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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이사온 집 주차장 한쪽에 길쭉한 화단이 있다. 누런 흙이 드러난 채 방치돼 있기에 집주인에게 부탁해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큼의 넓이의 땅을 얻었다. 그리고 2주 전 주말에 퇴비 한 포대를 사다가 뿌리고 상추며 겨자채며, 깻잎 등의 씨앗을 심었다. 아이가 자기도 하겠다며 방정을 떨다가 온통 흙투성이가 됐지만 나무라지는 않았다.
조금 이르다는 감이 없지는 않았다. 수년째 텃밭농사를 짓고 계신 장인어른으로부터 지금 심어도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게 웬일인가. 파종을 한 날로부터 비, 찬바람, 눈, 다시 찬바람, 황사, 눈, 비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3월인데 이 정도 날씨에 씨앗이 얼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안심하면서도 출퇴근길 때마다 화단을 바라보며 속을 졸이는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가 “게으름뱅이가 웬일로 부지런을 떠는가 싶더니만”이라며 핀잔이다.
아이가 ‘왜 아직 싹이 나지 않아요?’라고 묻는다면 ‘원래 싹이 나오려면 오래 걸리는 거야’라고 답해주겠지만 만약 날씨가 왜 이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날씨란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인간이 지구를 너무 괴롭혀서 날씨가 화가 난 모양이야’라고 답해야 할까.
마녀 위니의 겨울 - 10점
밸러리 토머스 글, 김중철 옮김, 코키 폴 브릭스 그림/비룡소

아이의 잠자리 독서시간에 읽어주는 책 가운데 <마녀 위니의 겨울>(비룡소)이라는 그림동화책이 있다. 재미난 발상과 코믹한 그림 때문인지 아이가 꽤 좋아하는 책이다. 추운 겨울을 투덜대던 마녀 위니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요술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운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얍!’ 쌓였던 눈이 사라지고 햇볕은 쨍쨍, 날씨는 후끈해진다. 물론 위니네 정원 밖은 여전히 추운 겨울이다. 위니는 일광욕을 즐기며 희희낙락이다.
그런데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과 꽃들은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 탓에 땅 위로 올라와 불평하더니 시들어 버린다. 추위에 떨던 동네 사람들이 위니네 정원으로 우르르 몰려온다. 일광욕을 하고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치며 떠들썩하게 겨울 속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 위니는 난장판이 된 정원에 아이스크림 장수까지 등장하자 화가 나서 다시 외친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얍!’
다시 눈이 쌓이고,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가고, 동물과 꽃들은 달콤한 겨울잠에 빠져든다. 위니는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며 ‘겨울도 괜찮아’라고 생각한다. ‘마녀 위니’ 시리즈는 여러권인데 이처럼 자연스러움의 미덕을 촌스럽지 않게 일러준다.
위니는 장난 삼아 날씨를 바꿔본 것이지만 우리 인간은 오랫동안 진지한 자세로 자연을 바꿔왔다. 이런 행동이 날씨를 뿔나게 할 거라는 경고가 있었지만 실제 피부로 이걸 느낀 건 비교적 최근이다. 그림동화는 위니가 날씨를 일거에 되돌리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불행히도 우리는 날씨를 되돌릴 마법의 주문도, 요술지팡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고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어린이책이 쏟아진다. 이런 책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좀 더 진지한 ‘환경 마인드’를 가지리라 기대해본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 우울한 기운이 스며든다. 괴롭힘을 당한 지구의 병이 그만큼 더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2010.3.27>

Posted by 까만주름
서평에도 썼지만 90년대 후반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 독일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새로운 중도', 미국에서 빌 클린턴이 '뉴민주 플랜' 등을 내세우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집권했다. 슬로건에 동원된 단어는 차이가 있지만 그 핵심 내용에 있어선 비슷했다. 80년대 후반 소련이 붕괴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지향을 잃었던 좌파가 시행착오와 암중모색을 거친 뒤 들고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 좌파가 내세웠던 강령에서 물러나 시장을 인정한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국가와 시장의 이분법에서 탈피하자는 것이었고, 비판적으로 보자면 시장에 굴복한 것이었다. 이 슬로건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바로 앤서니 기든스다. 그는 스스로 유연한 사고, 현실적인 대안 등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정책가인 셈이다. 이번 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기후변화 대처의 제3의 길' 정도 된다. <제3의 길><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등의 전작과 함께 읽으면 기든스의 책 쓰는 방식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기든스는 <제3의 길>이라는 책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지금은 <현대사회학>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오고 있는 사회학 교과서다. 대학 사회학과 신입생은 거의 대부분 이 책으로 개론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그가 영국의 상원의원이라는 것은 이번 책에서 알게 됐다. 현실 정치에도 뛰어든 것이다.

이 책의 서평을 준비하면서 아마존닷컴의 독자 서평을 좀 살펴봤는데, 환경 관련 서적이라 그런지 환경 전문가들의 서평이 몇개 올라와 있었다.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들을 취하고 있었다. 그중 재미난 비아냥이 하나 눈에 띄었는데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말이었다. "기든스 선생, 당신이 블레어가 집권했을 당시 이 책에서 쓴 것처럼 해보지 그러셨수."

기후변화의 정치학 - 10점
앤서니 기든스 지음, 홍욱희 옮김/에코리브르

'기후변화'가 주목받는 계절이다. 오는 7일부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열린다. 이른바 '코펜하겐 정상회의'에서는 우리가 그간 기후변화 혹은 지구 온난화와 관련해 자주 들어온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국제협약을 논의한다. 이번 회의는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각국의 입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특히 회의에서 논의되거나 결정되는 사항들은 향후 각국의 정부 및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각국은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자국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경향신문 12월1일자 8·9면 참조)
1990년대 후반 '제3의 길'이란 키워드로 전세계 정치권을 풍미했던 앤서니 기든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빌 클린터 전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사부'로까지 불렸던 그가 이번에는 기후변화라는 뜨거운 감자에 눈길을 돌렸다. 기든스는 <제3의 길>,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등 전작에서 좌파와 우파, 국가와 시장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에서 탈피해 철저히 중도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주창했는데 이번 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국가·시장·시민사회 등 다층적인 수준에서 창의성과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며 "좌파와 우파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온난화 문제를 의제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환경주의자들에 대해서조차 비판의 칼날을 겨누며 기후변화는 환경주의자들이 독점할 의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국가, 즉 정부의 역할이다. 국제조약, 온실가스 배출권 교환시장, 온실가스 감축기술 개발 등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거론되거나 시행 중인 것들은 모두 국가가 움직여야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기든스의 핵심 주장이다. "범지구적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서는 선진산업국이 앞장서야만 하고, 그 성공 여부는 정부와 국가의 역할에 달려 있다. 하지만 국가에서 추진하는 모든 일은 결국 민주적 권리와 자유의 맥락 안에서 시민들의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국가는 기업과 개인의 활동을 규제하거나 새로운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기든스가 큰 관심을 기울인 다른 하나의 주제는 기후변화와 에너지 안보와의 상관관계다. 석탄·석유·천연가스 등 3대 주요 에너지원은 모두 화석연료이며 대량으로 온실가스를 발생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 않는 한 기후변화를 완화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국가들은 화석연료가 고갈됐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에너지원 확보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과 온실가스 배출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중국이다. 기든스는 "미국과 중국이 에너지 및 기후변화 문제와 관련해서 진지하게 협력할 수 있을지 상당히 의문스럽다"면서도 냉전시절 미국과 소련의 전략무기 감축협상을 사례로 들며 '의지의 동맹'이 이뤄질 가능성을 내다봤다.
저자는 정치지도자들에게 보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네가지로 요약했다.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추진하라(예를 들어 새로운 환경정책에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업인들을 설별해 전위대로 육성하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데 초점을 맞춰라, 지구온난화 문제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기후변화 정책의 장·단기적 영향이 가져올 리스크를 정밀하게 평가하라 등이다.
기든스는 서문에서 "현재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한 어떠한 정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선언하며 "이런 점을 바로잡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강조했다. 대가로서의 자신감의 표현이겠지만 아쉽게도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우리 손에 구체적인 대안들이 쥐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일례로 기든스는 기후변화에 대해서만큼은 정당과 정파를 초월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는데 의회에서 위원회를 꾸려 전부 아니면 전무식으로 논의하지 말고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서 그쳤다. 이건 당위론으로 들릴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이 기후변화와 관련해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역사는 잘 짚었지만, 어떤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기후변화 대처를 둘러싸고 현재 논의되는 최신의 쟁점들을 거의 모두 망라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이 역시 논지의 응집도를 떨어트렸다는 비판이 나옴직하다. <2009.12.5>

제3의 길 - 10점
앤서니 기든스 지음, 한상진 옮김/생각의나무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 10점
앤소니 기든스 지음, 김현옥 옮김/한울(한울아카데미)


Posted by 까만주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