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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기사갈무리

하규섭 자살예방협회장 인터뷰 “사회병리 현상 자살, 정부가 암처럼 관리 나서야”

-자살률 OECD 평균의 3배… 예산 적어 예방은 시늉만
 
지난해 11월 국내에 번역·출간된 강상중 도쿄대 교수의 신작 제목은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일본어 원작의 제목은 강 교수의 전작 <고민하는 힘>을 따라 <속, 고민하는 힘>이었으나 번역되면서 바뀌었다. 출판사 관계자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좀 더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책으로 읽어야 하는 곳이 현재 대한민국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2011년 기준 10만명당 31.7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2.8명의 3배에 육박한다. 한국인은 2013년 새해도 조성민이라는 유명인사의 자살 소식과 함께 맞이해야 했다.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52·사진)은 ‘자살 공화국’이라는 암울한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와 ‘살려야 하는 이유’, 그리고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정력적으로 설파해온 사람이다. 그는 다음달 20일 한국자살예방협회장 3년 임기를 마무리한다. 조울병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 원장을 지난 10일 서울 광진구 능동로 국립서울병원장실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자살이 개인의 문제이냐, 사회적 책임이냐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소리”라면서 “지난 15년간 3배 이상 증가한 한국인의 자살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함축된 사회병리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하 원장은 처음부터 한국인 자살의 심각성을 입체적으로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1997~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증하기 시작한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0년대 초중반 OECD 평균의 2배에 도달했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가 ‘자살예방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대응에 나섰지만 한국은 10년 가까이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많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까? 하 원장은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민주화·경제성장 등 사회경제적 발전이라는 빛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 인구구조의 급속한 변화를 먼저 지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빨랐던 변화·발전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고, 이것이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동반했다는 것이다. 하 원장은 “휴대전화만 해도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과 새로운 서비스가 나오는데 이것을 따라가기도 벅차지 않으냐”면서 “일종의 ‘풍요의 역설’ ‘성공의 역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 원장이 주목하는 두 번째 원인은 급속한 고령화다. 한국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자살률이 높아지는데, 이런 현상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했다. 지난해 10대 자살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지만 한국의 10대 자살률은 OECD 평균 수준이다. 오히려 노인 자살이 크게 늘면서 전체적인 자살률을 높였다. 이는 평균수명이 빠르게 늘어난 것과도 연결된다. 하 원장은 “자살예방활동을 하면서 어르신들에게 ‘왜 노후준비를 안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부모나 선배들은 60이면 다들 죽었는데 노후준비를 할 필요가 뭐가 있었겠느냐’고들 답하더라”라면서 “노후를 대비하지 못한 어르신들이 병이 들면 ‘자식들도 애들 키우느라 어려운데 짐이 되기 싫다’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찾아오는 우울·불안·불면 등의 정신적 고통이 정신질환으로 옮아간다. 그럼에도 드러내놓고 상담하거나 치료받기를 극히 꺼리는 문화적 풍토는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부채질하고 있다. 하 원장은 “우울증 치료 비율이 20%에 불과하고 자살 시도자의 80%가 자살 시도를 하고나서 생애 처음으로 정신과 의사를 만난다”면서 “기가 막힌 현실”이라고 말했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생계비관 자살, 성적비관 자살, 따돌림과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한 자살 등 자살 관련 언론보도가 여과없이 이어지는 것도 하 원장의 근심거리다. 그는 “자살이 문제 해결의 한 방식이라는 인식이 형성됐고, 언론보도가 그런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된다”고 말했다.
 
하 원장이 자살예방활동을 하면서 가장 시달렸던 편견은 ‘예방활동을 한다고 기어이 죽겠다는 사람을 막을 수 있겠나’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이런 편견에 대해 “모르는 소리”라면서 “죽겠다고 저를 찾아왔던 환자들 가운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잘 살고 계신 분들이 부지기수로 많다”고 말했다.
 
하 원장은 이 점에서 정부에 아쉬운 것들이 많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정부가 자살예방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예산 때문에 시늉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004년 처음 편성된 자살예방 관련 예산은 5억원이었다. 하 원장은 “당시 연간 자살자를 1만명이라고 치면 1인당 5만원꼴”이라며 “보통 20명이 자살을 시도하면 1명이 실제 자살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되는데 자살 시도자 1명당 2500원꼴로 돌아간 셈”이라고 말했다. 2012년 관련 예산은 22억원이었다. 그는 “돈 들인다고 자살자가 줄겠느냐고 하는데 ‘언제 돈을 들여본 적은 있느냐’고 묻고 싶다”고 말했다.
 
자살예방을 위해 하 원장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집단은 이른바 ‘자살 고위험군’이다. 정부가 생애주기별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암을 검진하는 것처럼 하진 못하더라도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 가족·유가족, 독거노인, 정신과적 문제가 있는 사람 등 자살률이 높은 집단만이라도 집중적으로 보호·상담하고 치료한다면 단기간에 높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 노원구는 실업자, 청소년,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 주민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자살예방활동을 펼쳐 자살률을 30%나 낮췄다.
 
한국의 정보통신기술과 산업, 문화가 세계적인 주목 대상이듯, 전 세계 정신건강 연구자들은 한국인의 자살 신드롬을 주목한 지 꽤 됐다고 한다. 하 원장은 “조울증·우울증으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열심히 치료해왔는데 병원을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서” 자살예방활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간이 나빠서, 또는 당뇨가 있어서 병원에 간다고 말하듯이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다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2013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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