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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내가 읽은 책

단 한권의 책도 너무 고귀하게 여겨지는 곳 '유럽의 명문 서점'

세상 사람들과 맺게 되는 인연이 천차만별, 기기묘묘하듯이 책과 맺어지는 인연 가운데서도 유별난 것들이 있다. 그 책에서 얻은 지식이 너무 풍부해서, 그 책이 주는 감동이 너무 깊어서, 또는 그 책의 저자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어서 등등 어떤 책을 각별히 기억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책과 맺게되는 인연은 거의 대부분 그 책을 읽거나 감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주 내가 두고두고 각별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책 한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실은 이 책을 받아들고 매우 흥분했었다.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는 순간 책을 펼쳐 보기도 전에 흥분이 밀려왔다. 책 제목은 '유럽의 명문 서점'이다.

유럽의 명문 서점 - 10점
라이너 모리츠 지음, 레토 군틀리아지 시몽이스 사진, 박병화 옮김/프로네시스(웅진)
내가 의도치 않았고, 이 책이 한국에 번역출간되기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이 책이 한국에서 나오는데 나오는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이 책 어딜 펼쳐봐도 내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나를 계기로 어떤 책이, 그것도 예쁘고 고급스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연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가을 나는 국제 도서전을 취재하기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던 길에 프라이부르크라는 도시를 방문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거니와 거리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서점은 두고두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게으르고 무덤덤한 편인 내가 아래와 같은 호들갑스러운 방문기록을 남겼으니 그 느낌이 얼마나 좋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동네 산책]프라이부르크 '숫돌서점' 이야기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이 글을 쓰기 위해 관련 정보를 여쭸던 분이 <유럽의 명문 서점>이라는 책을 번역출간한 출판사의 대표이시다. 내 부탁으로 '숫돌(처럼)서점'(Buchhandlung zum Wetzstein) 관련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책이 독일에서 출간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태리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에 있는 '명문' 서점 20곳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물론 숫돌서점도 포함돼 있다. 저자가 명문서점의 기준을 명시적으로 밝히짖는 않았지만 대체로 역사가 길고 자신만의 특색을 가지고 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는 곳을 골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은이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이렇듯 크든 작든 간에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서점 스무 곳을 골라 글과 사진으로 소개하였다. 서점 하나 하나의 개성을 들여다보면서 다양한 면모를 지난 열정적인 주인장들을 만날 수 있다. 밀라노의 출판인 잉게 펠트리넬리가 언젠가 말했듯, 무엇보다 "고객을 유혹하는" 서점을 중심으로 선정했다. 건축 면에서 걸작이라는 평판을 듣는 곳도 있고, 외진 곳 깊숙이 자리 잡아 피난처 구실을 하는 곳도 있으며, 시대 조류에 반발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가 하면, 놀랍도록 창조적인 정신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도 있다."

숫돌서점 내부 모습. <유럽의 명문 서점> 저자는 이 서점의 내부 분위기가 마치 서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고 표현했다.

이제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영국에서 몇달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 유명하다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포드 대학이 있는 곳에도 당연히 가보았다. 프랑스에도 잠깐 들를 기회도 있었다. 지나놓고 생각해보니 유럽을 가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는 곳마다 서점을 빠뜨리지 않았던 것 같다. 유럽의 서점들은 대체로 책들이 독자를 압도한다기 보다는 나름 도도한 포즈를 취하고 선채 이래도 나를 한번 서가에서 뽑아서 보지 않겠느냐고 유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유럽이라고 해서 전자책의 파고가 비켜가거나 오프라인 서점이 마냥 활황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의 모든 서점들이 다 선전하고 있을리는 만무하다는 뜻이다. 오프라인 서점의 퇴락의 속도가 우리보다 더딜순 있어도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현상은 비슷할 것이다.

이제 '서점'이라는 공간은 우리와 동시대에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왠지 향수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년전 번역된 <노란 불빛의 서점>이라는 책이 있다. 오랫동안 서적상을 했던 지은이가 책과 서점에 얽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나갔는데 나에게는 '노란 불빛의 서점'이라는 제목이 내용보다 더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상쾌한 밤 공기 속 노란 불빛을 받으며 고즈넉히 손님을 기다리는 서점을 떠올리면 가슴 한켠이 괜시리 먹먹해지는 것은 왜일까.

노란 불빛의 서점 - 10점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문학동네

여하튼 내가 죽기전 <유럽의 명문 서점>이라는 책이 소개한 서점 20곳 가운데 몇곳이나 가볼 수 있을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숫돌서점 한군데라도 가봤다는 것이다. 헌데 꼭 가봐 무엇하리. 이 책의 페이지들을 야금야금 넘기며 마치 내가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을법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