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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기사갈무리

다산의 흔적 '산아제한' 조항 32년 만에 없애

다산의 흔적 '산아제한' 조항 32년 만에 없애

 

2006년 개봉된 코미디 영화 <잘 살아보세>는 산아제한이 국가적 과제였던 1970년대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출산율 전국 1위를 자랑하는 마을에 급파된 ‘가족계획요원’이 마을 이장과 함께 주민들의 ‘밤일’을 관리하겠다고 나서면서 포복절도할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실제 당시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산아제한 포스터에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가족계획 상담은 여러분의 가까운 보건소에서 무료로 합니다’라는 구호가 선명했다. 보건소가 펼친 가족계획 주요 업무는 남성의 경우 정관수술, 여성의 경우 루프 삽입 등 영구피임이었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가족계획’은 법적으로 여태껏 보건소 공무원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10년 전부터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범정부적 저출산대책 기구가 출범했지만 산아제한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보건진료 전담 공무원의 업무 가운데 ‘가족계획을 위한 피임기구 삽입’(영구피임 시술) 등의 조항을 삭제한 ‘농어촌 등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1981년 이 시행령이 제정되면서 시작된 보건소 공무원의 가족계획 업무가 32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법적으로는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적용되지 않았던 조항”이라며 “현실에 맞게 해당 조항을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족계획 사업’이 법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자보건법은 여전히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모자보건 사업 및 가족계획 사업에 관한 시책을 마련하여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13.1.16) 

 

법과 제도는 국가가 무언가를 장려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현실보다 늦게 움직인다.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해야 할 어떤 새로운 관행이나 문제가 현실에서 등장하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 정책가들의 눈에 이것이 띌 즈음에 비로소 법과 제도가 새로 마련되거나 고쳐진다. '보건의료 전담공무원' 쉽게 말해 보건소 직원의 업무로 나열된 것 가운데 가족계획 업무가 사라진 것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추세와 비교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건소 직원의 의료행위 가운데 '정상분만시의 개조 및 가족계획을 위한 피임기구의 삽입'이라고 돼 있던 것이 '정상분만 시의 분만개조(分娩介助)'로, 진료행위 외의 업무 가운데 '가족계획을 포함한 모자보건에 관한 업무'가 '모자보건에 관한 업무'로 바뀌었다.

 

눈에 걸리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분만개조'다.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찾아봤지만 나오지 않는다. 산부인과 전문용어인가보다. 이리저리 조합해서 검색을 해보니 분만개조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돕는 행위' 정도로 해석되는 것 같다.

 

또하나의 용어 문제. 법에는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인 '산아제한'이라고 하지 않고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가족계획'이라고 나와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정부에서도 아이를 낳는 것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산아제한(birth control)이라는 단어를 쓰다가 이 단어가 주는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가족계획(family planning)이라는 단어로 희석시키지 않았을까 추축해 본다. 모자보건법에 아직 가족계획 사업에 관한 업무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로 명시돼 있다고 하자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그건 해석상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가족계획이라는게 산아제한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한 것도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산아제한에 비해 가족계획이 더 포괄적인 것은 사실이니까.

 

산아제한, 가족계획 포스터 얘길 기사에서 언급한 김에 지금 보면 '명랑'스러운 옛날 포스터들을 인터넷에서 모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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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영화 '잘 살아보세'의 포스터

 

 

시대별 가족계획 포스터와 구호를 한눈에 비교. 역시 구호는 유치찬란해야 더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이 구호 앞에 괄호 열고 '흥부처럼' 괄호 닫고?

 

 

둘만 낳자 포스터의 본격 만개

 

 

 

 

 

 

요즘 텔레비전 광고에서 '간 건강'을 열심히 외치는 범근 아저씨와 두리도 보인다.

이사진으로 2002년 월드컵 당시 등장한 '두리 로봇설'은 확실하게 근거가 없어진건가?

 

 

가족계획이 국가의 주요 업무였음을 보여주는 포스터들

 

 

 

 

 

 

 

 

드디어 '하나만 낳자' 구호의 등장

 

 

 

 

 

 

 

 

 

 

 

 

 

시대별 구호 다시 한번 일별해보고

 

 

왠지 영화 '터미네이터'의 새라 코너의 꿈에 등장하는 지구종말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포스터

 

 

출산율 저하가 재난 수준의 국가적 문제로 떠오른지 오래 됐다. 만약 20~30년전 민주화 이전 시대였다면 각급 학교와 직장엔 '애를 많이 낳자'는 구호와 포스터가 난무했을거다. 물론 지금도 출산율 장려를 위한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다둥이 가족이 행복하게 웃는 장면을 담은 포스터가 제작돼 배포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처럼 군대 냄새가 물씬 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공무원에 따르면 출산율 저하가 국가적 문제가 되자 산아제한을 담당하던 공무원들이 하루 아침에 출산장려 업무에 투입됐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그런데 예전 산아제한 시대 방식으로 출산 장려 구호와 포스터를 만든다면 어떤 것들이 나올까? 인터넷에서 보니 '내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대의 유산은 동생입니다'라는 구호가 담긴 포스터가 있던데 아무래도 너무 은유적이다. 너무 2000년대 식이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이건희 부럽잖다'는 어떨까? 혹은 '피임없이 사랑하여 자랑스런 부모되자' 정도는 되어야 그 시절의 감수성이 담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