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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250년만에 詩로 부활…조선후기 요절한 천재시인 이언진

골목길 나의 집 - 10점
이언진 지음, 박희병 옮김/돌베개
저항과 아만 - 10점
박희병 지음/돌베개
"이따거의 쌍도끼를/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손에 칼을 잡고/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이 시를 남긴 이언진(1740~66)은 학계에서 '요절한 천재시인'으로 통한다. 중인 출신이었던 그는 독특한 시풍으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2000여수가 넘는 시를 쓴 것으로 전해지지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병약했던 이언진은 죽기 직전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다행히 300여편의 시문이 그의 아내에 의해 불타지 않고 남아 후손 등이 문집으로 엮었다.
<골목길 나의 집>(8500원)은 박희병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이언진의 <호동거실>에 담긴 연작시 170수를 처음으로 온전히 번역하고 짤막하게 해설을 붙인 시집이다. <저항과 아만>(1만8000원)은 이언진 시의 맥락과 의미를 촘촘히 분석한 것이다.
'이언진'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요절한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는 하나의 범주로써 다가온다. 윤동주와 이상 등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다한 출중한 시인들을 일컫는 요절한 천재시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페이소스'(비애감)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재시인은 왜 요절하는 것일까? 시대를 앞서 읽은 천재시인은 문단을 전복시킬 태세로 혁신적인 글을 쓰지만 당대에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인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스스로 무너져 버린 경우가 많다. 시대와의 불화 혹은 내면과의 불화가 그의 생애를 단축시켰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문학적 재능을 불사르다 일찌감치 가버린 그들이 좀더 오랫동안 살았다면 후세는 그의 면모를 좀더 풍부하게 알 수 있지만 그럴수록 신비감은 덜해진다.
이언진은 이런 요소를 두루 갖췄다. 20세에 역관이 된 그는 1763~64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일본 문인이나 학자들은 조선인의 시나 글을 얻거나 필담으로 학술교류를 했다. 일개 통역관이었던 이언진은 직책상 이 자리에 낄 처지는 아니었지만 문학적 천재성을 발휘하며 일본인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이 소문이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졌어도 그가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대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류층에선 중인 출신 문인의 활약에 대한 불쾌감과 위기감마저 나돌았다.
배척당한 시인의 선택은 두갈래다.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자신만의 성을 굳게 쌓고 그들을 조롱하고 허위와 부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대개의 천재시인이 그러했듯 이언진이 택한 것도 후자다. 그는 시의 형식에서부터 철저한 비주류의 길을 택했다. <호동거실>은 여섯 글자씩 끊어지는 '6언시'로 이뤄져 있다. 5언시나 7언시 중심이던 한시의 전통에서 탈피한 것이다. 그는 중국의 구어인 '백화(白話)'를 많이 구사했는데 이 역시 관습에서 한참 벗어난다.
맨 앞에 인용된 시는 이언진의 '불온성'을 드러낸다. 이 시는 108명의 호걸들이 관(官)과 맞서는 내용의 중국 소설 <양산박>을 차용해 체제전복을 꿈꾼 것인데 신분제를 부정함은 물론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읽힌다.
<호동거실>은 "새벽종이 울리자/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만인의 마음을 나는 앉아서 안다"라는 시로 시작했다. '호동'은 이언진이 스스로 붙인 호인데 '골목길'이란 뜻이다. '호동거실'은 바로 '골목길 나의 집'이란 의미. 당시 호동은 상인·중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호동거실>의 시들은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이 공간을 긍정하고 서민들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자신의 별칭을 골목길이라고 지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나 신분적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에게는 그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세태는 요랬다조랬다 하고/이내 몸은 고통과 번민이 많네/높은 사람 앞에서 배우가 되어/가면을 쓴 채 억지로 우네"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그는 자신을 부처라고 했으며 시선(詩仙) 이백과 동급으로 묘사했다. 자신을 배척한 주류사회에 투항하지 않는 자존감과 주체성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교만이라는 게 역자인 박희병 교수의 해석이다.
이언진 평전도 준비 중인 박 교수는 기존 학계의 접근이 너무 단편적이고 표피적이었다며 이언진을 동시대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과 짝패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박지원의 문학 노선의 정치적 함의가 '개량적 개혁'으로 보인다면, 이언진의 문학 노선의 정치적 함의는 '혁명'에 가깝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문단의 이단아이자 괴물이었던 이언진이 250여년이 지난 뒤 우리 앞에 돌연히 나타났다. 그를 다시 요절시켜 관으로 돌려보낼 것인지, 온전한 천재시인으로 자리매김해줄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눈밝은 문화기획자들에게 이언진은 보물창고로 보일 수 있는 면모가 다분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