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구워진 글

[기획회의 여는 글]가을 단상

점점 주제넘은 짓을 하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 같다. 작년 가을쯤이었다. 계간지 '창비'에 실을 서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솔직히 속으로 기뻤다. 좀 흥분도 했던 것 같다. 작은 서평글이긴 하지만 계간지 창비에 내 글이 실린다는 것은 영광스러워할만한 일이니까. 그 이후로 길고 짧은 글들을 써달라는 청탁을 간간이 받았고 그렇게 쓴 글들을 이곳에 갈무리 해두기도 했다.

'기획회의'는 내가 출판을 담당하고 나서 알게된 잡지다. 출판계 동향과 이슈를 잘 정리해서 빠르게 전달하는 잡지라서 많은 출판계 분들이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기획회의에 실린 기사를 우리 지면에 소개한 적이 몇번 있고, 기획회의에서 청탁한 원고를 쓴 적도 한번인가, 두번인가 있다. 그런데 이번엔 여는 글을 써달라기에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감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편집자가 온갖 미사여구로 꾀었고, 결국은 주제넘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넘어가고 말았다.

내가 쓰는 기사나 글의 1차 독자인 내 처는 내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딱딱한 성격의 글은 제법 쓰는 것 같은데, 소프트한 것은 좀 어색하다고 한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다. 성격이 별로 재미없는 성격이라 그럴 것이다.



가을 단상

지금의 내 나이보다 일찍 세상을 뜬, 그래서 항상 쾌활하게 웃는 청년의 얼굴로 남은 김광석은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쓴다고 우울한 목소리로 노랠 불렀다. ‘쨍’ 소리가 날 정도로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이든, 비 개인 흐린 가을 하늘이든 어깨가 쉽사리 펴지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가을이라는 계절의 특성으로 봐야할 것이다. ‘달랑 두 장 (또는 한 장) 밖에 남지 않은 달력’ 운운하는 진부한 표현이 이 시절만 되면 반복해서 말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 한 해를 마감하고 정리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 몸이 먼저 알게 된다. 유독 가을이 되면 시심詩心이 자극받아 이런저런 귀절들을 끼적대거나 읊조리는 사람이 많은데, 구비구비 구절양장 꼬이고 뒤섞인 개인사와 세상사를 장문의 글로 묘사하기 보다는 단 하나의 문장 또는 몇개의 단어로 압축하는 것 또한 이 계절과 어울리는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책 제목을 정하는 일도 어찌보면 ‘가을의 작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추수한 원고를 가지런히 한 다음 방아를 찧어 먹기 좋고, 보기에도 좋게 만드는 작업에 다름 아니니까 말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책 제목은 책에 담긴 내용을 단순히 압축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 한권의 책을 평가함에 있어서 책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만큼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확인해두어야 할 것은 제목에 부여된 상업적인 측면이다.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대중의 소비를 기대하고 만들어진 작품은 제목이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한권의 책이 독자와 만날 때 첫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무래도 제목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편집자들이 책 제목을 정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목적이 오로지 책의 이름을 분식粉飾하는 것에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현실에서 그런 사례를 발견한 적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미인의 기준마저도 시대마다 변하지 않던가. 책 제목이 오로지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 팔리는 것만 염두에 두고 정해졌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트렌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누구나 인정하는 명저의 제목들, 무릎을 칠 정도로 기발한 제목들, 간명하면서도 한편의 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울림이 깊은 제목은 독자를 유혹하는 장식 이상의 웅숭깊은 의미와 의지, 그리고 강렬한 외침 같은 것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감히 말하건대 책 제목은 저자를 포함해서 발행인과 편집자 등 책의 생산자가 독자와 소통하는 좁지만 강렬한 통로이며,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때로는 한권의 책 제목이 그 시대를 규정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하고, 제목 자체가 그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는 넓고도 깊은 법이다. 내가 참여했던 특별기획시리즈가 올해 초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는데 이 말의 뜻을 정확히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8분의 1 저자였는데 이리저리 제목을 궁리하고 편집자와 상의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도 짧고,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읽기 쉬운’ 등의 제목을 찾아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됐다.


역시 ‘프로’들이 만들어낸 기발한 제목들을 감상하며 전율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올해 나온 책들 가운데 지금 이순간 내 머릿속을 맴도는 책의 제목들을 떠올리며 내가 느끼는 전율은 두 가지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 책의 성격과 주장하는 내용을 절묘하게 표현한 ‘센스’들이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빛난다.


문제는 그런 제목들이 담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묵시록적인 진단이 안겨주는 충격, 그러한 진단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우리 사회의 몰상식함과 역설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떠올려본 몇 개의 책 제목을 가지고 2010년을 재구성 해보자. 나에게 2010년은 『두려움 없는 미래』라는 다소 역설적인 제목과 함께 시작됐다. 그러나 상상력에 한계를 두지 말고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자는 메시지는 당장 눈앞의 모순인 『내가 살던 용산』에 가려지고 말았다. 동요 ‘고향의 봄’의 들머리인 <나의 살던 고향은>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이 제목은 ‘꽃 대궐’과 ‘불탄 폐허’가 대조를 이루면서 ‘용산’을 외면하고 있던 내 가슴을 후볐다. 2010년에 나온 문제작의 반열에 오르기에 분명한 『삼성을 생각한다』. 삼성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삼성을 ‘말’하는 것도 아닌 그저 삼성을 ‘생각’한다는 것-물론 그들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겠지만-여하튼 삼성을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우리는 새삼 깨달았다. ‘빅 브러더’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그분’이 정한 이외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 좀 이르긴 하지만 2010년을 대표하는 책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이야기는 너무 많이 나왔다.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성공요인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만큼 김빠지는 일은 없거니와 이미 많은 이야기가 나온 책에 이야기를 덧붙이려면 식상함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소개된 이 책의 제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곰곰히 돌아볼 가치는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정의‘는’ 무엇인가와 정의‘란’ 무엇인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또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뒤에 물음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마이클 샌델이 현실에서의 실천적 문제에 관한 질문들을 묻고 답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학술적인 이 책이 대중적 열광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는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덕을 보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정의는 이런 것입니다’라는 설명을 듣길 기대하기 보다는 ‘대체 정의란 게 뭐야’라는 울분을 풀기를 원했던 것 아닌가?


모순과 역설, 부조리와 비참. 2010년이 저물어 가는 가을, ‘주옥같다’고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울적하게 만드는 제목들에서 내가 읽은 것들이다. 역시 가을엔 김광석이 제격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노래 중엔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모순어린 제목의 노래도 있었구나!
   <기획회의> 283호(2010.11.5) 여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