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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인문학>이라…. 내가 몸담고 있는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이 2011년 새해 첫 출판면에서 공통적으로 주목한 책이다. 리뷰어들도 지적하듯 화폐라고 하면 보통 경제학의 영역에 속하는 주제다. 그런데 화폐는 경제학의 영역에 가둬둘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듯 하다. 이른바 ‘화폐의 사회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리 녹록치 않은 책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괴테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작품들은 제목까지 생소한 판국이다. 한겨레신문의 리뷰어가 많은 분량을 할애해 소개한 게오르그 지멜의 책 <돈의 철학>은 작년에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원전번역한 김덕영 박사가 번역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司)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프랑스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일련의 프랑스 철학자들을 소개함으로써 일본에 프랑스 철학 붐을 조성하기도 했다는 소개가 나온다. 내가 제대로 읽어낼 엄두를 쉽게 내지 못하겠지만 상식 넓히기 차원에서 스크랩을 해둔다.

돈, 넌 대체 누구냐? 경제 밖의 돈 이야기

화폐 인문학 - 10점
이마무라 히토시 지음, 이성혁.이혜진 옮김/자음과모음(이룸)

‘김중개라는 남자와 박머니라는 여자가 만났다. 둘은 첫눈에 반해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어느 날 서로의 이상형을 각자 만나게 된다.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좇아가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둘 다 비극적 결말을 맞고 만다.’

통속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접하는 줄거리다. ‘눈물 없이도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러브스토리인 셈이다. 한데 일본의 현대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이마무라 히토시(1942~2007)가 읽었다면 이 소설은 분명 ‘화폐 소설’로 자리매김됐을 것이다.

이마무라는 화폐를 향해 ‘넌 도대체 누구냐’라는 원초적 질문을 던진다. 원제 <화폐란 무엇인가>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화폐의 경제적 기능론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의 조건에서 화폐를 조명”했다. 화폐의 기능은 교환, 시장 등 여러 각도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화폐의 존재’는 다른 시각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이 같은 접근을 “화폐의 사회철학”이라 했다. 인간에게 화폐가 갖는 의미를 곱씹어보자는 것이다.

그는 화폐의 사회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경제 전문서적을 찾지 않았다. 괴테의 <친화력>,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답을 구했다. 그는 이들 작품을 ‘화폐 소설’이라 명했다. “상식적 의미의 화폐가 등장하지 않는 곳에서야말로 화폐의 본질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뛰어난 소설은 예외 없이 인간의 근원적 경험에 접근하는데, 이러한 근원적 경험이야말로 화폐적 경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문학작품은 우수한 것일수록 화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애와 결혼 문제를 다룬 소설로 볼 수 있는 괴테의 <친화력>. 주인공 미틀러는 문자 그대로 ‘매개자’를 뜻한다.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면서 소설의 무대를 움직이고 등장인물들의 파국을 암시한다. 화폐는 평범한 얼굴을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경제생활은 마비된다. 이에 저자는 미틀러를 “인간의 형상을 한 화폐”로 봤다.

청교도 부르주아의 위선과 악덕을 다룬 소설 <위폐범들>에 등장하는 프로피탕디외는 ‘신을 이용해 이윤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름에서부터 이미 화폐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앞서 소개된 ‘김중개’나 ‘박머니’처럼 저자에게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인간관계의 매개자이자 화폐의 또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특히 지드가 위조화폐를 통해 경제현상의 이면에 펼쳐진 인간군상을 보여준 데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경제학이 경제적 사실밖에 말하지 않는다면 인간적 현실을 진실로 설명했다고 할 수 없다. 경제학의 이러한 무능함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드의 <위폐범들>은 하나의 경제학 비판서다.”

이마무라의 말을 듣자니 아무 소설, 아무 쪽이나 봐도 돈 이야기가 나온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살인범이 여자를 죽이는 데 사용한 칼조차 그냥 칼이 아니라 ‘얼마짜리’ 칼이다. 생계를 위해 글을 팔아 ‘돈’을 벌어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돈을 이해하고 돈의 막강한 역할을 꿰뚫어본 작가로 평가받는다. 이마무라였다면 그의 소설을 과연 어떻게 해석했을지 궁금해진다.

이마무라에 따르면 <친화력>에 등장하는 ‘무덤 파괴’ 이야기나 <위폐범들>에 나오는 일부 죄 없는 자들의 죽음은 규칙이나 관습 같은 ‘제도화한 매개 형식’이 사라졌을 때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충돌의 결과다. 그는 화폐가 동물세계와 달리 인간들의 폭력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매개자임을 거듭 강조한다. “운명과 죄와 관련한… 신화적 자연의 힘을 덮어버리는, 누름돌 역할을 하는 매개자가 사라지면 인간관계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그는 화폐 없는 인간사회를 부정한다. ‘화폐 폐기론’에 ‘재앙론’으로 맞선다. 인간은 상호 교류가 숙명적이므로 교환의 매개인 화폐를 폐기하면 인간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경제학적 차원에서는 이상적일지 모르지만 인간 존재의 근원과 연결지으면 화폐 폐기는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역자의 말처럼 이 책은 “문학작품 독해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수도 있다. 나아가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 자신이 ‘화폐 소설’의 주인공이니 말이다. (경향신문 2011.1.1 고영득 기자)

피할 수 없는 인간관계 맺기의 형식 ‘화폐’
독일 사회학자 지멜의 시도 이어
‘경제성’ 배제한 사회철학적 연구
화폐와 문학·문자 연관성도 짚어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일 수 있는 ‘존재의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흔히 정신, 언어, 가족, 사회 등을 들지만, 이런 것들은 비록 단순한 수준이지만 동물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사회철학자 이마무라 히토시(1942~2007)는 1994년 처음 출간한 책 <화폐 인문학>에서 ‘화폐’를 통해 인간 존재의 조건을 파헤친다. 그러나 여기서 지은이가 말하는 화폐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도구·소재로서의 화폐’가 아니라 인간 사회가 구성되는 ‘형식으로서의 화폐’다. 따라서 그는 기능론적 관점에 입각한 화폐의 경제적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존재론적 관점으로 화폐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화폐의 사회철학’을 연구했다.

지은이의 이런 접근 방법은,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1858~1918)의 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 1900년 써낸 <화폐의 철학>에서 ‘화폐가 왜 인간 세계에 존재해야 하는지’ 따져 물었던 지멜은, 인간은 숙명적으로 ‘관계의 매개 형식’으로서 화폐를 갖게 된다고 밝혔다.


원래 주술적·신화적 세계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은 어떤 구분도 없이 모두 하나의 몸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여기에 균열이 생겨 주체(나)와 객체(대상)가 나눠지게 되면, 둘 사이가 멀어지는 한편 서로를 다시 연결하기 위한 작용도 함께 일어난다. 지멜은 이를 ‘거리화’(Distanzierung)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멀리하다’와 ‘분리를 막는다’는 상반되는 작용을 모두 뜻한다. 곧 거리가 생기면, 그 거리를 메울 다리를 새로 놓아야 할 필요성, 곧 ‘매개’의 필요성도 생기며, 화폐는 바로 이 매개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죽음의 관념’이라는, 인간 고유의 존재 조건을 읽어낸다. 인간은 더이상 자연 상태와 일체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고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죽음의 관념을 갖게 된다. 이는 동물과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분짓는 존재 조건이 된다. 인간은 죽음의 관념을 바깥으로 내몰고 싶어해 ‘제도화’ 또는 ‘합리화’를 추구하게 된다. 지은이는 “인간은 원초적인 거리화에서 태어난 죽음의 표상을 물질 또는 제도의 형태로 외부화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친연성’이라는 공포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의 관념은 인간의 삶 전체를 물들이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죽음의 추방은 불가능하다.”

정리하자면, 화폐는 복수의 타자들과 대립하고 투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인간이 자연발생적으로 갖게 된 ‘관계 맺기’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물질이나 제도가 아니라 “내용에 관심이 없는 공허한 형식” 그 자체이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지멜은 이런 점에서 화폐는 ‘지성’(논리), ‘법’과 나란한 존재라고 봤다. 또 인간이 사회적 인간인 이상,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타인과의 상호 교통(交通) 또한 숙명적이고 근원적인 사실로서, 결코 회피할 수 없다고 했다.

지은이는 이러한 기본적인 분석틀을 갖고, 구체적인 분석에 들어간다. 괴테의 <친화력>과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을 읽어나가며, 화폐 철학을 문학 분석에 적용한다. 예컨대 규칙이나 관습을 벗어난 인간이 최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제도화된 매개 형식이 사라졌을 때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혼돈을 그린 것으로 풀이하는 식이다. 또 루소와 데리다를 끌어와, 문자와 화폐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좀더 현실적인 이 책의 의미는,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화폐 폐기론’에 대한 비판이다. 지은이는 “플라톤에서 마르크스까지 모든 사상가들이 화폐를 혐오하고 비판했지만, 홀로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 화폐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며 지멜을 높이 평가한다. 또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본질을 보지 못하고 소재·도구로서의 화폐만을 고려해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형식으로서의 화폐는 언어적 교통, 경제적 교통, 정치적 교통 등 모든 영역에서 출몰하며, 이런 매개자가 없다면 인간은 서로 직접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지은이 역시 화폐의 부정적인 측면을 우려한다. 그는 “화폐 형식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자본주의의 영원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며, 자본주의 근대가 가져온 ‘인간에 대한 화폐와 상품의 우월적 지배’를 경계했다. →그러나 형식으로서의 화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실히 알지 못하면 새로운 전망은 나오기 어렵다고 한다. 곧 인간이 ‘화폐적 존재’임을 먼저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2011.1.1 최원형 기자)
Posted by 까만주름
번역서를 접할 때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책 제목이 말 그대로 '섹시' 그 자체여서 집어들지 않고는 못배기지만 막상 책장을 펼치면 전혀 딴판의 내용이 담겨 있곤 한다. 전혀 딴판은 아니더라도 원저의 제목은 평이한데 한국에 맥락에 맞추기 위해 책속 일부를 크게 부각시킨 제목이 나오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이라고 할까?

이 책 역시 제목이 좀 뻥튀기 됐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지은이가 분명히 케인스와 프로이트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현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을 무자비하게 까고 있긴 하다. 하지만 케인스와 프로이트라는 걸출한 인물 사이의 뒷얘기 같은 흥미 위주로 접근하기 보다는 반자본주의 철학 에세이를 방불케 한다. 따라서 제목만 보고 케인스와 프로이트 사이의 학문적 교류와 끈끈한 우정 등등을 기대한다면 실망하게 된다. 하지만 책 제목은 분명히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출판사의 노림수가 보이는 대목이다.

이번에 배운게 있다면 이런 책을 접할 때는 일단 제목에 등장하는 소재를 다루는 부분을 먼저 훑어봐야 한다는거다. 책의 절반은 지적재산권이 과연 경쟁과 혁신을 저해하는가, 자본주의는 왜 유럽에서 발생했는가, 기업가란 누구인가, 종교와 자본주의는 양립가능한가 등등의, 어찌보면 경제학계 내외부에서 다뤄질 법한 주제들을 두루 훑고 있다. 좋다. 하지만 케인스와 프로이트 얘기는 언제 나오는거지? 이런 의문과 호기심이 조급증을 일으키고 짜증이 슬슬 일기 시작할 즈음 드디어 케인스와 프로이트 얘기가 나온다.

서평에도 썼지만 이건 원저자의 잘못이 아니다. 원저자가 제목에서 케인스와 프로이트를 표방한 건 아니니까. 책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면 경제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어도 찬찬히 뜯어보면 이해가 갈 정도이다. 다만 인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프랑스 사람들이어서 좀 생소한 느낌도 든다. 프랑스에서 대중적으로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경제학자 겸 저널리스트인 것 같은데 풍자가 볼만 하다. 우리 출판계는 아무래도 영미권 저자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간만에 프랑스 지식인의 글맛을 본 것 같다. 상대적으로 쉽게 쓴 글 같지만 스타일이 영미권 저자들과는 꽤나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평을 쓰는데 적잖이 어려움을 겪었다. 전체를 읽고 나니 줄거리는 잡히는데 그걸 한줄에 꿰어내기가 간단치 않았다. '도와줘요!'를 외치고 싶은 싶정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요긴한 내용을 발견했다. 홍기빈 선생이 작년에 나눔문화란 곳에서 강연을 한 것을 기록해 둔 것인데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를 거의 다 담고 있다. (*참고 홍기빈 선생 강연 요약)

요즘들어 자본주의 체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문제들을 근본에서부터 공격하는 저작들이 빈번하게 나온다. 다양한 갈래지만 결국 핵심 문제의식은 칼 폴라니의 그것-자기조절적 시장이란 없다, 시장은 역사의 산물일뿐이다-에 닿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인 베르나르 마리스는 2008년에도 한권이 책이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번역자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앞서 나온 것과 이번에 나온 책은 원래 프랑스에서 같은 제목의 1권과 2권의 책으로 나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용지물 경제학 - 10점
베르나르 마리스 지음, 조홍식 옮김/창비(창작과비평사)


돈만 숭배하다 자멸할 것인가
-자본주의 사악한 작동원리 해체…예술·우정 등 삶의 질을 높여라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 10점
베르나르 마리스 지음, 조홍식 옮김/창비(창작과비평사)

케인스(1883∼1946)가 프로이트(1856~1939)를 숭배했다니? 두 사람 모두 천재적인 사상가이지만 한 사람은 경제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신분석학자인데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이 있었던가? 혹시 케인스에게 동성애적 취향이 있었기 때문에 성적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의 정신세계에 접근했던 프로이트와 연관됐던 것은 아닐까? 프랑스 파리8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서문에서 '자본주의라는 모험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자멸을 택한 것일까?'라고 묻고 '케인스와 슘페터처럼 프로이트에 심취했던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고 답함으로써 야릇한 날개를 펼치려던 상상을 접게 만든다.
그렇다고 독자의 궁금증을 바로 해결해 주진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든 자본주의의 사악한 작동원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뻔뻔함, 인간의 합리성과 완전자율경쟁시장이라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사기성을 철학적 해학으로 가득찬 현란한 문제로 헤집으며 뜸을 들인다. 프랑스어 원서가 '거꾸로 보는 경제 설명서(Antimanuel d'Economie)' 정도의 평범한 제목을 달고 있으므로 저자를 탓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케인스는 돈의 축적이 부도덕하고 더럽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목표와 제한이 있어야 하고 성공한 삶이란 모든 자본이 그 주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돈이 돈을 만드는 운동은 인류가 자연과 신에 도전하고, 돈이 인간을 삶에서 축출하는 거대한 모험으로 이끈다. 자본이 인간을 지구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아마도 돈은 행복을 가져오지 못할 텐데, 특히 돈은 욕망의 근원에 다가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인간이 돈에 집작하는 것은 돈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과는 죽음의 충동이다. 이 그림은 쾌락에 빠진 인류의 종말론적 결과를 암시하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제단화 '쾌락의 정원'의 일부다.(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그렇다면 케인스는 프로이트의 어떤 점을 숭배했던 것일까. 책에 따르면 케인스는 버지니아 울프 등이 참여한 '블룸스버리(Bloomsbury)'라는 예술가·지식인 그룹에 몸담았다. 이 그룹은 프로이트가 내놓은 파격적인 이론에 심취해 있었고 그의 저작을 영어권 국가에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케인스의 저작에서는 '콤플렉스' '리비도' '우울'과 같은 프로이트식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프로이트에 대해 "풍부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놀랍고도 확고부동한 가설을 제시했다"고 극찬한 케인
스. 우리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케인스가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얘기를 자주 접한다. 케인스주의자를 자처하는 폴 크루그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만능주의'와 '합리적 인간'이라는 주술을 반복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여전히 경제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인간 행동은 '야성적 충동'에서 기인한다고 말한 케인스는 그들에게 적이다.
케인스는 '좋은 삶'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쌓아두기 위한 대상으로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구역질 나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혐오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먹고 사는 사람 가운데 이 병에 걸려 있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돈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숭배하는가? 다시 말해 먹고 살 만큼 돈이 있는 사람조차도 돈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라는 책에서 동식물이나 물건에 대한 숭배는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을 부정하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은 바로 죽음이다. 케인스는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인간에게 불멸의 환상을 심어준 것이 바로 돈이라는 통찰을 프로이트로부터 건져 올렸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사악한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스스로 돈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불안의 정신(경제)분석학'은 이자율에 대한 설명으로도 이어진다. 이자율은 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일 뿐더러 일반인들의 경제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이자율의 변동은 저축·투자·투기심리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이 미래의 소비나 쾌락을 포기하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공포나 집단적 불확실성에 대한 가격에 다름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원리에 대한 심대한 견해차를 내포한다. '인간의 이성 바로 아래에 두려움과 광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케인스의 설명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 최고의 가정을 송두리째 깨부수기 때문이다.
저자가 케인스와 프로이트를 중심축으로 펼쳐보이려 한 것은 자본주의와 인류의 음울한 미래다.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면 자본주의는 죽음과 파괴에 대한 본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체감하고 있는 환경 대재앙과 인간성 파괴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현금을 계산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류의 모습은 이러한 염세적 전망을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 없게 만든다.
탈출구는 없는가. 케인스는 무의미하고 침울한 축적에 대한 해결책은 미적인 것, 즉 예술·아름다움·우정·포도주와 같은 삶의 질이 우선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 역시 경제학이 풀어야 하는 것은 복잡한 수학공식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불행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기술적 진보가 인류의 영생을 보장할 것이란 환상에서 벗어나 성장이 아닌 절약,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경제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탈출구 치고는 순진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재앙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구나 현대의 최첨단 자본주의가 대공황을 연상시키는 금융위기와 함께 악마적 심연을 드러내고 있는 이때에 말이다. <2010.1.9>


**관련 이미지로 소개한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은 책 속에 소개된 바 있는 그림이다. 아마도 번역서를 만들면서 편집자가 관련 도판을 삽입한 듯 하다. 이 그림의 소장처가 프라도 미술관인데 처가 이걸 보더니 "어? 나 프라도 미술관 가봤는데! 이런 그림이 있었나?"라고 한다. 쾌락의 정원이라는 흥미있는 그림에 대한 설명은 이 블로그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Posted by 까만주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