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는 학년마다 수필 작품이 꼭 수록돼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기억나는 작품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와 피천득의 ‘인연’이다. 중·고교를 다니던 시절 국어 시험에 두 작품의 지문이 단골로 나왔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하기도 했고, 두 작품 모두 어찌보면 청승맞게 느껴지는 페이소스가 담겨 있어서 나름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피천득의 ‘인연’ 자체가 일본인 소녀와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거니와 작자에 대한 이런저런 논란을 나중에 알고 입맛이 좀 쓰긴 했지만 어린 시절 읽었던 글이어선지 느낌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
그런데 수필이라는 장르를 정의하면서 참고서에서 맨먼저 나왔던 ‘생각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는 항목은 요령부득이었다. 기자랍시고 잡글을 써온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생각 가는대로, 붓(지금은 컴퓨터로 글을 쓰니 손가락이겠군!) 가는대로 쓰다’라는 행위가 성립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속된말로 ‘야마’ 없는 글이란게 쓰일 순 있겠지만 그렇게 쓰인 글이 당최 읽을만한 글이 될 수 있을까?
교양 노트 -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석중 옮김/마음산책 |
그럼에도 정말 힘빼고, 혹은 자유자재로 힘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소재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쓴 것처럼 보인 글들이 있다. ‘요네하라 마리’라는 일본인 작가의 책이 내 책장에 모셔진 것은 꽤 됐다. 출판 담당기자를 하던 시절 신간으로 들어왔던 것인데, 출판 담당기자는 표지에서부터 힘과 인상을 팍팍 써대는, 소위 말해 ‘선이 굵은’ 신간들과 씨름하기에도 벅찬지라 매우 일본인스럽기도 하고, 반대로 일본인스럽지 않기도 한 이름의 작가가 쓴 책을 미뤄둘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책장에 이 책을 모셔둔 것은 주마간산으로 휘리릭 넘긴 책장에서 뭔가 깨소금 같은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금요일 저녁 우연히 요네하라 마리의 ‘교양노트’를 뽑아 읽었다. 2010년 11월 1쇄 번역본이다.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80가지 생각 코드’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요미우리 신문 일요판에 연재했던 글들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요네하라 마리에 대해 검색하다보니 고종석 선생이 정리해놓은 프로필이 눈에 띄기에 링크를 거는 것으로 갈음한다.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1> 요네하라 마리 - 정숙한 미녀 ) 짧막한 글들이라 가끔씩 틈날 때 보려고 했는데 주말 동안 다 읽게 됐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성장배경을 지닌 저자의 위트, 일상생활 속의 에피소드에서 비범함을 길어오르는 눈매,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전복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의식 등이 짧은 글 속에 펼쳐진다. 기가 막히는 러시아의 재담을 소개하는 대목에선 배꼽을 잡다가도, 어떤 사물과 단어의 기원을 쫓아 올라가서 의미와 변용을 추궁하는 대목에선 사뭇 진지해지게 만든다. 책은 너무 유쾌하게 읽었지만 내 마음 한켠에 남은 감정은 ‘주눅든다’와 ‘부럽다’이다.
이런게 바로 ‘생각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쓴 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요네하라 마리는 이 책에 실린 ‘자유라는 이름의 부자유’ 글에서 나의 이런 생각을 반박했다. ‘15년쯤 전에 어느 기특한 편집자에게서 “어떤 주제라도 좋습니다. 언제라도 채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두터운 배려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주일 뒤인 이번 달 15일까지 원고지 30매, ‘나 올로 여행’이라는 주제로 부탁합니다”하고 시간과 양, 주제가 한정되면 거짓말처럼 빠르게 원고가 진척된다.’(248쪽)
심지어 요네하라 마리는 신문 연재를 제안받을 때 글자수 제한은 있지만 더럽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주제를 제외하곤 ‘자유롭게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자유가 주어져서인지 매번 글의 주제를 잡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다보니 원고보다 마감이 빠른 일러스트레이터로부터 심한 독촉을 받게 됐고 주제라도 먼저 알려달라는 독촉에, 언젠가 “그럼 그림을 먼저 그려줘요. 그림에 맞춰 원고를 쓸테니까요”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방식이 끝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전달받은 그림을 실마리로 책을 읽거나 주위를 관찰하면서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깨닫기도 했단다.
이로써 지난 주말 내 눈을 즐겁게 해준 요네하라 마리라는 작가 역시 ‘생각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글을 쓰지는 못했다는 것이 증명됐지만 ‘교양노트’는 힘을 빼고 글을 쓴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만 되면 얼마나 멋진 글을 만들게 하는지도 깨닫게 해줬다.
몇마디 더 덧붙이자면 요즘은 다른 사람이 힘빼고 하는 얘기 혹은 글을 볼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어서인지 그런 글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다들 자기의 주의, 주장을 한껏 집어넣어서 칼 같은 증빙을 빽빽하게 덧붙여야만 ‘시원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허기사 어처구니 없는 것들을 증거라고 나열하면서 목청만 높이는 것들이 더 많지만. 맨날 ‘한가한’ 책들만 읽고 살 순 없겠지만 눈밝은 편집자·기획자들이 고맙게도 골라 내놓은 펴낸 ‘한가한’ 책들이 안겨주는 청량감을 무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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