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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해 고객들이 맡긴 돈으로 흥청망청 돈잔치를 벌이다 영업정지를 당한 저축은행들의 황당한 짓거리들이 연일 드러나고 있다. 저축은행에 크든 작든 돈이 묶인 사람들은 말 그대로 피가 마르는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저축은행을 감독해야 할 권한과 의무가 있는 금감원 직원들이 저축은행과 짬짜미가 되서 뇌물을 받아먹거나 비위 행위를 눈감아 줬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 저축은행과 상관 없는 일반인들의 공분까지 자아내고 있다. 금감원을 해체하고 완전히 판을 새로 짜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그간 금융감독기구의 문제점이 숫하게 제기돼 왔지만 한번 권력을 잡은 기관은 자신에 대한 비판론까지 잠재우면서 악착같이 권력을 유지한다. 권력의 달콤함을 너무도 잘 알기에 모든 조직원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친다.

그런데 그 권력의 원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 개개인, 즉 주권자인 시민이 그 권력의 주인이다. 다만 우리 개개인이 생업을 영위하면서 금융기관을 감독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공공기관을 만들고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을 배치해 대신 감독하도록 하는 것이다. 시민이 주인이고 금감원은 대리인인 셈이다. 저축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 역시 주인이고, 저축은행은 대리인인 셈이다.

작금의 사태는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인의 이익을 해치는 극심한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리인의 주인 배신 행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인-대리인 문제는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현상이었다.

 


학술적으로 주인-대리인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기인하며, 도덕적 해이가 주인-대리인 문제의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설명된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큰 과수원을 여러개 가지고 있다. 과수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당신이나 당신 가족의 노동력 만으로는 과수원을 관리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과수원을 관리해줄 사람을 고용한다. 과수원을 성실하게 관리하는 조건으로 임금을 지불하는 계약을 관리인과 체결한 것이다. A라는 과수원을 관리인에게 맡긴 당신은 이제 안심하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관리인이 과수원을 성실하게 관리해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관리인에게 A과수원을 맡긴 이상 이 과수원에 얼마만큼의 사과가 열렸는지,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 등은 당신보다 관리인이 더 잘 안다. 이게 바로 정보의 비대칭성이다. 관리인이 가진 정보가 주인인 당신이 알고 있는 정보보다 많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던 관리인은 어느날 꾀가 생긴다. 올해 사과가 평년보다 많이 열렸다. 주인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 만약 주인에게 사과가 작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확됐다고 말하고, 여분의 사과는 주인 몰래 시장에 내다 판다면 많은 과욋돈을 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해이 행위다. 주인과의 계약을 위반하고 사익을 추구한 것이다.

만약 이런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주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이 관리인을 감시하는 감독관을 두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관리원과 감독관 둘이 짬짜미를 해 합동으로 주인을 속일 수 있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저축은행사태의 본질이다. 고객의 돈을 맡은 저축은행은 고객의 이익에 반하는 사익추구행위를 했고, 이들을 감시하라고 채용된 금융감독원 직원들 역시 임무를 부여한 시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익추구행위를 한 것이다.

관리인을 감시하는 감독관을 감시하는 감독관을 또 두는 건 어떨까? 그런데 관리인을 감시하는 감독관을 감시하는 감독관 역시 대리인인 것은 마찬가지다. 관리인을 감시하는 감독관을 감독관 역시 도덕적 해이에 빠질 개연성은 충분하다.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연구해온 사회과학자들은 주인-대리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안들을 제시했다. 대리인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사익추구의 유혹을 이겨낼만큼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이 그중 하나다. 전문용어로는 '유인(incentive)구조'를 적절하게 설계한다고 말한다. 저축은행 등 금융기관 종사자들, 금융감독기관 종사자들의 연봉이 매우 높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데 도덕적 해이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어떤 학자들은 적절한 보상규모를 추정하기 위한 수식 w = a + b(e + x + gy)까지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무한해서일까? 저축은행과 금융감독원 직원들은 높은 연봉을 받고도 주인을 배반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복수의 대리인을 두어 서로 경쟁하고 감시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주인-대리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발생하므로 정보공개 및 공유를 대폭 확대하는 방법도 있겠다.

저축은행 사태는 현재 진상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더 많은 도적적 해이 사례가 드러날지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론 금융감독 기능을 분산시키는 것이 유력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할지도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여론의 질타가 너무나 따가워 그들은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정말로 그들의 밥그릇을 나누고 개혁하겠다고 하면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자원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할 것이다. 그럴수록 시민들이 고용한 대리인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정부와 국회가 얼마나 큰 의지를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시민은 대리인에게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라고 압박할 수 있고, 심할 경우 해고할 수 있는 할 수 있다. 결국 시민인 우리의 관심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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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톨 2011.06.06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극적으로는 주인을 배반(?)하면 패가망신 하도록 만드는게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인을 배반하는게 더 이득이 되지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주차장 한켠의 화단에 텃밭을 일군다. 4월 초에 계분 퇴비를 2포대 사다가 뿌리고 갈아엎어 놓았다. 큰 삽이 없어 꽃삽으로 하다보니 손에 물집이 살짝 잡히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묵힌 다음 상추씨앗과 치커리 씨앗을 구해 뿌렸다. 씨앗을 뿌린게 4월16일. 그런데 일요일인 17일 출근했다가 밤늦게 돌아와보니 속상한 일이 발생했다. 두둑을 만들어 포근하게 만든다음 씨를 뿌렸는데 그 자리를 어느 놈의 예쁜 발자국이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은 상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발자국이 깊숙이 박힌 자국을 그대로 두었다. 나중에 그 자리에서 싹이 올라오지 않으면 씨앗을 새로 뿌려줄 생각이었다.

씨를 뿌리고 일주일이 지나는 사이 비가 두어차례 내렸다. 씨가 뿌려지면 필요한 것이 높은 온도와 물기이다. 날씨는 상대적으로 쌀쌀했지만 4월 중순 이후이니 씨앗이 싹을 틔우는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토요일인 23일 혹시나 싶어 화단을 살폈다. 상추는 아직 기미가 없었는데, 치커리 몇녀석이 싹을 틔워 콩알만하게 모습을 보였다. 귀여운 녀석들. 앞으로 녀석들을 채취해 먹으려면 한참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렇게 2011년 텃밭가꾸기가 시작됐다.


누군가의 발이 짓이겨 땅이 움푹 패인 자리에서도 싹이 올라왔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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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으니 대충 계산하면 "내 인생의 절반을 '학생'으로 살았다"는 명제가 아직도 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몇년만 지나면 내 인생에서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살았던 시간이 절반 이상이 된다는 얘긴데, 몇년 후를 기다려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올해부터 나는 새로운 계층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자동적으로 '학부모'가 됐다.

학부모 또는 학부형이라는 호칭이 아직은 낯설게 다가온다. 갗난 아이의 부모, 유치원생 아이의 부모와는 다른, 새롭고도 중요한 역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지난해부터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의 나이가 화제에 오르면 "운명의 날이 다가온다"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는데 이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공부는 아이가 하는 것이지만, 아이가 공부를 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 환경을 만들어주고, 때로는 좀 더 공부를 하도록 적절한 자극과 압력을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또는 임무이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날이 나에게 '운명의 날'처럼 여겨졌던 것은 단순히 학부모로서의 역할이 더해지는 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이를 학원에 보낼 것인가, 안보낼 것인가'라는 선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는 '극도의 경쟁 일변도로 변해버린 한국의 교육 시스템 안으로 내 아이를 들여보내면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얘기지만 대학생 시절 과외 선생은 해봤어도, 중고교 시절 과외를 받아본 적도, 학원을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는 나이기에 '적절한 선'에서 경쟁을 유발하고 '균형을 잃지 않는 수준'으로 사교육을 시킨다는 교과서적인 답을 찾기란 쉽지 않음을 예감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이의 교육환경을 위해 세번을 이사했다는 고사(古事)는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학교엘 드나들고, 밤잠 세워가며 아이의 입시를 위해 골몰하는 부모들을 위한 고전적인 모델이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맹자의 어머니가 뭐 그리 대순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을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 강사의 수업에 등록하기 위해 새벽부터 학원 앞에서 줄을 서고, 아이를 여름방학 해외영어캠프에 보내기 위해 안먹고 안입으며 비용을 마련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서라면 '달러빚'이라도 낼 준비가 돼 있는 부모들 말이다. "한국의 엄마들은 다 맹모가 될 자세가 돼 있는데 문제는 아이가 맹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다.

타이거 마더 - 10점
에이미 추아 지음, 황소연 옮김/민음사

미국에서 이른바 '호랑이 엄마(타이거 마더)' 논란을 일으킨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 추아의 책이 최근 국내에 소개됐다. 그의 책은 미국 언론에서 이미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호랑이 엄마'라는 말이 상징하듯 양육, 특히 교육 문제에서 매우 엄격하고 때로는 강압적인 엄마의 스타일에 대해 찬반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덩달아 그의 책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마당에 단정적으로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한국에서 그 책이 거둘 성공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 편이다. 에이미 추아의 큰 딸이 하버드와 예일에 동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말이다. 저자처럼 끈기를 가지고 아이를 양육하기가 결코 쉬운일은 아니겠지만 한국의 엄마들은 아이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호랑이가 아니라 사자, 또는 더 무서운 무엇이든 될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이미 추아의 말은 그닥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국내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다는, 그래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자녀를 보내고 싶어하는 카이스트에서 올해들어 4명의 학생이 자살을 하자 이를 바라보던 사회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사 알게된 일인양 문제점을 들춰내고 한때는 '개혁'의 선봉장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던 서남표 총장에게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서 총장에게 쏟아지는 비판의 요점은 '징벌적 등록금제'를 비롯해 그가 도입한 학사정책들이 아이들이 견뎌낼 수 없을 정도의 경쟁을 강요했고, 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학생들이 극단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서 총장은 작금의 사태를 불러온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그 모든 책임이 서 총장에게만 있는가? 카이스트 학생 4명이 죽어나가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를 전혀 몰랐던 것인가? 김예슬씨가 작년에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대를 스스로 자퇴하면서 붙인 대자보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정말로 대학들이, 대학생들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단 말인가? 다시 말해 우리는 이미 '내 자식' 앞에서 맹모이자 타이거 맘이자 서남표였거나, 서남표와 공범이 아니었냔 말이다. 아니면 우리 사회 자체가 이미 카이스트처럼 극도의 경쟁사회로 변해버린지 오래이기에 대학의 문제는 그리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인가?

문제는 또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 최고의 영재들'이라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사이 놓치기 쉬운 것들 말이다. '지방대' 축에도 들지 못해 '지잡대'라는 자조섞인 용어로 불리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정신건강은 어떠한가? 모르긴 몰라도 그들 사이의 자살률이 카이스트에 비해 매우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경쟁의 대열에 합류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 역시 극도의 경쟁 시스템의 희생자이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처럼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는 없다. 모두가 교육의 이해당사자이고, 교육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에 관해 생각하고 말할 때 필요한 덕목이 있다. 바로 솔직함이다. 나 자신 또는 내 아이를 위한 계산과 교육정책에 대한 담론 참여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줄여야만 한치라도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느 텔레비젼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나만 아니면(혹은 내 아이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또는 "내 아이만 잘되면 돼"라는 자세로는 교육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초등학교 1학년 신입생인 내 아이는 오늘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엘 갔다.(정확히는 갔을 것이다라고 말하는게 맞는 말이다. 나는 아침에 아이가 눈을 뜨기 전에 출근을 하기 때문이다.) 햇병아리 같은 아이를 보면 아직은 내 마음도 즐겁기만 하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항상 무거운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질문들에 답해야 할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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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오락가락이다. 좀 풀리나 싶더니 다시 추워졌다. 그나마 지난주말처럼 지독한 황사가 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날씨가 좋으나 나쁘나 일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신세는 변함이 없지만.

지난주부터 바뀐 출입처로 출근하고 있다. 문화부에서 근무하다가 정치부로 발령이 나서 2년여만에 재회한 '여의도 사람들'과 인사를 해나가고 있었는데 3개월만에 다시 인사가 났다. 이번엔 사회부다. 사회부는 2004년 가을 떠난 이후로 처음이다. 기자생활 11년차가 되다보니 어느 부서가 갔다 놓아도 별로 두려운 것은 없지만 조금 낯선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여러 후배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다보니 긴장된다. 예기치 않은 인사발령이지만, 강요된 '새로운 시작'이 그리 기분 나쁘진 않다.

사진은 까만주름 주니어가 작년 유치원 방과후 교실에서 만든 '공룡이네 집'이다.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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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무리에 섞여 북한산엘 다녀왔다. 아내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텐데 밀린 일 때문에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가고 방안퉁수 스타일의 아이를 회유반 협박반 설득해 집을 나섰다. 집에선 삐죽거렸던 아이가 지하철 역 가는 길에 금새 밝아졌고 김밥을 사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6호선 독바위역에서 시작해 삼천사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는데 나로선 처음 걸어보는 코스였다. 아이도 마찬가지. 움직이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약간 강압적으로 데리고 나오긴 했는데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속으론 너무 힘들어하면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가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아이는 처음 등산을 해보는 것 치고는 제법이었다. 경사가 있는 바위를 오를 때도 자세를 갖추고 잘 올랐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적부터 놀이터에 있는 모의 암벽 같은 놀이기구를 아이가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아이는 신나게 놀면서 숨이 차면 눈누덩이 발갛게 된다. 우리가 놀리길 '급 다크서클'이 생기는데 이날도 그랬다. '어이쿠! 어이쿠!'하면서도 씩씩하게 올라갔다.

5시간 산행중 3시간 정도 걸려 능선까지 용케 잘 올랐던 아이가 드디어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지난 주말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가다가 발이 바퀴에 끼는 바람에 발꿈치를 다쳤는데 오랜 시간 걷다보니 그 부위가 다시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절룩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약간 오르막길이나 평지길에선 안거나 업어서 이동하고, 내가 힘이 부치면 다시 걷게 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몇번째 업었을 때였을까. 쪼그리고 앉아 어깨를 내주자 아이가 올라타며 귀엣말로 수줍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끔 아이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잔머리를 굴리면서 아옹다옹하곤 하는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40근이 넘는 녀석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오늘까지 허벅지 근육이 뭉쳐 계단을 걸을때면 찌릿찌릿하다. 하지만 녀석의 '고맙습니다'란 말의 여운은 그 여인의 '사랑해'라는 여운만큼이나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그래도 이 기억은 꼭 기록해 두어야 하겠기에 적어둔다.


※2010년 여름 난지한강공원 분수대 근처에서 여름을 스케치 중인 까만주름 주니어.
Posted by 까만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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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들엄마 2011.03.14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여인은 누구인가요?
    가슴 따뜻한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