에 무슨 왕도 운운하는 광고 문구에 현혹될 일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거니와 명백히 책읽기에 관한 책이다. 또한 “책을 보는 사람은 지혜로워질 가능성이 아주 높은 사람이다”라며 자신이 읽었던 책에서 참고가 될 만한 원문을 인용해 독서를 권하고 있다. 하지만 독서법을 표방한 여타의 책들과 다른 점은 정보습득과 자기계발의 도구로만 축소되고 있는 책의 효용과 외연을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심지어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책의 구성도 내용도 매우 느슨하다. 책을 왜 읽는가로부터 시작해 서재와 도서관 등 책이 있는 공간, 작가·편집자 등 책을 만드는 사람들, 대화·치유·오락·지식·인간학으로서의 책의 기능, 책의 역사, 책을 잘 읽기 위한 계명들까지 망라하고 있지만 ‘밑줄 쫙 긋고 별표 세개!’ 하는 식으로 읽을 대목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독서는 재미로부터 시작하는 것, 책읽기의 멘토로는 고전이 최고, 어렵게 느껴지는 책을 밀쳐두고 쉬운 책부터 시작하기 등 지은이가 제시하는 책읽기 방법이라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허무할 정도로 낯익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느슨함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는 매우 강렬하고도 촘촘하게 계산된 맛들로 꽉 찬 에스프레소 커피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하지만 알듯 말듯한 풀향기 빼고는 여백만 존재하는 녹차의 느슨함에서도 감동을 받는다. 후자가 바로 26년차 출판 편집자가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독자들에게 넌지시 그러나 다분히 전략적으로 권유하는 ‘책 사랑법’이다. 이 전략은 꽤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의 책읽기 경험을 따라가다보면 읽는 나 자신의 책읽기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잔잔한 흥분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20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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