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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밑줄긋기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맛이 정갈한 음식을 먹는 것, 적당히 시원한 약수물을 마시는 것, 차창을 절반쯤 내리고 봄바람이 살랑대는 강변도로를 달리는 것. 문장이 깔금하고 내용이 잘 정돈된 책을 읽는 것은 이런 것들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에 비유할 수 있을까.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을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이 그러했다. 원제는 [플라톤과 함께 운전하기(Driving with Plato)]인데 원저명은 플라톤을 내세우면서도 좀 가벼운 느낌을 주려한 반면 번역서 제목은 철학을 직설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좀 더 울림을 주는 쪽으로 작명됐다. 둘의 차이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저자의 이력도 화려하다. 알랭 드 보통과 함께 런던의 시민 교육 기관인 '인생 학교(The School of Life)'를 설립했다는 것만으로도 귀가 솔깃한데, 옥스퍼드 대학교의 올소울스 칼리지(All Souls College)의 7년 연속 우등생 장학생이었단다. 올소울스 칼리지의 일원이 되려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을 치러야 한단다. 한마디로 천재다.


책은 태어남에서부터 내세까지 '인생의 20가지 통과의례'의 의미를 풀어낸 철학적 에세이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평이하게 해설해 나가되 철학자 한두명의 견해를 끌어온다. 플라톤이 자동차 옆자리에 앉아서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차를 몰고 나온 나에게 운전면허의 의미를 조곤조곤 일러준다고 할까.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마다 철학이 무엇이지에 대한 이야기가 다르니 철학이 무엇인가부터가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철학 핵심에 있다는 것은 부동의 사실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철학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간만에 맛좋은 책을 먹었으니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교육(education)'이라는 말은 원래 '끌어낸다'는 뜻이다. 즉 늪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낸다는 의미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용어로 말하면, 학교 가기는 국가에 의해 구조되고 복원되는 것, 나아가 학교의 강력한 지배에 복종하고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는 것을 뜻한다. 언뜻 보기에 학교는 그게 전부인 듯하다(알튀세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는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학교는 훨씬 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3.학교, 46쪽)


어떤 의미에서 학교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이 분열된다. 알튀세의 동료 철학자인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타자로서의 자신이 된다. (3.학교, 51쪽)



자전거 배우기의 특징은 처음에 자전거를 잡아주던 사람이 얼마 안 가 손을 놓는다는 점이다. 자전거 타기를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아도 그것은 순전히 의심과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그것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설명한다. 그는 그것을 종교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아무리 열심히 추론한다 해도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추론을 버리고 비약해야 한다. 말하자면 '신앙의 도약'이다. (4.자전거, 64~65쪽)




시험은 깔대기와 같다. 윗부분은 누구나 노려볼 수 있을 만큼 넓지만 아래는 무척 좁아 소수의 후보자만 통과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시험이란 가장 민주적이면서도 가장 비민주적인 메커니즘이다. 능력주의는 어느 정도까지 민주주의와 함께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민주주의에 등을 돌려버린다.

현대 사회학을 정립한 막스 베버(Max Weber)가 고민한 것도 그런 역설이다. 그는 사람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한편으로 시험은 명사들이 관례로 거치는 게 아니라 각계각층 출신의 자격 있는 인원을 선발하는 과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측면에서는 능력제도와 교육 수료증이 '카스트' 같은 특권층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5.시험, 80쪽)


그러므로 시험의 진정한 기원은 민주주의나 능력주의가 아니라 관료주의에 있다. (5.시험, 81쪽)




자크 데리다는 성모 마리아가 입은 파란 옷과 같은 '막'에 주목하고, 처녀막이 외부 세계와 내부 성소를 가르는 장벽의 특별한 사례라는 해석을 선보였다. 데리다는 니체의 사상을 빌려 서구 사상사를 통틀어 여자와 진리 사이에는 은유적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둘 다 자명하지 않고, 곧바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며,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와 여성은 앞에 장막 또는 처녀막이 있기 때문에 남성이 그 의미를 파헤치려면 섬세한 책략이 필요하다. (7.순결의 상실, 115쪽)



운전면허의 취득을 '소극적 자유', 운전을 '적극적 자유'에 비유할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떠올렸을까? 


운전면허를 따고 석양 속으로 운전하는 것은 '소극적 자유'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성가시게만 하지 않으면 자유롭다는 생각이다. 이 관념은 라트비아 태생의 철학자이자 이야기꾼인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과 관련된다. 그는 전체주의의 위협을 받은 20세기에 새로운 자유를 구상한 바 있다. 소극적 자유는 그 명칭이 말하듯이 초보적인 자유다. 그저 구속만 없애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도로의 기본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경우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을 때가 그렇다. 운전면허를 취득하면 구체적인 것을 얻었다기보다 그냥 넓은 세계를 앞둔 것이다. 해결책을 만들어내기보다는 문제를 제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선택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져 오히려 성가시게 느낄 수 있다. 소극적인 동시에 부정적인 자유이므로 그다지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반면 적극적 자유에는 어느 정도 책무가 따른다. 최대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부담도 그런 책무다. 적극적 자유는 기회를 포착하고 낭만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과감하게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운전은 말 그대로 바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에 적극적 자유의 적절한 사례가 된다. (8.운전면허, 131~132쪽)




첫 투표자의 이상주의와 기성세대의 현실주의는 폭넓은 이념에 대한 투표와 한정된 정책에 대한 투표 간의 대조를 이룬다.……정치인들은 세율 조정, 도로 건설, 교육 제도의 개혁 등 최신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첫 투표자들의 관심은 대개 정책에 있지 않다. 닳고 닳은 유권자는 새로이 부과되는 재산세에 촉각을 곤두세울지 몰라도 신참 유권자는 이러저러한 제안의 배후에 있는 것을 찾아내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정책을 제안하는 사람이 어떤 기질(ethos)을 가졌고 얼마나 성실한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9.첫 투표, 145쪽)


9·11 사태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것 이외에도 민주주의와 평화가 영원히 만개하리라는 견해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로 인해 광범위한 트라우마가 발생했고 평화의 정반대인 대테러 '전쟁'으로 치달았으며, "민주주의의 원칙을 재천명해야 했다." 자유에 관한 서구의 담론을 살펴보면 9·11을 계기로 서구적 믿음을 수정해야 한다고 여긴 게 아니라 그 사건을 일종의 탈선, 전 세계 민주주의가 필연적인 승리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잡음으로 해석했다. (9.첫 투표, 150쪽)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 의하면 취직은 일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자신의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일과 천직의 구분보다 일과 노동의 구분에 더 천착한 그녀는 후자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유추했다. 동물은 오로지 생산성을 위해, 즉 가족을 위한 먹이를 찾기 이해 노동하며, 생존 이상의 결과를 추구하지 않는다. 먹이를 얻으면 일은 끝난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특징은 일하는 능력 자체에 있다. 일은 노동의 요소를 포함하지만(우리도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으므로) 그것은 단지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일의 기반일 뿐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borans, 일하는 동물)'로 부터 '호모 파베르(homo faber, 물건을 만드는 인간)'로의 진보를 이야기한다. 아니말 라보란스는 사물을 직접적인 용도, 주로 먹이와 관련된 용도로 대하는 반면(지빠귀는 흙에서 벌레를 잡고 곰은 시내에서 연어를 낚는다) 호모 파베르는 원래 용도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물건을 만들고, 비축해두었다가 나중에 다른 것과 교환하기도 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환을 매개로 호모 파베르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한다. 이리하여 공공 영역이 개발된다.…

아렌트가 시사했듯이 취직은 단지 돈의 문제만 해소하는 게 아니다. 취직은 목적의식을 부여하며, 자신도 남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 고용'은 정치적 의무이자 도덕적 의무다. 개인적 차원에서 취직은 유용한 시민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10.취직, 158~164쪽)




중세에는 보통 마흔이면 죽었으므로 중년의 위기라는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백 살까지 살고 예순 살까지 일한다고 가정할 경우, 정의하기도 어렵고 문화적으로 정해진 형태도 없는 인생이 40퍼센트나 남게 된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의 수명을 늘려주면서도 그 삶을 잘 이용하기 위한 수단은 제공하지 않는다. 마치 정년퇴직자 주택을 건설하면서도 부수 시설인 상점이나 영화관은 짓지 않는 부동산 개발자들과 같다. (15.중년의 위기, 232쪽)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 10점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지음, 남경태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