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3/반죽글

[비공식 리뷰]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좁게는 출판 담당, 넓게는 문화부 기자가 다른 부서 기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예를들어 정치부 소속 기자는 출근해서 정치인, 관료들을 만나고 정책과 공익에 관한 사안을 취재하고 고민하고 기사를 쓴다. 그런데 그가 퇴근해서도 '정책'을 검토하고 '공익'에 대해 고민할까? 물론 그렇게 하는 '훌륭한' 기자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부 기자를 찾아내는 건 풀밭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는 것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문화부 기자는 일과 생활속 오락의 거리가 매우 좁은 편이다. 자기가 담당하는 분야를 극도로 싫어하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대체로는 영화면 영화, 영극이면 연극, 미술이면 미술, 또는 문학이면 문학,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담당한다면 쉬는날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그 장르의 작품을 감상하기도 한다.

이 책을 출퇴근 버스 안에서 완독했다는 얘길 하려다보니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다. 여하튼 출근해서 내가 하는 일이 책을 검토하고, 훑어보고, 읽는 일인데 출퇴근 시간에 또 책을 펼치게 된다는 얘기다.(만날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술 퍼먹은 다음 날 아침 출근할 때나 재수좋게 앉을 자리를 차지할 경우는 그냥 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 생활을 꽤 하다보니 출퇴근 독서용 책을 고르는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뭐 요령이라고 하니까 대단해 보이는데, 그런 건 아니고 소프트한 책을 골라 아이스크림 핥아먹듯 며칠씩 나눠서 읽는거다. 그러다보니 소설이나 에세이류가 자주 손에 잡힌다. 청소년 소설도 버스 독서용으로 강추할만하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10점
한창훈 지음/문학동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몇쪽만 읽어봐도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바다+낚시+생선에 관한 책이고, 배꼽을 잡을 정도로 웃기는 책이며, 가끔가다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을 만난 것처럼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책이다. 아, 참! 중요한걸 빼먹을 뻔 했는데 군침을 질질 흘리게 만드는 맛있는 책이다. 내심 욕심이 났으나 리뷰어를 정하다보니 후배가 공식 리뷰를 쓰게 됐다. 대체로 이럴 경우 욕심에 책을 쟁여놨다가 몇주 지나면 책장의 대기자 대열로 밀려나는게 일쑤인데 이 책은 내 출퇴근 가방에 용케 자리를 잡았다.

'생계형 낚시꾼.' 2년전 고향 거제도에 들어가 정착한 소설가 한창훈은 자신을 그렇게 정의했다. 책 내용을 보아하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반찬으로, 안주로 쓰기 위해 낚시를 한다. 그리고 '죽인 것은 다 먹는다'는 신조를 실천하고 있다. 그는 틈만 나면 바닷가 방파제에 나가, 삼촌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후배가 하는 가두리 양식장 주변에서 낚시를 한다. 책에 실린 사진으로 보자면 회를 뜨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그가 얘기하는 것은 두가지다. 그가 먹기 위해 낚으려는 바다생물(대체로는 물고기인데, 톳이나 김 등 해조류도 있다)의 특성과 그에 얽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추억, 그리고 잡은 것들을 맛나게 먹기 위한 비법이 그것이다. 이 책은 '중앙선데이'인가 하는 매체에 연재됐던 것인데 작가가 글을 쓸 때 세운 첫번째 원칙이 아마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고, 입맛을 다시게 한 다음 마침내 입 밖으로 침을 질질 흘리도록 만들리라'가 아니었을까 한다. 나는 이 책을 버스 안에서 읽으면서 몇쪽 읽다가 쉬고, 몇쪽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고 해야 했는데 침을 꿀떡거리는 소리가 너무 민망했고, 계속 읽어가다간 나도 몰래 침을 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내는 쇠고기와 모자반이 준비되면 일부러 소주를 마신다. 밤새 퍼마신 다음 날 시뻘건 눈으로 어, 어허, 소리를 내며 국을 퍼먹는다. 먹는 행위가 전투 같기도 하고 의약품 투여 같기도 하고 높은 강도의 몰입 같기도 하다. 그렇게 먹으면 더 맛있느냐고 물어보면 "이건 보대끼는 맛으로 먹어"라고 한다. 속이 쓰리고 괴로울수록 더 맛있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43쪽, 모자반편)

예전 거실에 텔레비전이 노상 틀어져 있던 시절 '1박2일'이나 '6시 내고향', 또는 음식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때면 어떤 음식이 맛있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거나 '으아~'하고 감탄사를 길게 늘이는 것 말고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맛에 대한 한창훈의 묘사는 질감이 느껴진다. 와인을 품평할 때 그러는 것처럼 '깊은 바다의 맛이 난다'거나 '바람의 향기가 느껴진다'거나 하면서 황당한 비유를 갖다대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비유를 동원한다.

"글쎄 말이요. 같이 노래미 낚으러 가자 해놓고서 한번도 못 가본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요......회를 가리키면서 좀 먹어보소. 얼른 먹으시요. 이 말만 서로 하고."
"......"
"내가 가난해서 갔지? 그랬지? 이 소리만 하면서 울더라고. 결국 그 사람만 소주 한 병 마시고 밥상 위에 젓가락 한번 못 대보고 그냥 나왔소."
은미 엄마는 축축해진 목소리로 말끝을 맺었다. 궁금증이 풀어진 우리는 건배를 하고 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망연자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면서 말했다.
"가야겠구만.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자꾸 생각이 나."
철이 엄마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헤어졌으니 생각이 날 만도 하지."
"그게 아니야."
"아니면?"
"노래미회가."
"......"
"먹고 올 것 그랬나?" (131~132, 노래미편)

남의 아내가 됐지만 10년전 연애하다 헤어진 남자를 재회한 여인네가 가슴속 응어리를 털어놓는 장면이다. 자기가 차버린 사내에 대한 미안함을 젓가락 한번 대보지 못한 노래미회에 대한 그리움이 이긴 상황이니 그 노래미회는 맛이 어떻길래?(여기서 다시 한번 군침 꿀꺽)

내가 읽은 한창훈의 소설은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홍어>와 소설집 한권인데, 소설집의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둘 다 바다를, 정확히는 바닷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가 사는 거문도가 있는 '남도'는 그 단어 자체의 강렬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남도의 바닷가-정확히는 섬이다-를 배경으로 하는 한창훈의 소설은 이런 이미지를 넓게 펼친 다음 천연조미료를 가미한 것들이다. 그 조미료는 '한'과 '해학'과 '질퍽한 성(性)' 이야기다. 특히 질퍽한 성적인 농담은 '에로티시즘'이라고 하기보다는, '알만한' 사람은 은근히 미소짓고 급기야 키득거리게 만든다.

머리가 부숭부숭하고 얼굴에 잠이나 술기운이 덜 가신 인물들이 운동복 바지에 슬리퍼 끌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면 딱 동네 남자들이었다.
현장에는 인부들이 마시는 막걸리가 노상 준비되어 있고 솥에 홍합이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별생각 없는데 굳이 주겠다니 인정으로 받는다는 투로 한잔 받아 마시고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발랑 벌어진 홍합을 솥에서 들고 까먹는데 어느 누구라도 입 다물고 그냥 먹는 이가 없었다.
"참말로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겼네."
간밤에 보던 것과 단순 비교하는 측이다.
"어째 이 불쌍한 것을 이렇게 모지랍스럽게 쌂어분다냐. 얌전히 있는 것을 끄집어올려, 패대기쳐, 불로 쌂어, 빤스 벳겨, 아이고 불쌍한 거."
측은지심 측도 있다.
"제미, 뭐 묵겄다고 쫙 벌리기는. 이이고, 불가진 공알하고는. 니미. 터럭도 드럽게도 많다."
이렇듯 세심한 관찰형도 있었다. 그렇게 한마디씩 하며 훌러덩 까먹고는 인사로 책임자 붙잡고 요즘 시세가 어떻니, 단가가 저떻니 마진율은 얼마나 되니, 몇 마디 뒤를 늘리는 것으로 모양새를 맞추었다. -<홍합> 중에서   (116~117, 홍합편)

책에서 냄새가 난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이 책은 제대로 냄새가 난다. 집나간 며느리를 돌아오게 만든다는 전어 냄새, 생생한 생선회에서 풍겨오는 약간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냄새.... 아흐.

다행히도 나에겐 2주전 근처 농수산물시장에서 사다 토막내서 쟁여놓은 두툼한 삼치 덩어리들이 있다. 버스를 타고 퇴근하면서 이 책을 쬐금 읽고 나서 집에 가선 샤워하고 얼려놓은 삼치를 살짝 녹인다음 그릴에 지글지글 굽는다. 그리고 막걸리 한잔! 뭐, 한창훈이 이 책에서 차려놓은 진수성찬엔 비할바 못되겠지만 그것들은 아예 맛을 못 본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한번 맛봤다면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하고 뚜렷할텐데, 맛을 상상하는 것에 비하면 다시 먹고 싶다는 욕구가 참기 어려울 정도일테니 말이다. 여하튼 오늘도 집에 가면 삼치구이다. 이 글을 쓰면서 군침을 너무 삼켰더니 배가 부를 정도다.

"저것을 서방이라고 믿고 사는 내가 미친년이지."
다시 병이 도졌군, 남편은 생각한다.
"뭐에 씌어서 저 웬수한테 시집을 왔을까. 그때 그냥 갈치배 선장한테 갈걸."
"또 그 소리."
"아이구, 속도 타는데 항각구 국이나 한 그릇 시원하게 먹었으면 좋겠네."
"아, 갈치 사주면 되잖아."
"시장 갈치가 그 맛이 나?"
(13쪽, 갈치편)
 
(20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